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여겸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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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마지막 주 Postech 신문 학술면 기고글: [http]인류는 조금 더 겸손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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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여! 겸손하라. - 고생물학자 StephenJayGould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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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를 돌려라. 그리고 멸종으로 리피디스티안 (척색동물의 조상)을 지워보라. 그러면 우리의 육지는 곤충과 꽃들로 이루어진 무적의 왕국이 될 것이다."|}}

위의 말은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유명한 고생물학자이자, 수많은 과학저술로 더욱 유명한 스티븐 제이 굴드가 한 말이다. 또한 이는 진화를 박테리아로부터 무척추동물, 척추동물, 영장류 그리고 인간에 이르는 진보와 수렴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진화란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믿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한다.

1941년 태어난 굴드는 어릴 적 박물관에서 본 공룡 화석에 매료되어 컬럼비아 대학에서 고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종의 기원’으로 진화론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찰스 다윈의 경우처럼 굴드도 Naturalist (박물학자)이자 탁월한 문필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과학계에 남긴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사실 이 위대한 과학자이자 사상가의 저술과 생애를 단 몇 줄의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그를 따라다녔던 수많은 과학적 논쟁들만 해도 몇 년 만에는 정리가 힘들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유명한 독설가에 논쟁가였다. 그가 가는 곳엔 항상 논쟁이 따라다녔고, 그러한 논쟁들 속에서 탄생한 수십 권의 저술이 그를 빛나게 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그가 그의 생애를 걸쳐 고군분투하며 펼친 몇 가지 주제와 이러한 그의 사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단속평형: 다윈은 틀렸다.


굴드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2년 그의 동료 닐스 엘드리지와 함께 “Punctuated Equilibrium (단속 평형론)”이라는 종분화 (Speciation)의 새로운 이론을 제안하고 난 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Pubmed에서 논문을 검색하면 최근 엘드리지와 리뷰형식으로 다시 PNAS에 발표한 논문을 볼 수 있다). 찰스 다윈 서거 이후 종의 분화에 대한 메커니즘이 지속적으로 연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짧게는 수만 년, 길게는 수백만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 분화의 과정은 가설만이 난무할 뿐 검증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진화론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다. 동굴 속의 종유석이 어느 순간 둘로 나뉘어 자라는지 관찰할 수 없듯이 종분화라는 현상은 이루어진다는 확신만 있을 뿐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많은 진화학자들은 단기간 내에 관찰되는 소진화 (Microevolution) - 이에 견주어 종분화를 포함하는 진화의 과정을 대진화(Macroevolution) 라고 부른다 - 의 과정이 종분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가 진화의 증거라고 배워왔던 나방의 색깔 변화와 같은 소진화의 메커니즘을 파충류에서 조류의 진화에 그대로 적용시켜 왔던 것이다. 이를 단순화시켜 생각하면 소진화의 축적이 대진화로 이어진다는 설명이 된다. 종분화에 대한 이와 같은 단순적용의 이면에는 찰스 다윈이라는 넘지 못할 산이 버티고 있었다. 다윈은 진화를 충분한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현대의 진화학자들 또한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굴드는 다윈의 영향력을 과감히 벗어 던졌다. 그는 다윈이 골머리를 썩이며 불완전한 화석상의 증거때문이라고 결론지은 현상들 (단속되어 나타나는 화석들과 캄브리아기의 대폭발과 같은)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 했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종은 그의 부모 종으로부터 이미 완전히 분화되어 화석기록 속에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하나의 새로운 종이 출현하면 그 종은 일반적으로 멸종할 때까지 더 이상의 진화적 변화를 겪지 않거나 딸종들로 갈라지기 전까지 더 이상의 진화적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했다. 즉 평균적으로 500만년 정도 되는 종의 수명에 비추어 볼 때 평균적으로 5만년정도에 걸쳐 이루어지는 종분화의 과정은 지질학적 척도로 볼 때 “순간” 이라는 것이다. 종은 점진적으로 진화해서 새로운 종이 되지는 않으며 새로운 종은 전형적으로 국소 개체군들 중 하나 혹은 둘의 빠른 종분화에 의해서 부모 종으로부터 갈라지면서 생겨난다는 것이 단속평형설의 핵심이었다.

진화학자들의 영웅인 찰스 다윈의 가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듯한 이 도전적인 가설은 발표 직후부터 수 십년 동안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어떤 진화학자는 단속평형설을 조롱하기 위해 ‘Punk Eek’ 혹은 ‘Evolution by Jerks’ 라는 말을 만들었다. 단속평형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일단의 창조과학자들은 이를 ‘신이 생물을 창조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며 기뻐하는 코메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연구와 증거들은 종분화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며 굴드의 말처럼 누적적이고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소진화에 비해 종분화는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종분화에 관한 최근의 연구결과에 관해서는 서울에서 올해 8월에 열린 국제생태학회에 참석한 피터 그랜트 부부의 갈라파고스에서의 연구활동을 그린 베스트 셀러 ‘핀치의 부리: 조나단 와이너 지음, 이끌리오’를 참고). 그리고 그 수십 년간의 논쟁 끝에 이제 단속평형이론은 진화학계에서도 당당히 인정 받는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 번역되어 출판된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 (몸과 마음)”에서는 ‘Selfish Genes(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옥스포드 대학의 생물학 교수 Richard Dawkins와 굴드의 논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굴드를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이기적인 유전자’ 와 ‘눈 먼 시계공’ 의 저자 리쳐드 도킨스이다. 철저한 다윈주의자인 그가 (다윈과 도킨스는 모두 영국인이다) 다윈의 점진론에서부터 진화의 메커니즘까지 철저하게 미국적인 사고방식으로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 굴드를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리 만무하다. 영국의 명문 옥스포드와 미국의 명문 하버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이들의 논쟁은 한편의 무협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굴드는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다. 이에 관해서는 그가 아무리 부정을 하려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도킨스와 진화의 속도와 점진성 등에 관해 수십 년간 논쟁을 벌였고,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에 대해서도 리쳐드 르원틴 등의 과학자와 동맹을 맺고 전면에서 공격의 포문을 열었으며, 철학자 다니엘 데닛을 비롯한 ‘진화심리학’ 자들과도 심심찮게 논쟁을 벌이곤 했다.

일천한 지식으로 그의 이러한 행적을 모두 추적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가 논쟁을 벌이는 곳에는 항상 “인간” 이라는 대명제가 따라 다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는 우리 인류가 진화의 정점에 서 있다는 헛된 망상을 타파하기 위해 평생을 싸웠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굴드는 순교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인류를 “An Accident” 라고 본 사상가였다. 생명의 출현에서 지금까지 지구는 변함없이 박테리아의 것이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인류는 신의 축복을 받아 지구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출현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각의 변동으로 인해 우연히 생겨난 아프리카의 Great Rift Valley는 아프리카의 동쪽과 서쪽의 풍토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갑자기 동아프리카의 초원에 적응해야 했던 인류는 풍족한 삼림 속의 안락을 잃은 영장류의 후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를 지구의 역사에 우연히 출현한 먼지와 같은 존재로 보는 그 사상의 궤적을 따라 두 번째 주제인 “대멸종”을 살펴보기로 하자.

2. 대멸종: 우리도 언젠가는 멸종한다.


우리는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한 때 지구 위에서 번창했던 공룡은 운석의 충돌, 그로 인한 먹이의 부족과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멸종했다. 다윈의 “자연선택”에 영향을 받은 허버트 스펜서라는 철학자는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진화의 과정을 사회의 발전에 적용시키기도 했다. 그는 기업간의 자유경쟁을 찬성했고, 적자생존에 반하는 극빈자의 구제 같은 국가의 적극적 사회개입을 반대하는 사회사상가 였다 (스펜서에 관한 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는 다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다). 적자생존이라는 논리에 따르면, 공룡은 지구환경에 훌륭하게 적응한 종이었다. 그러나 공룡은 “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운” 때문에 지구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지구의 역사에는 몇 번의 대멸종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대멸종에 의해 사라지는 생물군은 나쁜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나쁜 운 때문에 멸종한다. 굴드는 진화의 역사에서 운을 강조했다. 그는 대멸종을 제비 뽑기에 비유하곤 했는데 이 시기에는 적응력이나 적합성보다 특정 군집의 구성원, 지역 혹은 분포 범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적응 능력은 대멸종을 예측할 수 없다. 배경멸종이라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다윈론의 자연선택이 작용하여 새로운 진화의 모습을 창조하고 생물과 환경 사이에서 적자를 가려낸다. 이 체제에서는 유전자와 운, 둘 다 일정한 역할을 한다. 아마도 멸종이라는 측면에서는 나쁜 유전자가 나쁜 운보다 더 우세할 것이다. 그러나 대멸종 기간 동안에는 다윈론의 법칙들은 일시에 중지되고, 종은 그들의 적응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살아 남거나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굴드는 이러한 “우연”을 진화의 주된 동력으로 보았다. 이러한 우연의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은 굴드의 인간론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정신분석입문 강의 (1917)’에서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세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꼽은 적이 있다. 그 중 첫번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두 번째는 다윈 혁명으로 인간이 보다 원시적인 생명 형태로부터 진화해 나왔음을 보여 주었으며, 세 번째는 프로이트 자신이 일으킨 혁명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마음(즉,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였다. 굴드는 그의 저서 ‘풀하우스’ 에서 이러한 세 번의 사건에 고생물학분야에서의 “깊은 시간”의 발견을 더하고 있다. 지구의 역사가 45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의 기록이며, 인간이 지구에 나타난 것은 이를 하루로 환산했을 때 채 1분도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는 사실은 위의 세 번의 사건에 이어 인류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 위에서 굴드는 화석기록 속에서 나타나는 5번의 대멸종에 더해, 현재 인류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제6의 멸종을 바라보고 있다. 케냐의 고생물학자이자 “투탕카 원인”의 발견자인 리쳐드 리키는 굴드의 절친한 동료로 알려져 있다. 그는 로져 레윈과 공저한 저서 “제6의 멸종”에서 인류가 등장한 이후 멸종한 거대포유류 및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수준의 멸종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의 멸종이 심각한 이유는 격변에 의한 것이 아닌, 지구상의 단 한 종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생물학자와 동물행동학자, 생태학자들은 환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굴드 역시 인간을 우연히 출현한 존재로 보는 그의 이러한 독특한 인간관과 대멸종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인류가 지구 환경에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우연히 지구 위에 나타났으며, 우리가 지금까지 한 종이 겪어 온 역사를 거스를 능력이 없다면 인류는 길어야 천만년 정도의 수명을 유지하고 사라질 점에 불과한 것이다. 제임스 러브록이 ‘가이아’라고 이름 붙였고,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 교수가 ‘온생명’이라 이름지은 지구 생태계는 인간이 사라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다시 자연선택이라는 일고불변의 원리 속에서 순환할 것이다. 인류는 빙하기와 간빙기의 사이, 지구의 온도가 매우 평화롭게 유지되는 한 시점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시니컬한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더라도, 굴드가 ‘대멸종’과 ‘제6의 멸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류는 조금 더 겸손해져야 한다.

3. 과학자의 위상: 과학은 예술이다


굴드는 미국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던 인물이다. 그의 모습이 ‘심슨가족’의 캐릭터로 등장할 정도로 그는 대중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연예인도 아닌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매스컴을 타기 위해 책을 쓰고, 교수라는 자격으로 얕은 식견을 자랑하는 허울 좋은 지식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실천적인 과학자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그는 “진화”라는 생명과학의 대명제를 타고난 글 솜씨로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한편, 연구에도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매스컴에 나와 얄팍한 지식을 파는 과학자들이나 보아온 우리들에게 그는 과학자의 Role Model 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몇몇 과학자들은 거의 코미디언이 되어가고 있다). 과학은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다. 과학이 세상과 동떨어진 지식의 상아탑으로 칭송 받던 시기는 지나갔다. 과학이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처럼 과학은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학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캐나나 토론토 대학의 과학사학자 홍성욱 교수의 글들을 참고할 것). 인문학의 성과와는 달리 과학적 성과는 우리에게 피부로 다가오는 가까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인간복제 문제로 언론이 연일 뜨거운데도 불구하고 이에 관해 제대로 답해 줄 과학자가 없는 우리의 현실은 위대한 과학사상가 였던 굴드를 대할 때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이젠 우리에게도 과학적 성과와 더불어 사회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존경 받는 과학자가 필요하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타 학문에 대한 폭 넓은 관심, 그러면서도 가벼움을 잃지 않았던 과학자. 과학이 사회에 던지는 문제들에 대해 잘 인식하면서 많은 저술들로 이를 실천한 사상가. ‘복부중피종’ 이라는 암으로 수년간을 투병하면서도 중간값 생존율 8개월이라는 자신의 현실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해 스스로 위안을 찾고, 그러면서도 과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그의 60여년의 삶은 이 시대 과학자가 되기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굴드의 말로 처음을 시작했듯이 그의 말로 끝을 맺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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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아무런 감정 없이 객관적 정보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창조적인 인간 활동이며 과학의 천재는 정보 처리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과학은 예술의 과정이며, 과학자는 매일 도를 닦는 사람들이다. 나는 화이트헤드가 교육의 목적이라고 이야기 했던 AsDeepAsPhilosophyAndAsHighAsArt 라는 말을 다시 굴드에게서 듣게 된다. 과학은 철학과 예술의 가운데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학문이다.

오늘… 당신은 실험실에서 예술가와 같은 열정을 느끼고 있는가?

생명과학과 박사과정 김우재 korean93@pos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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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저서 중 몇 권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가 기고했던 칼럼을 모아 하나의 주제로 역은 베스트 셀러 ‘다윈 이후 (Ever Since Darwin)’와 진화에 관한 좋은 입문서인 ‘다의엄지 (The Panda’s Thumb)’, 최근 출판된 ‘하우스 (Full House)’ 를 일독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굴드와 여러 사상가들이 공저한 미래서 ‘새로운 천년에 대한 질문’ 과 인간복제 문제에 대한 도킨스와 굴드의 글을 접할 수 있는 ‘클론 앤 클론’ 이 번역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킴 스티렐니 교수의 책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 (Dawkins VS. Gould)’ 는 그 후에 시간이 날 때 읽는다면 도움이 될 이차서적이다. 조금 더 관심 있는 사람은 야후닷컴에서 Stephen Jay Gould로 검색을 해보면 된다. 검색 후 놀라지 마시길… (웹사이트만 14개에 웹 문서가 82300장이다. 네이버닷컴에서 이나영으로 검색을 해도 불과 4345장의 웹 문서뿐이다). 인터넷으로 스포츠 신문이나 뒤적이며 남는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과학분야의 사상가들이 남긴 글의 발자취를 한번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

'우연'이라는 것,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적용되어서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국가나 자본주의등의 운명적인 개념에서 벗어나게 해주죠. 괜히 언어의 귄위(물론 이런 말들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야 있겠지만서두..)에 사로잡혀 인간이 어쩌니 국가와 민족의 중흥이 어쩌니 하는 말들을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인양 여겨지게 만들어주죠. 우리가 우연속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좀 더 인류는 능동적으로 살게 될까요? 암튼 인상적인 글이예요. 우재씨는 글잘쓰는과학자 그리고 무게 속에서 가벼울 수 있는(ㅋㅋ 전경씨 같은 사람 어디 없나?) 과학자가 될 것 같네요..^^ --그놈

StephenJayGould가 출연한 심슨가족 에피소드 "Lisa the Skeptic"(Season 9 Episode 8, 5F05)을 봤습니다. 학교 단위로 가게 된 archaeologic trip에서 Lisa는 "날개 달린 사람"의 화석을 발굴하게 됩니다. 모두들 그것을 "천사"라고 생각하지만 Skeptic인 Lisa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Lisa의 말을 부정하자 Lisa는 StephenJayGould에게 검사를 의뢰합니다... 프로그램 내내 Gould 박사는 과학자 이상의 역할은 맡지 않지만,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심슨가족 특유의 유머로 풀어낸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이 에피소드의 대본, 패러디한 영화의 목록과 옥의 티 등을 [http]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PuzzletChung

제 생각엔, 인류가 진화를 통한 발전의 정점에 있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환경이 자연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인간 중심적인 생각, 또는 지구중심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혹성들을 보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메탄가스로 이루어진 혹성들도 많죠. 나 자신이 인간인 이상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눈 역시 인간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가장 겸손해야 할 점은, 아직 이 넓은 우주에 대해, 또는 다채로운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는 부분보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명심해야 할 점은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고, 우리가 행한 대로 얻는다는 것이라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멸종하는 많은 종들이 어떤 결과를 미치게 될지,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것의 결과를 우리가 겪게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죠. 만약 우리의 과학이 좀 더 발전여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하여 좀 더 나은 결과를 낫는 방향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을테지만... --Infinite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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