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씨 소설은 이제 겨우 두권인가 세권 봤을 뿐이지만, 이 사람 소설 쓰는 법은 점과 선을 이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커단 붓으로 점 몇 개 꽝 꽝 찍은 다음에 그걸 쳐다보다가 적당할만한 선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거죠.
(죽었다. 왜 죽었냐고? 이러저러해서 죽었지. 그 '이러저러'를 책 한 권 내내 늘어놓은 것이 리바이어던이겠죠.)
독서 습관이 그다지 부지런하고 체계적인 편은 못되는지라 저는 지금 미스터 버티고를 반쯤 읽고 내팽개쳐둔지 일주일 정도, 그리고 문 팰리스는 어제 보기 시작해서 오늘 끝냈습니다만. 그게 무슨 재미나 가치의 차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고, 단지 오늘 가방이 무거워서 이 책을 안 갖고 나갔는데, 도서관에서 저 책을 빌려서 지하철에서 부터 보다보니 그냥 그 책을 계속 보게 됐다는 식이죠.
각설하고, 이미지건 사건이건 뭔가 강렬하고 때로는 충격적인 것을 거두절미하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읽는 도중에는 긴장감이 완화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작가가 의도한 건 그 이미지나 사건이 그 내용 사이에 배어들게 하는 것이었겠죠. 근데, 뭐, 개인적으로 이런 식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처음엔 정신 못차리고 주변 얘기에 넋 놓고 있다가 '어랏. 근데 이놈이 죽었단 말이지!' 라고 황급히 각성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쳇, 당신 소설 쓰는 법 원래 이렇잖아요.' 라는 식으로 냉담하게 읽게 되버렸어요.
뭐, 그건 취향 차이겠고, 이 사람 칭찬해 주고 싶은 건 그 디테일한 가지치기가 참으로 읽어줄만 하다는 건데, 거기에는 캐릭터의 독특함, 풍부하면서도 적당하게 자제하는 사물 묘사, 꽤 진지하게 파고드는 심리묘사, 뛰어난 말 재간등등이 포함되겠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괜찮은 건, 그 가지치기와 굵은 점이 어떻게든 체계를 이룬다는 점인데, 외형적으로 볼 때는 조금 엉성한 감도 없지 않지만, 다 읽고 나면 뭔가 어릴때 프라모델 조립하고 난 뒤에 느끼는 그런 기분이 든다는 거죠. 비유가 너무 조악해버리긴 했지만, 확실히...고전적인 조각품 보는 기분은 아닌 것 같아요. (요새 고전소설만 읽어서 그런가. --;) 가지치는 모습에서는 즉흥성이 조금씩은 보이는 만큼, 그게 매끈한 체계로 되지는 않지만, 거기서는 나름대로 신선함과 심오함이 말 그대로 자유롭게 표현될만한 여지가 있고, 작가는 그걸 최대한 이용해 먹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삶을 극단으로 몰아나가 인생을 배워먹는다는 내용 자체 만큼은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저로서는 그런 식의 진지함을 물리도록 읽고 들어온 터라 왠지 때늦은 니체, 한물간 하이데거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네요. (이건 일시적인 슬럼프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너무 일찍 늙어버렸나.) 그러니까... 자유와 정의를 외치면서도 그게 닳아빠져버려서 도저히 못들어주겠는 경우가 있고, 정말로 진솔하고 신선해서 '역시 인생은!' 하고 공감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이 사람 소설이 전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후자죠. 근데 뭔가 조금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책이었어요. 이미지도 좋고 내용이나 주제 의식도 괜찮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다는 거군요.
p.s.
흠...한물간 니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플라톤으로 돌아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도대체 다음 대안은 뭐죠? --;
전부터 누구한테라도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 포스트모던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지 않아요? --거리
'달의 궁전'이라는 새 제목으로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