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숲 출간 이후 일본에서는 와타나베신드롬라는 현상이 생겼다고 한다. 국내의 무라카미하루키 관련 커뮤니티를 방문해 보면 그것이 국내에도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코지모는 노르웨이의숲의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와타나베신드롬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 왜 그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코지모는 '비겁한 나르시즘 - 믿을수없는 초연함과 믿을수 없는 기품'이라는 발제로 그 거부감의 정체에 접근하고자 한다. (와타나베는 하루키 소설들의 주인공들을 부연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서술하는 와타나베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을 포괄하는 경우도 있을수 있음을 밝혀둔다.)
와타나베는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인 교류에 관심이 없으며 초연하여 대부분의 일에 매우 무심한 인간이다. 심지어는 자기자신에게조차 극도로 무심하다. 따라서 컴플렉스라는 것도 전혀 있을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주변엔 늘 매력적인 사건들과 매력적인 인물들이 끊이질 않는다. 또한 그는 비틀즈를 듣고 피츠제럴드를 읽는 등 나름대로의 문화적 소양도 뚜렷하다. 그는 거의 말이 없느나 매우 독특하고 위트있는 대화법을 사용하며 거의 관심사가 없으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추정해 보건대 성능력도 뛰어나다. 그는 혼자 있든 둘이 있든 언제 어디서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기품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자위행위까지 우아하게 한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 책을 읽는 행위, 산책을 하는 행위, 스파게티를 삶는 행위, 그의 동작과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깃들어 있다.
조금만 살펴보면 와타나베는 사실은 매우 이상적인 현대인이며 초인간인 것이다. 본인에 대한 끊임없는 자의식을 지닌 대단한 나르시스트라도 실행하기 힘든 기품을 와타나베는 저절로 알아서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평범하며 사회적 교류를 즐기지 않으며 무심하기 까지한 사람 주변엔 보통 재미없고 심심한 일만 일어나는 법이다.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일은 따분하고 때로는 구질구질한 법이고 자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사람은 누구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법이고 살다보면 별의별 민망한 일을 겪게 되는 법이다.
무라카미하루키가 작품후기에 쓴 반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족은 그가 노르웨이의숲을 집필하면서 얼마만큼의 자기만족을 느꼈는지를 반증한다. 그러나 그는 작품내/외적으로 그것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무라카미하루키가 주인공을 포장하는 완벽한 수법속에 숨겨져 있는 교묘한 나르시즘이 솔직하지 못하다고 느끼며 와타나베의 기품- 그 쿨함은 허상이라고 느낀다. 또한 언제나 알아서 동반되는 매력적인 사건 혹은 매력적인 인물들또한 허상이라고 느낀다. 와타나베라는 인물은 실로 불가능한 인간상이며 문화인들의 은밀한 나르시즘을 충족시켜주는 인물이다.
고백하자면 코지모는 무라카미하루키를 충분히 뛰어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즉 이 글은 과도한 하루키 신드롬 - 와타나베신드롬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삐딱한 사견일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코지모
그냥. 궁금해서 .. 묻는 것인데요.. 저는 글을 읽으면서 와타나베가 지독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겪으면서 자연적으로 열등감에 적응되어, 그 이하의 열등감에는 그다지 무감각해졌을 뿐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을 열등감이라고 해야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게다가 그가 나중에 성장해서, 그 외교관 선배의 여자친구를 대하는 모습에서, 글 자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와타나베의 심중이 글 내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냥.. 와타나베가 불가능한 인간상인지, 또 나르시즘을 충족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열등의식을 자위하는 것인지.. 또, 과연 그 사람이 쿨한 것인지, 아니면, 패배에 적응력이 뛰어난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naya
상실의시대까지의 와타나베, 또는 '나'라고 하는 인물은 사회에 대한 절망감에서 아직 재생하지 못한 상태로 나옵니다. 결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의 지표를 상실하는 상황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확실히 '삶'도 그렇다고 '죽음'도 선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죠. 화끈하게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긍정적인 메세지를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와타나베는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절망, 막막함, 고도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힘 앞에서 어느정도 주눅들은 평범한 인간형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다만,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중이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익명의 존재로서 무시당할 수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남과 같은 '나'로서가 아닌 그대로의 '나'로서 상대방 또는 이 고도자본주의 사회앞에서 쉽게 지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질때마다 합리화를 하고 그 져버린 상황의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능수능란하게. 패배에 적응한 것이 아니라 그 극적인 긴장상태에 적응하고 있는 모습이죠. '크게 절망할 이유도, 크게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다.' 자꾸 자신에게 되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양을둘러싼모험에서는 종국에 비탄에 솔직하게 빠져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패배에도 적응력이 뛰어나지만, 그는 그 과정 속에서 누구와도 다를바없이 아픔을 느끼지만 쿨하게 꾹 눌러 참고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이죠. --Roman
예전에 모소설가 동호회의 오프모임에 나갔다가 무라카미하루키 얘기가 나왔는데 한 여성분이 노르웨이의숲에서 남성들의 판타지를 읽더군요. 듣다보니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평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와타나베는 평범과는 거리가 먼 남자입니다. 와타나베가 자신감과 능력을 겸비한 남자였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저 열등감에 빠져있는 소박한 남자였으면 그처럼 설득력있게 대중들을 사로잡지는 못했겠죠. 상처를 지닌 아웃사이더로서의 진정성과 그의 쿨한 스타일이 맞물려 크게 어필한 것일 겁니다. 그리고 저는 어쩌면 그것이 현대를 사는 문화인들의 이상향이라는 관점으로 와타나베신드롬을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극단적인 접근법을 취한것이죠. -- 코지모
Khakii는 와타나베의 매력을 세 층으로 나눕니다.
- 세련된 생활 스타일
- 남을 의식하지 않는 태도
- 아웃사이더로서의 진정성
Khakii는 3이 와타나베의 진정한 매력이자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와타나베가 나가사와를 평가하듯, 와타나베 자신도 표면적인 쿨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지옥을 안에 품고 있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그 와중에도 진정성을 지키려는 사람이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하루키의 소설을 이끌고 나가는 핵심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