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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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의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뒤에 편집할 때 이름인 metaphysica, 즉 "자연학" 뒤에(ta meta ta physica) 편집해놓은 책의 명칭에서 유래. 전통적으로는 서양철학에서 존재에 관한 물음들이 이 형이상학(metaphysics)의 영역에 해당되었다(이 분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명칭은 "제1철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일체의 궁극적 기초와 근거를 묻는 철학"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metaphysics의 번역어인 "형이상학"은 주역 계사전에서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고 하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고 한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칸트가 정의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개념은 "경험을 넘어선, 즉 경험적 학문으로는 해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이라는 의미인데, 여전히 일반적인 문맥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대체로 "존재론(ontology)"에 해당하는 문제들을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학파나 학자들마다 상당히 다른 종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영미 분석철학에서 형이상학이란 "가장 일반적인 명제들과 개념들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의미로 쓰인다. 말하자면 수학적 대상과 물리적 대상의 차이(See Also 이상적인직선), 인과(causation) 개념의 분석, 심신문제(mind-body problem), 타인의 마음(other minds)의 문제, 사건(event)의 존재론적 의미 등이 분석철학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철학적 문제들이다. 이런 분석철학 계통의 교과서들을 읽은 사람은 "현존재(인간)의 해석학"이 바로 존재론의 핵심이라고 파악하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어려우며 또한 분석철학의 논리적 분석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성/현실성/잠재성 등의 개념을 다루는 들뢰즈의 책 또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철학적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이 개념의 구체적인 의미는 "맥락의존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에 대한 단상

하루키의 소설, "양을 찾는(또는 둘러싼) 모험"을 보면, '나'가 도너츠를 가지고 이런 식의 얘기를 한다.(카더라통신) "도너츠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던지, 존재로 받아들이던지, 도너츠를 먹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놀랍게도, 이 문장을 읽은 뒤, 더이상의 형이상학적 사유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난 골수 생활인이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는 쪽은 현실 속으로 내려와서는 삶의 여러 부분들에 대한 혼돈에 휩싸일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 역시 형이상학적 사유를 추구하다, "땅"으로 내려와 생활을 논한 학이기 때문에 더 유효성과 생명력이 강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 사상의 개념이 보다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보다 대중화된 언어로의 치환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 사상의 진의가 이해 가능한 것이 되지 못할 때, 그것은 방안 구석의 패물이나. 집 안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골동품, 이해가 잘 되지 않고 접근 불가능한 지역의 난해한 사투리나 방언이 될 뿐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나란 인간의 개인적 판단일 뿐이다. 이해가 손바닥 뒤집듯이 잘 되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러지 말고 좀 쉬운 말로 알려달라고 하는 의도는 이 글 속에 없다. 사상의 생명력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두 학자가 자신들의 가정에 따른 추론의 결과를 갖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학자가 말한 내용은 굉장히, 우수한 논증과 완벽한 사유의 궤적을 밟고 있었다. 거의 압도되다시피한 상대편 학자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경험'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학자는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 경험이 잘못된 겁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 역시 나름대로 시사하는 면이 한가지 있다. -- Roman

형이상학의 "비상의 즐거움"을 뒤쫓다가 철학자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 우물에 굴러 떨어진 탈레스의 일화가 일찍이 경고의 메세지를 담고 있었지요. 굳이 형이상학을 변호하자면(^^;), 형이상학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문제 그 자체를 위한 문제"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탐구/지식이나 우리의 일반적인 가치판단에 대한 반성과 개입일 때인 것 같습니다. 경험과 지식이 총체적일 것을 요구하는 게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이라고 한다면, 어쨌거나 그런 것들을 위한 노력은 불가피한 것일테니까요. 저로서는 Roman님의 말씀을 그러한 "총체적인 균형감각"을 잃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최근 가라타니고진이 "윤리 21"에서 책임의 형이상학적 본성에 대해서 상당히 길고 설득력있게 논의를 하는 것을 보면서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들이 현실과 어떻게 얽혀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스모크 어디에선가 논의되었던 탁석산의 한국의정체성한국의주체성 역시 철학적 개념들을 이용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저 역시 (같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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