교사의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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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선생님을 부른다고 "티처"라고 부르는 건 못봤어도, 대학 교수에게 프로페서라고 부르는 건 봤다. 그리고, 학생이 선생이름을 수업 시간에 바로 부르는 것은 미국에서도 실례에 해당한다. 수준있는 학교라면 이렇게 부르는 학생 없다. 대부분 미스터, 미스/미즈 등을 앞에 붙여서 존칭을 부른다. 이런 것은 아주 엄격하다(좋은 학교라면). --김창준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지만한국의미스미스터는 영어하고는 또 다른 것 같습니다. --Felix

미시간대학교(Univ of Michigan) 경제학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계량경제학자가 있다. 이름은 게리 솔론 (Gary Solon)이다. 그가 첫 수업에 들어가 늘상 하는 얘기는 "Call me Gary. Never call me Dr. Solon or Professor Solon." 그의 복장은 늘 무슨 글자가 써진 싸구려 티셔츠에 허름한 체육복같은 바지차림이다. 외모로 봐서는 교수인지 거리의 부랑자인지 구분이 안된다. 그는 수업시간에 유행가도 부르고 오페라 아리아도 부르고 제 멋대로인 것 같지만 누구보다도 잘 가르친다. 그리고 연구업적도 탁월하다. 그에게서 배운 학생이라면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같은 학교에 칼 사이먼 (Carl Simon)이란 수학교수가 있다. 그도 학생들이 자기를 '카알'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난 지금까지 수학을 그 사람처럼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근데 이건 미국 중서부의 이야기이다. 남부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내가 일하는 조지아대학교에서는 일단 교수라면 반드시 "Dr. 아무개"로 불러줘야 된다. 그리고 Professor가 원래의 '교수'란 직함에서 요즘은 '대학강단에서 가르치는 모든사람'을 뜻하는 호칭으로 의미확장이 되었다. 대학원생 조교도 강의를 맡으면 호칭이 'professor'가 된다. 남부의 학생들은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주 미안하고 어색한 모양이다. 나도 대학원 조교시절부터 'professor'란 호칭으로 불리워졌는데 첨엔 이상하더니만 자꾸들으니 거기 익숙해짐을 느꼈다. 또 한가지, 7년을 지도교수로 모시던 하늘같던 분이 있다. 이름은 단 맥크리어리 (Don McCreary)이다. 7년을 한결같이 Dr. McCreary로 불렀는데 내가 디펜스를 마치고 난 직후 자기를 앞으론 'Don'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넘 어색했다. 미국애들은 그냥 하루아침에 새 호칭에 적응하던데 난 아직도 이 사람을 Dr. McCreary 라고 부른다. 난 정말 어쩔수없는 한국사람인가보다. --병준

스웨덴은 유럽 특유의 학제 전통이 이어오는 곳이지만서도, 1968년 이후 '호칭 혁명'을 거치며 대학에서의 호칭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과 당 한 사람 밖에는 있을 수 없는 정교수(professor) 역시 '에릭'이나 '얀'일 뿐, '프로페수르 칼손'으로는 불리지 않는다. 그렇게 불렀다간 바로 이름을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유럽 대륙보다는 잉글런드의 전통을 따르는 미국대학과는 그러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블룸즈버리

우리나라는 수직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언어도 상대에 따라 분리되어 쓰인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자(특히 학문)는 존경받아왔다는 점에서 결과는 당연한것이 아닌가? 존경받는 이유는 따로 생각하고라도 말이다. 너무 무책임한가?...--nonfiction
우리 나라의 수직적인 사회구조 체계는 유교의 철저하게 영향 아래서 발달된 것이라고 ChatMate는 생각합니다. 일전 어느 노교수가 '유교가 끼친 가장 큰 폐해'로 바로 이것을 지적하는 것을 보았지요. 오륜은 본래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에 가깝다고 합니다. '군신유의' 즉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는 상호관계일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충성해야 하는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장유유서'는 '위아래'가 아닌 '전후순서'를 말하며, '부부유별'은 부부가 서로 같지 않음을 의미하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귀중한 격언입니다. '부자유친' 또한 '孝'라는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붕우유신'은 말할나위도 없는 일이지요. 어쩌면 진정 공자가죽어야나라가살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see also 공자가죽어야나라가살까
그런데, 오륜의 기원은 또 맹자로 보기도 하는데... 공자는 죽어야 되고, 맹자는 살아도 되나? :( --ChatMate
사람을 그릇된 자세로 보는 시각이 죽어야 합니다.--nonfiction
교육자와 학생은 인류(공통?)의 재산인 '지식'과 '학문'을 넘겨주고, 넘겨받는... 서로서로 '대등한' 계주주자. 함께 학교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과학자

어떠한 호칭이든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호칭으로 부르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위의 Gary Solon교수의 경우 자신을 "Gary"라고 불러주길 원한다고 학생들에게 말한것일 뿐이다. 서양에는 이웃집 아저씨도 친하면 존칭도 없이 이름만 부르는 습관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습관이 없다. 그러한 서양의 문화가 우리의 문화보다 좋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좋고 나쁘고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우리말의 존대말이란게 수직적인 사회구조를 가진결과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가 예의를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의에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도 포함되어 있다. 서로 동갑내기인 경우에도 초면에는 서로 존대말을 쓰는 것이 예의이다. 이러한 예의라는 요소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과 위배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사말은 친근함의 표시이다. 서로 예사말로 대화하는 동갑내기는 서로 친하다는 반증이고 서로 존대말로 대화하는 동갑내기는 만난지 얼마되지 않됐거나 사무적인 관계라는 반증이다. 어린아이에게 예사말로 얘기하는것도 어린아이에게 먼저 친근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귀여움을 받고 자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대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생물학적으로 또는 학문이라는 세계의 광대함에서 생각한다면 평등하다. 그러나 가르치고 배우는 역할에서는 대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상호작용이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학문의 세계에 뛰어든 사람이고 배우는 사람을 먼저 이끈다.




See also 교수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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