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시스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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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시스Gnosis


그노시스라는 말은 희랍어로 <지식>이라는 뜻이다. 그노시스 학파는 초대교회의 한 종파를 가리키며, 이 종파는 신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강조함으로써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는 신이 창조하지도 않았고,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다.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존재들은 신으로부터 나왔지만 신에 대해 모르고, 인간들로 하여금 신에 대해 아는 것을 방해하는 하급신(아콘Archon)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 하급신들 중 최고의 위치에 있는 존재는 <조물주Demiurge>이다. 세계는 바로 이러한 아콘들에 의해 둘러싸여 인간이 신에 귀의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노시스 학파에 따르면 아콘들의 수장인 조물주가 만든 최초의 인간은 <빨간인간>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어원을 찾아가보면 <아담>이란 <인간과 빨강>이라는 이중적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노시스 학파에 따르면 최초의 이 <빨간 인간>은 영혼이 없는 존재이다. 그가 영혼을 갖기 위해서는 그가 영혼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일종의 제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그노시스 학파의 창조관은 히브리의 <카발라(신에 대한 직접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유대의 종파>에서 유래한 것이다.

* 출처: 황병하가 옮기고 민음사에서 펴낸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형의폐허들 역자주
연대를 따지면 그노시즘이 카발라에 영향받은 것이 아니라 카발라가 그노시즘에 영향받은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김용옥은 <절차탁마대기만성>에서 '영지주의란 새로 생겨난 초대 기독교인들, 즉 예수라는 어떤 생소한 메시아를 신봉하는 소수집단보다 훨씬 광범위한 민속신앙형태로서 당시 지중해 연안의 종교의식에 뿌리를 갖고 있는 모종의 엉성한 조직을 가진 집단이었다.'라고 말합니다.


RenamePage 그노시스학파보다는 그노시스파, 영지주의파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종교집단의 일파이니 말이니까요.
그노시스주의 그노시즘 영지주의 로 바꾸는것도 좋겠습니다.

그노시즘에 관한 책



영지주의('성서비평사전' 정태현 편역. 성서와함께. 1996. "영지, 영지주의적, 영지주의"항목.)

"영지의 성격과 기원 및 용어들은 학자들간에 아직도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지주의가 2세기경 그리스도교에서 자라난 이단인가, 아니면 원래 이집트에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교의 경쟁 대상으로 등장한 고대 종교의 재부흥인가 하는 점이다.
일치된 견해는 2세기경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이비 '지식'(1디모데 6,20)이라는 말로 알려진 이단이 나타났고, 이 이단을 오늘날 학자들은 '영지주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 이단의 성격은 그것을 반대하는 저자들, 예를들어 이레네요, 히폴리투스, 오리게네스 등의 글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1945-1946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50여가지 문서로 인해서 영지주의의 성격을 좀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작업들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 문서들 가운데 보다 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어떤 문서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거나 비그리스도교적 기원을 제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떤 학자들은 영지라는 말을 널리 만연되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그리스도교 이전의 일반적 종교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영지를 그런 식으로 정의할 때, '영지주의'라는 말은 '그리스도교화된 영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정이는 나그함마디 사본을 더 연구하기 전에 내린 속단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학자들은 유다교의 분파에 기인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면 이 정도의 이해를 바탕으로 영지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 철학이나 신학, 또는 신비주의 등 어떤 한 가지 용어로 이 말을 묶을 수는 없다. 영지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주요 요소로 구성된 '종교적 현상들의 집합'으로 묘사되어 왔다.
1.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한 참 하느님은 조물주의 작품인 가시적 창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이 창조물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어떤 영지주의적 체계들은 조물주를 구약성서의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2. 각 사람의 참 '자아', 곧 영지주의적 존재들의 '나'는 '신적인 것의 불꽃'이며 필연적으로 불멸의 존재이지만, 이 세상세력으로 인해서 '타락되어' 신체성 안에 갇히게 된다. 이는 진흙 속에 묻힌 금과 같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3. 신적인 '부르심'만이 한 인간을 물질적 마비로부터 일으켜 세울 수 있는데, 이 때 그 부르심은 인간에게 참자아와 초월적 영역에 자리한 자기본향과 참 하느님에 대한 '영지'를 준다.
4. 자아로의 이 회귀는 개인의 경우 삶의 마지막에 영혼이 여러 영역을 통과하면서 일어나고, 우주의 경우에는 물질성이 원래의 혼돈이나 무감각으로 퇴보해 들어가는 세상 끝날에 일어난다. 악한 영혼들과 이 세상의 세력은 이 회귀를 방해한다.
위의 공통된 요소들과는 달리 단일한 영지주의적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체계들의 기우너이 될 수 있는 단일한 기초나 문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적인 부르심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체계들은 수없이 많다. 그리스도교화된 영지 안에서 볼 때, 이 부르심은 신적인 세계에서 내려 오시어 영지를 나누어 주시고 다시 천상세계로 올라가신 구세주에게서 온다. 영지주의적 체계들은 흔히 그것들의 창시자나 주요 교사, 예를 들면 마르치온, 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서 명칭이 붙여지고 내용이 알려진다. 그러나 교부들이 언급한 것 중에는 오피데스, 카이니테스, 나아쎄네스, 페라태, 세티안스 등 그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체계들도 포함되어 있다.
성서 해석가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신약성서 안에서, 그리고 신약성서가 씌어진 종교적 분위기 안에서 영지의 성격과 역할이 무엇이냐에 관한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영지는 분명히 초기적이고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1세기의 유다교와 사해 두루마리와 필로의 저서 안에 드러나 있다. 요한 복음과 요한의 첫째 편지와 같은 그리스도교적 문헌들은 2세기의 영지주의에 필수적인 몇몇 개념들과 매우 유사한 요소들을 보여준다. 천상영역으로부터 내려왔다가 거기로 다시 올라가는 구세주(요한 1,18; 3,13; 6,33; 12,23 등), 미지의 하느님께 대한 진리의 계시(요한 1,18; 3,31-36; 14,8-11 등),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의 분리(요한 1,12-13; 8,23. 44; 17,16), 육과 영(요한 3,6; 6,63), 위와 아래의 이원론 등등.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로는 고린토에서 부활의 미래성과 '몸의' 부활(1고린 15장)을 변호해야 했기 때문에 영지를 거슬러 투쟁했다. 골로사이에서는 지상의 모든 영적 능력들이 창조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골로 2장). 바울로계 서간집으로 알려진 사목서간들이 씌어질 당시에, 영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애써 피해야 하는(1디모 4,1-16; 6,3-5; 2디모 2,14이하; 4,1-5; 디도3,9) 경쟁자가 되어 있었다(1디모 6,20)."

H. 콘첼만, '신약성서신학', 박두환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1, pp. 38-39.)
"영지주의 기원을 밝혀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기원후 2세기에서 4세기까지의 자료들은 그리스도교의 영지주의와 함께 비그리스도교적인 영지주의가 있었음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이 현상은 그리스도교 이전으로 소급된다. 영지주의는 성서의 진술들(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 그리고 후에는 신약성서까지)을 이란과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의 관념과 결합시킨다. 종교와 철학적 구성물들은 존재 이해를 위한 포괄적이고도 중요한 독자적인 산물들이다.
영지주의는 세계와 존재의 심연으로 몰입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리스 철학 사상과 결합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는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 계시를 통해서 인식을 얻는다. 영지주의는 헬레니즘적 이원론을 수용하여 그것을 극복하면서 더 첨예화시켰다. 이 세계는 단순히 광명을 동경하게 되는 암흑의 자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악마적 권세이다. 참다운 나는 우주 안에 유폐되어 있으며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헤매고 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별들의 행로가 세계의 조화로운 법칙을 위한 증거로 간주된다면 영지주의에 있어서 별들은 악마적인 파수꾼들이다. 그들은 광명에로 상승하려는 자아를 우주 안에, 낯선 세계에 가든다. 영지주의 이전의 이원론은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즉 육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혼이 육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점에 있어서 영지주의는 진일보하였다! 혼도 역시 세상적 존재다. 피안에서 온 참된 자아는 육과 혼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면 육과 혼의 피안에 있는 이 자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통달에 의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는 내적인 상승을 통해서 신적이며 근원적인 빛의 일부, 즉 참 빛을 자기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 신화에 따르면 타락과 망각, 사자의 파견과 부름, 각성과 개명을 통해서 구원이 주어진다. 영지주의적 구원 이해는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의 글에 요약되어 있다. 다음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누구였으며 무엇이 되었는가? 우리는 과거에 어디에 있었으며 어디로 던져졌는가? 우리는 어디로 달려가고, 어디로부터 구원받는가?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다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R. Bultmann, '신약성서신학', 허혁 역, 성광문화사, 1991, p. 166.)
"... 우리에게는 영지주의 동동체들-특히 최초의 것들-에 관한 사료가 없다. 영지주의 운동은 여하간 요단강 지역에서 여로 종류의 세례 종파들로 구현되었고 유대교 단체들도 그들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그것은 분명히 근동 아세아 지역에서 적지 않은 지역 제의들을 받아들여-밀의 종교 공동첻르의 형식으로-그것들과 혼합주의의 과정에서 융화되었다. 가령 그 속죄자가 프리기야지방 밀의종교인 신인 아티스와 동일시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 운동은 그릿스도교 공동체에도 침투되었다. 또 영지주의 공동체들도 그리스도교의 주제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활동은 제사 공동체의 범위를 넘어섰었다. 그 사상들은 신플라톤주의에 이르는 헬레니즘 종교철학의 사변에도 작용했고 유대교 종교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게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주었다."

최근 어쩌다보니까 토마의 복음서를 보게 됐는데. 뭐랄까 종래의 성서보다는 직관을 강조한다던가
은유를 사용하는 느낌이었고. 범신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나 불경이 생각나는 구절이 좀 보였음.
그런데 토마 복음서가 그노시스와 관계가 있다고 들었는데 자세히 아시는분 없으신가요? -_-; --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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