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좋아하는그리고싫어하는번역가

FrontPage|FindPage|TitleIndex|RecentChanges| UserPreferences P RSS
내가 좋아하는/싫어하는 번역가 see also 우리시대최고의번역가들

Jindor: "서재 결혼 시키기"라는 책의 번역에 대해 어떤 분이 써내려간 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 역시 흥미롭게 읽은 책이라 관심이 갔다. 주로 그 책에 숨어있는 오역들을 나열하고 자신의 평을 곁들인 글이었다. 의외로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편집자가 덧글을 붙이며 오역이라 지적당한 문제의 부분들에 대해 부분적 인정과 논박을 계속했고 자연히 덧글은 계속 길어졌다. 본문 못지않게 이어진 덧글도 아주 볼만했다. 그 글은 내게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또 훌륭한 번역가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ShowMeTheSource. I'm really interested too.

나는 좋은 번역가란 원저의 의미와 원문의 표현속에 담긴 뉘앙스를 왜곡하거나 빠뜨리지 않고 다른 언어로 (이경우엔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나는 누가 좋은 번역가인지 가려낼 힘이 모자란다. 그 판단을 위해서라면 적어도 원저를 어려움없이 의미를 파악하며 읽어내려갈 수 있는 능력과, 번역서를 읽고 원저와 대조하는 열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둘중 어느것도 온전히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다른 이들의 평과, 번역서를 읽었을 때 받은 일차적인 느낌에 기대는 형편이다. 즉 문장이 유려하고 맥락의 적절한 흐름이 갖추어져 있으면 훌륭한 번역이고, 한국어 문법과 통사구조에만 겨우 들어맞는(또는 그에 어긋나는) 어색한 문장과 앞뒤의 의미를 이어나갈 수 없는 문장들이 돌출하면 나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원저의 졸렬함을 역자가 뒤집어 쓸 가능성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서재 길들이기" 관련 글은 내 맘에 들면 "훌륭한 번역"이라고 추켜 세우거나 남의 평을 그대로 옮겨 담던 습관을 자성하게 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서재 결혼 시키기"를 아무런 의구심이나 분노(?)없이 유쾌하게 잘만 읽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조촐하게 덧붙이고 싶은 것은, 최용준씨의 "개는 말할것도 없고"가 오역이 거의 없는 아주 드문 훌륭한 번역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번역본에 정말 오역이 없음을 확인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최용준씨는 과학기술도서 번역상을 수상한 "보증받은" 번역가이고 그 소설에서는 수많은 각주를 통해 원저의 이해를 돕고 독자들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점들을 일깨우고 있는 매우 성실한 번역을 했음을 한눈에 알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정확한) 번역과 성실한 번역은 다른 것 아닐까. 빅토리아 시대의 대화를 포함하고 있을 위트 넘치는 문장들을 정말 오역없이 소화한 것인지 궁금한 점으로 남는다.

이 글에서는 오역에 대한 지적이나 좋은 번역에 대한 내겐 버거운 내용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번역가와 싫어하는 번역가, 그리고 그 근거에 대한 글을 한번 적어 보려고 한다. 그것은 위에 변명한 것과 같이, 좋은/나쁜 번역가라는 말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다.

나는 이세욱씨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2년동안 배우고 그친 후 지금은 기껏 단문 몇개를 간신히 해석할 수 있을 뿐인 내 프랑스어 실력으로 그의 번역이 정확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번역한 베르베르의 소설개미를 비롯한 여러 소설과 그외 열린책들을 통해 내놓은 모디아노, 봉그랑, 상뻬 등의 프랑스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가 원문의 의미와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말과 문장 공부를 했으며 또 그 결과를 작업에 얼마나 열심히 반영하고 있는지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쓰이지 않는 고유어를 찾아 번역에 쓰는 일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평가는 -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번역해 놓은 프랑스 소설은, 한글을 모국어로 구사하는 소설가가 써놓았을 법한 우리말에 누구보다도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베르 등이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독자들에게 자연스러울 그네말로 썼듯 그 번역서는 우리말에 능숙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또는 신선한 맛을 느끼며 읽을 수 있는 한국어여야 할 것이다.

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좋아한다. 개미는 편의점에서 1권을 사서 그날 저녁으로 완파해 새벽녘에 다시 편의점으로 나가 나머지 권을 사와 하루만에 다 읽었다. 읽던 중 '화병에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차올랐다'(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현이 문맥상 이해가 가지않았던 차에 전공인 러시아어에 같은 표현이 있으며 이것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라는 숙어적 표현임을 알게되었고 바로 그 '개미' 번역본의 그 문구가 떠올랐다. 잘 쓰이지 않는 고유어도 좋지만 원문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 Anke


외국어를 번역해놓은 우리말이 풍요로움을 갖추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네들의 문법구조와 선호하는 어휘들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은채 한국어 속으로 들여온 번역 문장들은 한국어로 가능한 표현 전체집합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함수 관계로 비유하자면 치역이 공변역의 작은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세욱씨는 그 치역의 크기를 넓히고 또 넓혀서 번역이라는 사상(mapping)이 전사함수에 가깝게 되도록 하는 어렵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국 출장중이라 책들을 직접 들여다 보며 구체적인 예를 많이 들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그의 번역을 통해 생소하기만 하던, 잊혀져 가던 고유어들이 다시 문학작품속에 들어와 생명을 얻어 숨쉬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의 번역에 통해 풍요로움을 되찾는 국어어휘에 뿌듯함을 느꼈달까. 단어는 사전에 실림으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과 대화에 쓰일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가운데 가장 빛나는 장면은 개미혁명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되는 프랑스어 퀴즈의 번역이었다. 프랑스어 단어로 표기되어야만 의미를 가지는(우리말에도 그런 예가 많은데, 하나를 들자면 '책상에는 두개 있고, 강아지에는 하나 있고, 소쿠리에는 하나도 없는게 뭐지? 하는 수수께끼이다. 답은 "받침"이다. 이것을 외국어로 옮겨야 한다면 난 앞이 캄캄할것 같다), 과연 의미만 간신히 통하는 우리 수수께끼로 완전히 대치하지 않고서 가능할까 싶은 내용을, 원문의 단어와 의미, 그 문장들과 어감을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은채 고스란히 한국어로 옮겨놓았다! 그러기 위해서 동원한 고유어들, 그 알맞은 단어를 찾기 위해 이세욱씨가 들였을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는 그 이상의 훌륭한 번역 표현을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다. 성실성과 언어에 대한 애착, 지식이 두루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생각해낼수 없었을 경이로운 일이다.

물론 그의 모든 번역과 시도가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였나 "천사들의 제국"이었나? 거기서 이세욱씨는 "-것이다, -것이었다" 대신에 회화체로만 주로 쓰이던 "-거였다"라는 문장 종결체를 반복해서 쓰고 있다. 색다른 느낌은 들었지만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도 나는 이세욱씨가 번역한 책들을 거의 모두 사본다. 원저의 내용과 수준에 상관없이 그의 번역 작업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잠시 본인의 어설픈 번역에 대한 기억을 적어 보고 싶다. 대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틈타 친구들 서넛과 책을 한권 번역한 일이 있었다. 물론 돈을 벌어보자는 순수한 목적이었다. 취미와 조금 관련이 있던 데이터 커뮤니케이션 관련 기술서적이라 문장의 아름다움보다는(저자는 재치넘치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다 깔아뭉개서 좀 미안했다) 정확한 의미 전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번역 목표였으므로 나는 될수 있으면 원문의 문장구조가 흐뜨러지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없는,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우리 문장을 만들려고 애를 썼다. 사실 그것만 해도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대학원때는, 미친듯이 읽고 싶었지만 아무도 번역을 안하는 일본어 서적("마르키 유로록 집성"이라는, 7~80년대 유럽 록음악의 대표적인 음반 해설식으로 된 소개서다)을 직접 우리말로 옮기기로 마음을 먹고, 웬만한 일어학원 교재보다 낫다고 누가 추천한 종로학원 일본어 교재를 사다가 2년가까이 공부하면서 번역했다. "일본어 대충 때려가며 그냥 읽기"와 "번역"은 정말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한자읽기때문에 일본어 한자 읽기 사전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즈 일본어판을 구해야 했고(이 둘 없이는 불가능했다), 가다가나 오십음속에 갇혀 뭉툭해져버린 뮤지션과 앨범 제목을 각종 원 유럽어 철자로 복원하느라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해서 이젠 그 책은 쳐다 보기만 해도 정나미가 떨어진다. 인터넷이라곤 텔넷과 FTP, Gopher 서비스가 전부였던 시절이라 다른 자료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덕에 우리 회사에 출장왔던 선량한 일본인 엔지니어와 명동,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던 일본 여행객들도 고생을 많이 했다. 고유명사 한자 읽기는 일본인들도 서툴렀다. 모국어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는 일본인들의 표정은 가끔 당황스러워 보였다.

어쨌든 그 번역본은 여러 동호회 회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속에 1,2차 제본 50부가 다 팔렸다(홍대에 있는 전문 레코드점 주인도 샀으므로 가면 한 부 레퍼런스 용으로 꽂혀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성원에 그만 정신을 못차리고 "마르키 이탈리안 록 집성(이탈리아 록 레코드 감상만 따로 단행본이 나왔음)"도 얼떨결에 시작해서, 역시 말못할 고생을 해가며 번역했다. 회사일에 치여서 3년 가까이 걸렸다. 내 일본어 실력은 그래서, 그 책들에 평을 쓴 일본 오타쿠들의 이상한 문장들에 대한 해석력과, 음악 묘사 전용의 특이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어휘력, 가다가나 보고 원어 때려 맞추기 실력 등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변태적인 꼴을 띠고 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이탈리아 격언은 상투적이긴 해도 한치의 거짓과 과장없는 눈물겨운, 번역가들의 하소연이다. 내가 어설프게, 너무도 힘겹게 해치운 번역과는 차원이 다른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번역가들 아닌가. 그 뒤로 나는 문학작품(소설, 에세이, 시는 말할것도 없고)의 번역, 그러니까 단순한 의미뿐만 아니라 저자의 의도와 뉘앙스까지 살려야 하는 번역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고 시도는 꿈도 못꾸고 있으며(그냥 읽기만 할란다), 그 번역일에 종사하는 번역가들의 노력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경제활동의 수단으로 여기기에는 미안한, 무척이나 고되고 겉보기에 두드러지지 않는, 실로 매우 가치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창작 못지않게 번역을 통해 한국어는 거듭나고 풍요로와진다. 번역가들은 한국어문학의 개척자이자 수호자다.

그런 훌륭한 번역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인물이 안정효씨가 아닐까 한다. 그의 번역을 통해 접했던 숱한 20세기 문학의 정수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뿌리, 가시나무새, 백년동안의 고독, 어쩌면 나는 안정효씨의 펜끝을 통해 지금의 독서세계의 일부를 구축하고 꾸려온 셈이다. 그의 번역작업은 한국의 번역사라는 나무를 이루는 굵직한 줄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정효씨가 싫다.

그 모든 혐오는 "번역의 테크닉"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그의 책에서 비롯되었다. 번역잡지(번역나라 아니면 번역세계였을것이다)에 간간이 실리던 그의 번역론에 마음을 뺏기고 있던차에, 그가 단행본으로 번역 지침서를 내놓았다는 소식은 내게 마치 사막을 헤매는 사람에게 낙타와 지도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도 맞먹는 기쁨이었다. 그뒤 제목을 바꾸고 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 책이 꽤 인기리에 판매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한장한장 빨아들이듯 그의 번역론을 읽어나가던 나는 점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책을 책상위에 내려놓고 째려보듯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 글이 안정효씨의 글인가? 하나둘, 나는 그의 글이 기분나쁘다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잘난 이가 글로 부리는 횡포는 내가 안정효씨의 글에서 기대하던 것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국어로 쓰지 않는 언어에 우리가 어쩔수 없이 노출시키는 무지의 몇몇 단면들이 이렇게 그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과민한 것인가. 몇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지만 나만의 섣부른 오독은 아닌것 같았다. 그는 우리가 영어를 잘못쓰고 있다고 끊임없이 비아냥거렸다. 급기야 우리들이 엉터리로 고유명사들을 읽고있다고 마음껏 비꼬는 부분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모욕감마저 들었다.

사실 고유명사 읽기의 어려움만큼 독서 애호가들과 번역가들을 괴롭히는 것이들이 또 있을까? 성실한 번역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 이윤기씨도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영국 지명 Leicester를 "레이체스터"라고 적었다. 당연하다는 생각과 자신감에 사전을 들추어 보지 않은 것이다. Gloucester를 "글루체스터" "글로체스터"로 읽고 싶으신 분도 한번 사전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그런데 Cirencester는 이와 다르게 또 쓰인대로 발음을 한다.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사람들 맘대로다.

고종석씨가 '불란서, 법란서, 프랑스'라는 글에서 예로 든 영어 Majoribanks(마시뱅크스), Featherstonehaugh(팬쇼)처럼 기이하다시피까지한 경우 외에도, 고유명사들은 지방성과 숨은 유래, 개인 또는 집단의 선호 등의 여러 이유로 대단히 읽기 어렵다(조사해보니 후자의 경우는 위의 발음외에도 다섯가지 방법으로 다르게 읽는다고 한다). 유태계 지휘자 Leonard Bernstein은 "레너드 번스틴"이고, 저명한 컴퓨터 과학자 Donald Knuth는 셰익스피어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자신의 이름을 "도널드 크누쓰"로 읽는다. 따로 공부를 해야하는 외국어는 차치하고서라도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영어도 영국영어로 넘어가면 예상과 상식을 벗어난다. 영국의 소설가 Anthony Powell은 "안쏘니 폴"이고, Leveson-Gower는 "루슨 고어"이고, Hiscox는 "히즈코", Ruthven은 "리븐", Beauchamp은 ("보샹"이 아니라) "비챔", Cockburn은 "코번", 시인 William Cowper는 "윌리엄 쿠퍼", 캠브릿지에 있는 "Caius Coellge"는 "키스 칼리지", 옥스포드에 있는 Magdalene College는 "모들린 칼리지"이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이민 McLeod 집안은 아무도 자신의 이름들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현실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McCloud"로 성을 바꿔야 했고, "맥카이"였던 McKay 집안은 결국 조상들과 이제는 발음이 다르게 되어 버렸다고 한다.

고유명사의 철자와 발음은 시공간에 따라 가늠할수 없이 바뀐다. 우리도 그렇다. 스페인명임이 명백하여 우리에게 "산호세"였던 샌프란시스코의 지명은 요즘들어 숱한 히스패닉들이 여전히 그 발음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새너제이"로 읽고 일부 한국 언론은 그것을 따라간다. 어떻게 읽어야 맞는가? 후자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라스베가스가 위치하고 있는 주 이름 Nevada는 상당수 현지인들의 발음에 가까운 "너베이다"를 따르지 않고 "네바다"라고 쓴다. 어떤 표기가 바람직한 것인가? 알면 미국영어식, 모르면 스페인어식?

영어라는 창문을 통해 읽어온 세계의 지명들은 또 어떻게 표기해야 맞는가? 역시 고종석씨가 같은 책을 통해 짚은것 외에도 아시는분들이 많겠지만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플로렌스는 피렌체, 베니스는 베네치아라는 아름다운 원명을 가지고 있다. 덴마크의 수도는 코펜하겐이 아니라 쿠펜호웬이며,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도시는 헤이그가 아니라 덴 하흐다. 영미인만 이런 전횡을 부리는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의 수도를 론드라(Londra)로, 프랑스의 수도를 파리지(Parigi)라고 멋대로 부른다. (이상의 예는 "The Mother Tongue: English & How it got that way", Bill Bryson, 1991과 "감염된 언어", 고종석, 1999 참조).

일본어 책을 번역하면서 맞닥뜨린 이름 "松本 理"를 무심코 "사카모토 리"라고 읽었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일본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두명이 모두 "사카모토 마코토"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그대로 써서 제본에 들어갔는데, 한참 뒤에야 그가 만든 캔터베리 패밀리 트리(영국 캔터베리 지방 뮤지션들의 계보) 한구석에 깨알만한 글씨로 직접 "SAKAMOTO OSAMU"라고 써넣은 것을 보고 아연해한 기억이 난다. 자국민들도 모르는 이름을 어떻게 우리가 쉽게 읽을수 있겠는가.
AnswerMe 한자가 松자 맞나요?
본문의 한자가 잘못되었습니다. '오오사카'의 '사카'(板이거나 坂 둘중의 하나일겁니다)입니다.

이러운 고유명사 읽기의 어려움을 아는지모르는지, 안정효씨는 우리가 미국 영화 배우 닉 놀티를 닉 놀테로, 그리이스 소설가 카잔차키를 카잔차키스로 읽는다고 조롱한다(예가 많았는데 두개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과연 그는 위에 예로 든 이름들을 다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아마 보통사람들보다는 많이 알것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교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번역 실력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예외일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향해 뭐가 묻었다며 냉소하는 그의 말투와 태도가 싫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이전에 품고 있던 호감을, 마치 한쪽으로 접혔던 종이가 반대쪽으로 더 잘 접히듯 오히려 반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헛점은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결국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무지를 폭로하게 만든다. 같은 책에서 그는 LG(금성)에서 내놓은 워크맨 아하(AHA)를, 감탄사 ah? ha! 두개의 얼치기식 한국형 조합이라며 비웃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아시다시피 아하는 80년대 중반 Take On Me라는 곡과 환상적인 뮤직비디오로 전세계를 강타한 노르웨이 밴드의 이름이며, LG전자의 워크맨 아하는 그무렵 밴드의 이름을 따서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장수하고 있는 브랜드명이다. 이게 시비를 걸 내용인가?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현란하게 드러낸 꼴이다. 나는 안정효씨의 비아냥거림을 패러디해서, 역시 80년대 중반에 판매된 아이스크림 듀란듀란(Duran Duran)에 이렇게 시비를 걸 수도 있다: "보아하니 순 우리말 도란도란을 얼치기식 영어로 바꾼 것인데, 요즘 점점 심화되는 우리말의 왜곡과 외국어의 무분별한 선호 현상이 심히 우려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먼 르봉과 제임스 테일러의 수려한 외모, Reflex, Rio, Hungry Like the Wolf등의 히트곡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위의 비난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이겠는가?
듀란듀란 테일러3총사는 존, 앤디, 로져. 제임스는 없습니다. -- Anke

그는 또 OK Corral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한국인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가축우리(Corral)에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어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OK Corral은 영화 제목에서 이름을 따온 미국계 레스토랑 체인이며, 한국사람들뿐만 아니라 미국사람들도 레스토랑에 걸린 버트 랭카스터의 사진을 보면서 잘만 밥을 먹는다. 안정효씨는 미국사람이 지은 레스토랑 이름도 기분 나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시비를 건다. 또 "-barn"이라는 이름의 한국 레스토랑을 들먹이면서 헛간(barn)에서 밥먹는 불쌍한 사람들 걱정을 또한다. 노스캐롤라이나에 회사일로 출장을 갔었는데, 앵거스 반(Angus Barn)이라는 스테이크 집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고기를 썰며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만 하더라. "외국에 한번도 나간 일이 없다"는 사실이 영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조금도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이름이 창꼬챙이라니 당신 조상은 영어를 아냐"고 따지는 것과 다름없는 글을 써놓았으니 안되어 보일 뿐이다. 그는 아마도 위의 이름들이 영어에 무지한 한국인의 어설픈 창작이라고 여기고 마음껏 공격한 듯하다. 안됐다.

또 안정효씨는, 가전제품의 명칭에 한때 유행처럼 붙었던 "퍼지" (퍼지세탁기, 퍼지카메라 등)라는 용어도 심히 맘에 들지 않았는지 펜끝을 들이대고 "아마 fursys라는 단어에서 따온듯한데 - " 라는 근거없는 주장으로 시작해서 사람들이 의미를 알고나 쓰는건지 모르겠다고 냉소하였다. 전산이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졌던 사람이라면 퍼지(Fuzzy)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공과대학 컴퓨터 사이언스 교수인 자데(Zadeh)가 집합론의 확장 개념을 내놓으면서 집합 원소에 부여한 소속도(원소는 집합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가 아니라 0~1까지의 소속도를 가지게 된다)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며, 한때 인공지능분야에서 각광을 받았던 이론의 이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나친 비난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글을 보면서 "무식하면 참 용감하군"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별다른 이유가 없었으면 냉큼 샀을 그의 "가짜영어사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책에도 가득할 그의 조소는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안정효씨에 대한 반감이 근거없는 흠집내기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싶어서 글이 좀 길어졌다. 윗글은 절대로 그가 오랜 시간동안 행해온 노고를 깎아 내리고자 한 말이 아니다. 나는 그저 겸손이라는 보편적 미덕이 그의 언행에서도 우러나오길 바라는 것이다.

나는 푸코의 추(장미의 이름이었나) 개정 번역판을 내놓던 무렵 이윤기씨의 고백을 기억한다. 자신의 전작업이 제대로 된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자료를 추가 입수해서 새로 번역에 임한 그의 태도, 결코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일을 털어놓은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일로 이윤기씨의 자아성찰의 깊이를 가늠해 볼수 있었던 내가 그 못지 않은 번역가인 안정효씨에게 같은 깊이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조롱과 비아냥이라고 받아들였던 안정효씨글속의 표현이, 실은 그의 의도가 아니라 쓰던 글의 흐름에 어쩌다 동원된 수사의 한 기법이기를 바란다.

에잇. 누구 욕을 했더니 기분이 나쁘다. 어쨌든 아직 내게 안정효씨는 "싫어하는 번역가"다. 잘나고 잘난척하고 그래서 남들 비웃는 사람들 대학때 신물나게 많이 보았다. 안정효씨가 그런 사람이라면 번역한 책은 안볼란다. "이런건 내가 번역 안해주면 아무도 못하겠지" 생각하며 번역을 하는지 누가 아는가. 나는 이세욱씨의 번역서는 계속 살것이며 안정효씨의 책은 저작이건 번역이건 절대로 안 사고 저자 사인회 같은 데에도 절대로 안 갈 것이다. (2002/2/28) -- Jindor


"; if (isset($options[timer])) print $menu.$banner."
".$options[timer]->Write()."
"; else print $menu.$banner."
".$timer;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