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존재의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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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은 사과가 아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는 설과 마그리트가 생각나는... ㅡ.ㅡ) 꾸는자
하이데거...죠.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zephid
ReneMagritte 와도 관련있어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Felix

질문: 언어는존재의집이다 : 무슨 뜻인지 개념설명좀 ...

위와 비슷한 걸 그려놓고 마그리뜨는 그위에 ceci nest pasune pomme 라고 썼다고 하네요.(1964년작) 뜻은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진중권씨의 미학 오딧세이 2권 386페이지를 보시면 나옵니다. 언어는 결국 존재를 정의하는 거라고 하이데거가 말을 했다는데, 그림은 사과를 그려놓고 글로 이것은 사과가 아니라 했으니... 하이데거 메롱 머 이런거죠...원래 마그리뜨 그림은 기발하자나요. 아참 마그리뜨 그림은 컴퓨터과학이나 전자공학과의 Contemporary Logic Design 이라는 전공책 앞표지에도 있습니다. 허걱 결국 쓸데없는 얘기의 횡설수설 -_-;;; --홍차중독

죄송하지만,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그리뜨의 그림("Ce n'est pas une pipe")은 전통적인 지칭적 언어관(즉, 언어는 '이름들'로 이루어져있고, 그 '이름들'은 대상들을 가리킨다고 하는 생각)을 뒤집어 버리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언어의 의미란 '대상을 명명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식의 생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죠 (마그리뜨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두 가지 측면-다시 말해, "언어=명명, 그림=재현"의 관계-을 동시에 생각하면 조금 더 복잡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그러한 전통적 언어관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전통적 언어관에 대한 비판이죠(따라서, 마그리뜨의 그림이 "하이데거 메롱^ㅠ^"으로 읽히기는 힘들다는 것이구요).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그의 존재론적-해석학이라는 철학관으로부터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하이데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간단하게 설명을 드릴 수밖에 없지만,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언어가 "대상을 명명한다"라는 사고 방식은 이미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는 표시에 다름아니죠. 다시 말해,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들"을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한다"는 식의 "도구적 언어관"에 대해 하이데거는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하이데거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쉬운 책으로는 박찬국/이수정 공저의 <하이데거>(서울대출판부)를, 조금 어려운 책으로는 오토 푀겔러의 <하이데거 사유의 길>(문예)를 권하고 싶습니다). -- Closely
^^; 책을 잘못읽었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홍차중독

예전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이 말을 본 기억이 나네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선생님께서 '언어 결정론'에 대한 얘기를 해 주셨던 것 같은데, 이를테면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눈에 관한 어휘가 우리 보다 훨씬 많아서 우리는 그냥 '눈'이라고 부를 것도 다 특성에 따라 구분해서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인식의 표현이라는 것이죠. 세상은 아날로그이고 언어는 디지털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이어져 있지만 언어는 끊어서 지칭하게 되기 때문에 해당 어휘가 있다는 것이 인식에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지개는 7가지 색상으로 이름을 붙였지만 꼭 7가지일 필요는 없는 거죠. '빨'과 '주' 사이에는 분명히 그 중간색이 있지만 우리는 '빨'과 '주'에 해당하는 어휘만 있으므로 그것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언어라는 것이 완전한 인식에 한계를 주는 것 같이 들리지만 사실 어휘를 갖는 다는 것은 기억과 사고에 필수적입니다. 사람 얼굴을 기억한다고 할 때 대충 얼굴 모양을 뭉뚱그려서 '음...... 저렇게 생긴 얼굴'하고 있으면 기억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말로 기억해야 하죠. '코가 오똑한 사람', '입술이 튀어 나온 사람', 등. 아니면 더 세분화해서 '이마는 넓고 눈썹은 진하고 눈은 부리부리하고 코는 오똑하고......'이런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가장 처음 것 보다 훨씬 오래,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대중매체를 통해서 듣는 유행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왕따'라는 말이 있기 전에도 그런 류의 현상은 분명히 있었지만 이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현상이 더 만연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예는 매우 많이 있습니다. 또한 개인이 말을 할 때도 적절한 어휘를 골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경영학에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는가?'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낮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도 관련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수준은 안 되지만 정리하자면, '언어는 사고의 편의에 대단한 기여를 하지만 세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보다 넓고 그 끝은 모호하다'입니다.
참고로 언어학에서는 '언어 결정론'에 대해서 예전에는 맞는 주장으로 생각했다가 요즘에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개

질문: 그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지 결코 '존재'는 아니란 말인가요?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는 구별됩니다. 지금까지 "존재"에 대한 많은 철학적 논의들이 사실은 "존재자"들에 대한 사유였을 뿐, 근원적인 사태(이건 편의상 붙인 설명입니다)로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이 하이데거 철학의 중요한 전언 중 하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존재와 시간>의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존재 물음의 구조를 분석하며 "물어지는 것", "묻는자", "물어지는 자"를 확인하고, "물으면서 물어지는 자"인 인간, 그의 용어로는 현존재(Dasein)가 이 물음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현존재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존재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현존재의 존재론적 해석학입니다. 현존재의 존재 물음은 존재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가장 우선적인 물음이라고 하이데거는 믿습니다. 그렇게 볼 때, 현존재를 중심으로 한 존재양태의 해석학이 바로 <존재와 시간> 중반부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무튼, 이 질문에서 "존재"는, 하이데거 용어로 볼 때, "존재자"라는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Closely

UnderstandingComics도 도입부에서 사과와 파이프 그림을 붙여놓고 언어(정확히는 그림)과 존재를 구분하라고 주문하죠. --k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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