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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 / 김경현(고려대 사학과)
<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 / 김경현(고려대 사학과)
1. 왜 '로마 이야기'인가 ¶
재작년 말쯤인가 로마인이야기는 그야말로 돌풍처럼 우리 독서계를 엄습해왔다. 요즘에는 그 기세가 한풀 꺾인 듯하지만, 아무튼 일년 남짓 인문계의 베스트셀러 대열을 떠나지 않을 만큼 그 책의 위력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도하 신문들과 잡지들이 앞다투어 서평을 싣고, 내 주변의 대학인들 사이에서도 그 책이 심심찮게 화제거리가 되곤 하여, 그 열기를 실감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 책의 성공담을 들으면서 나는 로마사를 다룬 또다른 책의 사뭇 대조적인 처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것은 교원문고에서 1993년부터 번역 출간하기 시작했던 대하 역사소설 로마의 일인자에 얽힌 얘기이다. 전체 6부 연작 형태로 기획된 영어 원작은 지금도 집필중이라는데, 교원문고는 불과 2년 사이에 2부 8권을 번역 출간하는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독자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든지 그 뒤로 속간이 중단되고 말았다. 작가는 가시나무새라는 작품으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는 콜린 맥컬로우였는데, 그 명성도 한국 독자들에게 로마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역부족이었던가 보다. 로마사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볼 때 로마의 일인자가 한국에서 실패한 원인은 적어도 작품 자체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작가는 그 작품을 쓰기 위해 13년 동안이나 로마사 관련사료와 연구서를 읽고 준비했다고 하며, 실로 인물, 사건, 제도 그리고 일상생활의 지엽 말단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식은 대단히 정확하고 해박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 사실들을 마치 연극무대의 소품들처럼 여기저기에 알맞게 배치하여 소설 형식으로 엮어낸 치밀한 구성력은 실로 감탄스러웠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확인한 사실이지만, 콜린 맥컬로우와 시오노 나나미는 몇 가지 우연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거의 동년배의 두 여성 작가가 로마사의 대중화를 여생의 과제로 삼아 긴 준비 끝에 비슷한 시기에 책을 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성공과 실패로 명암이 갈렸지만, 나는 아직도 로마의 일인자 집필에 혼신을 다할 콜린 맥컬로우에게, 로마사에 대한 식견이나 문학성에서는 그대가 더 돋보인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2. 왜 시오노 나나미인가 ¶
그렇다면 로마인이야기의 성공 비결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지극히 자명하고 단순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요컨대 작품과 독자 사이에 궁합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책은 우리 독서계의 조건이나 욕구에 부응하는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인데, 실패한 맥컬로우의 책과 비교해보면 그 특성들이 한결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글의 형식에서 다른 점이 주목된다. 맥컬로우의 책이 소설 형식임은 이미 말했지만, 로마인 이야기는 통사류에 가까운 서술 형식을 취하고 있다. 로마역사가 근본적으로 생경한 것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교양 터전에 비추어 소설은 너무 호흡이 완만하고 고급스러운 형식이었다. 그 생경함을 풀어주려면 우선 로마사의 대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좀더 대중성을 가지려면, 전문 역사가들이 전문 역사가들이 쓴 통사들처럼 진지하고 딱딱해서는 곤란하다.
이 점을 의식하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전문가들의 역사서보다는 쓰기에 더 자유분방하고 읽기에 오락적인, 그러면서도 소설보다 더 많은 역사지식을 줄 수 있는 책을 구상했다. 그 결과 로마인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통사적 줄거리를 따르되 혹은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을, 혹은 작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담은 논평을 간간이 삽입하는 형식을 취했다. 작가의 그런 구상은 물론 애당초 일본 독자들을 염두해 둔 것이겠지만, 오히려 우리 독서계의 조건에 더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외국의 역사는 고사하고 한국사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그런 오락적 역사를 읽어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에 들어와 오락과 정보를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역사물에 대한 갈증이 꽤 확산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외국 역사에 국한해 말하면 가령 아이들에게 읽혀야 할 책이라면서 어른들도 많이 읽었던 만화책 먼 나라 이웃 나라가 그 한 예였다.
둘째로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호소력이 문제가 된다. 이 점에서 맥컬로우의 책이 소극적이거나 중립적이라면, 시오노 나나미의 책은 대단히 선명하고 강렬한 것이었다. 두 책은 각각 여성과 남성이 쓴 것으로 착각할 만큼 이미 구성과 문체에서부터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전자가 치밀하고 섬세하다면, 후자는 스케일이 크며 문체가 간결하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글에서 남성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로마사에 부과하는 가치들의 공격적인 성격 때문이다.
책의 행간에서 내가 받은 느낌들을 동어반복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각나는 대로 열거하자면, 현실주의, 성공제일주의, 영웅주의, 결과주의, 제국주의, 엘리트주의(민중과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권력지상주의(혹은 반지성주의) 같은 것들이었다(혹 작가가 강조하는 다원주의와 개방성이 언급되지 않은 것을 부당하게 생각할 독자를 위해, 그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다만 그 관념이 나에게는 공허하게 들렸다는 점만을 말해두려 한다). 작가 자신은 책 제목을 로마인 이야기라 붙은 이유에 대해 "어떤 사상도 어떠한 윤리도덕도 심판하지 않고 인간행적을 추적해가고 싶기" 때문이라 말했지만(2권,8쪽), 책의 일부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쉬이 그 말의 공허함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그가 그 선언에 충실했다면, 아마 로마인 이야기의 성공은 아예 없었거나 제한적이었을지 모른다.
일본에서도 다르지 않았다고 짐작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처음 그 책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곳이, 그 공격적 가치들에 공감하는 재계와 정·관계 지도층이었다는 점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주된 이유이다(후주1) 하지만 과정보다는 외형 위주의 실적을, 도덕적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고, 공존보다는 경쟁을 강조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크든 작든 조직의 운명을 오로지 지도력에만 걸고 있는 현실과 그에 순응 방조하는 정신상태, 그것은 단지 일부 엘리트 집단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다. 1990년대 문민시대의 우리 사회가 매우 아노미적이면서도 다소 일관된 가치지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성(內省)적이기보다 외향화되고, 진보적인 듯하면서도 실은 지독히 보수화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세계화니 국가경쟁력 제고니 하는 구호 아래 사회 구석구석에서 추진된 개혁의 바람은 적어도 그것이 사회상층(특히 식자층)의 묵인과 합의 없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재계에서 일어난 로마인 이야기의 불씨가 요원의 불길처럼 그 계층(혹은 고급독자층)속에까지 급속히 번져갈 수 있었던 것 역시 다분히 그런 정신적 풍토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로마인 이야기의 성공 비결에 대한 좀더 공정한 설명을 위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작가적 역량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는 그런 오락적 역사서를 쓰기에 적합한 여러 조건들, 즉 체험과 노력과 재능을 겸비한 작가이다. 한 세대 가까이 이탈리아에 살면서 로마 유적들과 후예들 속에서 역사를 만지고 느끼고 얘기할 수 있었던 현장체험은, 로마사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그의 자산이다. 그가 간혹 어떤 인물, 어떤 사건을 기술하다 잠시 일탈하여 마치 그에 얽힌 장소나 기념물 앞에 서서 시공을 넘나드는 묵상에 잠긴 듯 독백할 때 내 솔직한 느낌은 감탄보다는 차라리 무력감이었다.
책을 쓰기 위한 준비작업 또한 인상적이다. 스스로 여러 차례(1권, 3권, 5권의 말미) 애써 밝히고 있듯이 로마인 이야기를 쓰기 위해 참고한 자료들은 적어도 양적으로는 흔히 전문가들이 쓴 통사류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참고문헌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특히 관련된 기본사료를 두루 섭렵한데 대해 작가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실 작가가 재미있는 글을 의식했던 만큼 사료에 직접 다가선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도,(후주2) 여전히 작가의 자부심은 인정해줄 만한 것이다. 사료 속에서야 웬만큼 그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체험해 본 사람이면 다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무어라 해도 시오노 나나미의 강점은 역시 평이하고 재치 있게 글을 쓰는 재주에 있다. 그는 평이한 문체가 성공의 관건임을 알고 있었고, 그 점에서 카이자르의 간결, 명쾌,단아한 문장은 그 모델이었던 듯 싶다. 문체가 애써 모방하려 한 것이라면 문장에 묘미를 더해주는 재기넘치는 착상들은 거의 본능적이라는 느낌이다. 가령 로마사의 어떤 현상들을 그가 곧잘 현대적 개념으로 대체하여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간혹 느껴지는 경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재치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상당수 독자들이 그런 묘미에 끌렸을 법하다.
3. 아마추어와 전문가 사이 ¶
"확실한 사료의 뒷받침이 없으면 다룰 수 없는 학자나 연구자와는 달리 우리는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는 자유롭게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도 허용된다."(1권 146쪽) 이렇게 작가는 스스로 아마추어임을 자처한다. 작가의 이런 입지 설정은 이해할 만하다. 사실 전문 역사가들의 글은 논증적이고 분석적이며, 특히 다른 견해들에 대한 비평이 필수적이어서 대중이 읽기 어렵고 따분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대중을 의식하며 글을 쓸 때조차 답답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 전거 없는 상상은 물론 개인적인 방담은 금기이다. 그렇게 할 경우 흥미를 끌지는 몰라도 권위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락적인 역사를 쓰려는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자유롭게 추측하고 상상할 권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에는 약간의 아이러니가 있다. 즉 로마인 이야기는 가령 로마의 일인자와 달리 허구보다는 사실(fact) 기술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형식인 까닭에 그는 자신이 쓴 것에 어느 정도 권위[즉 전거(authority)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곳에서 자신이 요청했던 '상상과 추측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상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2권, 442쪽) 뿐만 아니라 그는 소위 전문가들의 글쓰기 수법들을 의식,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방대한 참고문헌을 제시하는가 하면, 때로는 전문가들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것이야말로 전문가들의 속성이라 하겠는데-을 내비치기도 한다. 요컨대 그의 진정한 입지는 전략적이든 아니든, 아마추어와 전문가 사이인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전문가라는 필자가 아마추어임을 자처하는 글에 대해 비평할 명분이 다소 확보된다. 누군가 여전히 이 비평이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여긴다면, 이를 그저 로마사에 대한 좀더 다양한 이해를 돕기 위한 시도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물론 그 책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오류들을 시시콜콜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또 제한된 지면이 허락되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몇 가지 유형화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만 지적하려 한다. 그 문제들은 더러 작가의 전문적 지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종종 일방통행적인 그의 역사적 시각 혹은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하는 것들이다.
우선 제1권에서 꽤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는 그리스사에서는 틀린 이야기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일례로 페르시아 전쟁이 종교적 이유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든가, 혹은 페르시아 왕이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에게 민주정치가 아닌 군주정치를 강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설명은(126쪽), 그가 사료나 연구서를 제대로 읽었는지를 의심케 할 정도이다. 로마사가 주제였으므로 상대적으로 그리스사가 소홀히 취급되었다고 눈감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균형이 너무 심해 혹 그 몰이해가 그리스사 자체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조차 들었다. 그리스인들에 대한 그의 편견은 개방성과 다원주의를 로마인에게서 배울 점이라고 추천한 작가의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순진한 로마인이 닳고닳은 그리스인에 이용당했다."(2권,353쪽)든가, "그리스인이야말로 100명이 모이면 100가지 의견이 나오는 민족"(2권, 354쪽)이라는 표현들이 그러하다(나는 이부분을 읽으면서 조선사를 당쟁의 역사로 폄하했던 식민사관을 연상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분열과 위축을 초래하고, 민주주의는 강국이 되는데 적합치 않은 체재라고 보는(1권, 276쪽) 그는, 그리스인의 정신적 성취는커녕 그 역사조차 제대로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로마인 이야기 전체를 일관하는 지식인에 대한 냉소주의 역시 작가의 바로 그 편견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면 덩치가 큰 역사가 아니어서 매력이 없었던 것일까?
꼭 그런 편견 탓은 아니겠지만 공교롭게도 로마사에서 민중의 투쟁과 민주주의적 절차를 상징하는 호민관직과 민회제도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공화정 초 이래 매년 선출되는 호민관 수가 계속 4명으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그것은 10명이었다) 부분과 호민관직 역임자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는 것 등은 오류이다(1권, 191쪽 ; 3권, 39∼45쪽). 또 호민관을 뽑는 민회(comitia tributa)를 재산에 비례해 더 영향력을 갖게 되는 다른 민회(comitia centuriata)와 혼동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시오노 나나미는 대체로 로마의 이런저런 제도들, 정치적 관행, 정치적으로 중요했던 입법내용들을 해설하는 곳에서 비교적 잦은 실수와 오해를 드러낸다. 가령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기원전 133년)이나, 율리우스 카이자르의 농지법(기원전 59년)을 설명하는 대목들에서는 종종 전혀 근거없는 내용들을 보태고 있다(3권, 37∼39쪽 ; 4권, 181∼185쪽). 그것이 단지 '자유로운 상상'이라는 아마추어의 권리를 실천한 것이 아니라면 역시 일관된 사료들이 없는 대목에서는 작가의 기반이 다소 불안정해지기 때문이 아닐까?(말이 난 김에 하는 말이지만, 로마인 이야기에서 거의 허점이 보이지 않는 곳은 주로 전쟁사를 다루는 부분들이다. 그 경우 이미 일관된 이야기를 갖고 작가를 안심시켜주는 사료들이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인들에 대한 푸대접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로마인에 대한 맹목적인 호감이다. 나의 뇌리에는 로마인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애정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작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거듭 "로마인은 매사를 교본처럼 체계화해 웃음이 나온다"(2권, 101쪽 ; 4권, 224쪽)고 말한 대목이 예사롭게 넘어가지 않았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생활방식, 그것이 왜 웃음을 자아내는가? 작가의 웃음은 사랑스럽다는 뜻의 우회적 표현일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에 대한 애정은 좀처럼 민중에게 호감과 신뢰를 주지 않는 그의 사고방식에도 예외를 허용한다. "로마 평민의 약점은 단결력 부족이 아니라 명예심이 너무 강한데 있었다."(1권, 159쪽)
물론 작가가 로마인에 무한한 애정을 주고 있는데는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우선 로마인은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소위 '클리엔테스(clientes)'라는 상하의 인간관계, 즉 후견자와 피보호자의 신의관계를 그는 매우 성스럽게 바라본다. 그래서 국가에 충성해야 할 로마의 시민군이 마리우스나 카이자르 같은 장군들에게만 충성하게 되는 변화를 단지 군대의 '사병화(私兵化)'로 설명하는 서양 전문가들의 시각에 일침을 가한다(3권, 121쪽). 그 서구의 인텔리들은 인간관계에서 의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리있는 로마인들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자르 수하장교의 정치적 배반조차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정당화해준다(1권, 166∼167쪽 ; 4권, 500∼505쪽).
4. 로마·로마인에 대한 맹목적 애정 ¶
나는 이 두 가지 예들이 강변(强辯)에 불과함을 지적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정객, 군인들의 실제 행태와 '신의관계'의 이상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음을 애써 입증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이런 기묘한 상상을 떨쳐버리고 싶을 뿐이다. 작가가 그토록 복종과 질서를 로마인들의 미덕으로 강조하는데는 혹 거기서 일본인의 정체를 재확인하고픈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또 다른 민족들의 존재와 그 문화를 대등하게 인정하고, 또 그들에 대해 개방적인 로마인의 삶의 방식을 찬양한다. 로마가 작가에게 특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일신교의 교조주의 대신 다원주의적 종교를 갖게 된 것도 바로 그 개방성에 기인한다(1권, 277∼278쪽). 그런데 과연 로마인들이 다른 민족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또 로마인들의 종교적 개방성과 다원주의, 그것은 정말 그렇게 각별한 것이었을까?
일견 로마인들이 다른 민족을 대등하게 대했다는 주장은, 그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굳이 그렇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로마의 전쟁은 가령 한니발 전쟁처럼 "완전한 방위전쟁" 이었거나(2권, 349쪽), 아니면 국제적인 "약속을 매우 중시하는" 로마인이 제3국의 공격을 받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움을 청한 동맹국들을 돕기 위해 부득이 치른 전쟁들이기 때문이다(2권, 351쪽). 그렇게 정당하게 패권국이 되었으니만큼, 작가는 로마의 지배자로서의 선의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은 듯하다. 즉 로마가 패권 아래 들어온 독립국들과 공존공영하는 것, 그것이 곧 '팍스 로마나'의 이념이었다는 것이다(2권, 360∼361쪽). 역시 로마의 전쟁사유(casus belli)들, 그리고 전쟁방식의 공정성 여부를 일일이 따져보는 일은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는 냉혹한 힘의 논리에 매력을 느끼는 작가의 현실주의가 어째서 로마의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도덕주의로 대체되고 있는지 그 점이 오히려 흥미롭다. 여러 가지가 상상되지만 어쨌든 제국주의를 신의보다는 기만으로, 또 선의보다는 피해로 체험한 국가의 시민들의 지혜와 정서로는 매우 공감하기 어려운 역사적 시각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로마인들의 종교의 특성은 또 어떤가? "타 민족의 신들도 배척하지 않았"던(1권, 47쪽) 로마인의 종교적 개방성의 주장은 두 가지 단서를 필요로 한다. 우선 가령 유태-기독교를 제외하면 종교의 개방성과 다원주의는 사실 고대세계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특히 로마 팽창기인 헬레니즘 시대는 다양한 민족과 지역의 종교와 신들이 뒤섞이는 이른바 혼합주의가 대세였다. 물론 로마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다른 종교와 신들을 수용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기원전 186년 주신(酒神) 바쿠스의 신도들을 대대적으로 색출, 처벌한 사례를 위시하여 공화정기에만 대여섯 차례의 박해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 종교들이 국기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고, 제정시대에는 기독교 역시 같은 이유에서 박해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종교에서든 정치에서든, 강자의 개방 논리에는 함정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모르는가, 아니면 약자를 외면하는 까닭에 개의치 않는 것일까?
5. 시오노 나나미와 마키아벨리 ¶
각론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이제 총론적인 얘기로 글을 마감해보자. 즉 로마사의 큰 흐름에 대한 작가의 시각, 곧 역사관을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도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을 좀더 입체화하기 위해 로마사에 대한 다른 책과 비교하는 수법을 쓰려 한다. 내가 비교상대로 삼으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정략론이다. 수없이 많은 로마사 책들 중에 굳이 그것을 고른데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정략론은 비록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통사적 이야기책은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한 시기의 로마사를 취급하고 있다.(후주3)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정략론을 넘어선데 있다. 즉 마키아벨 리가 시오노 나나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로마인 이야기에 드러나 있는 작가의 가치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며, 그것들이 대체로 마키아벨리즘에 흡사하다는 느낌을 갖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각별한 의미'가 다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인간 마키아벨리는 제대로 모르는 채 화석화된 그의 관념들만을 좇는 마키아벨리스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는 수십년을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마키아벨리의 삶의 역정과 사상의 궤적을 샅샅이 뒤져 그야말로 발로 밟고 정신으로 더듬어본, 바꿔 말해 스스로 대상 속에 뛰어들어 그 삶을 다시 체험해본(relive), 근본적인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그렇게 뼛속까지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정략론을 십분 참조했음은 물론이다. 정략론에 담긴 총 142개의 명제들은 로마체제의 장점들 혹은 로마사에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 교훈들로 그 적지 않은 부분이 로마인 이야기에서 특히 작가의 논평을 쓰는데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굳이 두 책의 비교를 제안한 것은 그 일치점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로마사의 주요한 대목들에서 두 책이 보이는 의미있는 시각의 차이들에 주목하며, 그 이유를 음미해보고 싶은 것이다.
6. 로마를 보는 시각의 차이 ¶
첫째로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한 요인으로서, 그 정체체제 즉 공화정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곧 왕정이 타도된 5세기 초부터 수 세기 동안 지속된 귀족과 평민 사이의 오랜 사회투쟁의 과정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군주론에서와 달리 정략론에서 마키아벨리의 모델은 주권이 시민에게 있는, 즉 시민적 자유의 공화정체제이며, 사실 그것은 그 무렵 그의 조국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이 공유하던 정치적 견해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체제의 국가가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즉 단지 국가를 평화롭게 지키려는 선택과 전쟁에 의해 강성해지려는 대안이 그것이다. 어떤 쪽을 택하는가에 따라 주권의 향배도 결정된다. 전자를 선택하면 귀족이 주권을 독점했던 베네치아의 과두적 공화국이 그 모델이 된다. 그러나 후자를 원하면 고대 로마처럼 귀족은 평민에게 주권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귀족이 정치적 자유를 원하는 평민과 부단히 투쟁하는 공화정체제가 불가피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로마가 내분의 원인이 되는 것을 버리려고 했다면 동시에 대국으로 될 수 있는 성장력도 잃게 되어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인민의 자유투쟁을 승인하는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귀족은 자유를 파괴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반해 평민은 자유를 손에 넣음으로써 자기를 지킬 수 있으므로 평민이 자유의 감시라는 점에 주의력을 집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로마의 성장에 관련하여 마키아벨리는 귀족의 지도력보다 인민의 덕목을 더 중시하고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후주4)
한편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은 어떻게 다른가? 그 역시 로마의 융성은 체제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3권, 79쪽). 게다가 로마의 공화정 체제가 베네치아의 그것보다 인민에 대해 덜 배타적이었음을 비교하는 부분을 보면(1권, 208∼210쪽), 일견 그의 생각은 아주 마키아벨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신분투쟁과정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뉘앙스의 문제인 듯하면서 실은 중대해 보이는 차이가 포착된다. 그는 자유보다는 질서를, 내분보다는 화합을, 인민의 덕보다는 귀족들의 덕목 즉 '노블레스 오브리주(nobless oblige)'에 더 힘을 싣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자유를 위한 갈등과 인민의 힘보다는 질서와 지도력이 로마 강성의 원동력이라 보는 것이다.
몇 가지 구절들만으로도 족히 그런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로마인들은) 참으로 로마적인 방식으로 모두 함께 공동으로 화합함으로써(공익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1권, 196쪽)라는 시오노 나나미의 이 목적론적 역사인식은, 간혹 로마의 신분투쟁이 마치 미리 설정된 코스로 전개된 듯 설명되는 곳에서 잘 드러난다. 가령 평민들의 압력에 밀려 성문법을 만들어야 했을 때 그리스를 견학한 로마의 사절들이 이미 아테네식 민주정도 스파르타식 과두정도 로마의 길이 아님을 통찰했다고 상상하는 대목과,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쇠퇴를 타산지석 삼아 평민과 귀족이 서로 투쟁 강도에 한계를 두고 있었던 듯 설명한 대목들이 그렇다(1권, 146쪽, 189쪽 : 5권, 281쪽). 요컨대 질서와 화합, 그것은 오랜 투쟁 속에서 숱한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지점이 아니라 투쟁의 틀이요 신성한 전제였던 것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그 화합의 정신을 견인해낸 공을 귀족들에게 돌린다. "귀족들이 자기네 권리에 안주하여 평민들한테만 희생을 강요하고 자기들은 희생을 치르기를 회피했다면, 평민의 불만도 대의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로마귀족들은 '노블레스 오브리주'의 표본 같았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평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1권, 15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에 부과한 그 화합의 정신에 스스로 너무 강박된 것일까, 불과 몇 쪽 뒤에 로마 평민에 대한 정반대의 최종 평결을 내리고 있다. "로마 평민의 약점은 단결력 부족이 아니라 명예심이 너무 강한데 있었다. 적이 국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만도 잊어버리고 병역에 지원했다."(1권, 159쪽)
둘째로, 공화정의 후기사, 특히 카이자르의 등장을 바라보는 시각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역사인식에는 비극적 필연성처럼 느껴지는 성자필쇠의 냉엄한 논리가 깔려 있었다. 로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공화정 로마사의 운명은 오히려 그 논리의 전형이었다. 공화국은 인민의 자유를 동력으로 강대국이 될 수 있지만, 그 대신 공화국은 타락하고 마침내 인민은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즉 공화국이 소멸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왜 공화국은 타락하는가? 그것은 로마의 적들이 무력화되어 천하태평을 구가하게 된 결과, 자유의 감시자로서 인민이 방심하게 되고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누가 인민을 현혹하는가? "부와 권세를 자랑하는 인물들", 좀더 구체적으로는 마리우스나 카이자르처럼 평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유를 찬탈한 군인들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부르터스의…가혹함도 로마 인민을 분기시켜 자유를 지키게 할 수 없었다.…마리우스의 평민당 수령이 된 카이자르가 교묘하게 인민의 눈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목에 칼을 쓰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카이자르가 획책했던 군사독재,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는 이미 자명해졌다. 그것은 몸집이 커진 로마가 갈아입어야 할 새 옷이 아니라 공화국 로마의 수의(壽衣)였다. 왜냐하면 자유가 사라진 로마에서 더 이상 위대함도 융성의 전망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시오노 나나미의 생각은 어떤가? 일단 공화정 위기의 원인에 관련하여 그의 시각은 마키아벨리와 흡사하다. 즉 비슷한 성자필쇠의 논리가 엿보인다. "성공했기 때문에 치루어야 하는대가"라든가 "로마의 패권은 지중해 전역을 뒤덮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로마 고유의 공화정체제를 지켜내기 어려운 상태…" 같은 짧은 문귀들 속에 그런 취지가 농축되어 있다.(2권, 432쪽 ; 3권, 223쪽 ; 5권, 282쪽). 그러나 비슷해보이면서도 역시 마키아벨리의 논리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타락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그는 역시 지도력의 쇠퇴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원로원은 폐쇄적으로 됨으로써 그 지도력을 의심받게 되었거니와, 그렇지 않아도 어쨌든 제국의 관리자로서는 부적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낡은 체제와 지도력은 새것으로 교체되어야 했고, 공화정 후기는 바로 그 신체제를 낳는 진통의 과정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자르를 시대적 과제를 통찰하고 스스로 새로운 지도력을 구현했던 외로운 천재로 묘사한다.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의 대부분에 대한 희화화(喜畵化)는 카이자르의 고독한 천재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이런 대비수법은 19세기 독일의 로마사가 몸젠의 카이자르 찬미론을 모방한 듯하지만,(후주5) 그의 영웅 찬가는 그 경지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그에게 카이자르는 정치가, 군인, 문필가로서뿐 아니라 심지어 (숱한 여자들을 상대하면서도 그들에게 한을 품게 하지 않을 만큼) 남성으로서도 완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오노 나나미의 이런 영웅 만들기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매우 자명하다. 카이자르는 로마의 위대함의 종말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령인 것이다. 카이자르가 구현한 새로운 지도력, 즉 전제군주정이 곧 인민의 자유의 소멸이라는 상실감은 그의 글의 어느 행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위대함의 증거는 그런 헛된 관념이 아니라 제국이라는 현실에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다소 희망찬 문장으로 5권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모두 30대 전반인 이 세 사람즉 아우구스투스와 그 측근 인물 두 명을 가리킴이 '팍스 로마나'를 쌓아올리게 된다. 신생로마제국의 출발에 어울리는 젊은 힘의 결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키아벨리스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인식이 이렇듯 일관되게 마키아벨리의 그것과 다른 것일까? 반복되는 얘기이지만, 그것은 그가 로마사 속에서 일본사를 읽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과 그를 위한 투쟁보다는, 집단과 지도력에의 순응을 제1의 덕목으로 삼아 군사대국, 경제대국의 길을 모색해온 일본의 선택을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정당화하려던 것이 아닐까?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되는 로마제정사를 위해 그는 10권을 더 쓸 예정이란다. 그 계획의 완수를 축원하면서도, 내 흉중의 한편에는 이런 야릇한 호기심이 일고 있다. 그토록 카이자르를 찬미했던 몸젠은 종내 로마 제정사를 쓰지 못한 채 로마사를 끝맺고 말았다는데, 로마인 이야기는 어찌 될까? 몸젠의 경우 그 미완성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런 추측이 유력하다. 즉 카이자르주의가 시대적 요청이라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결국 몸젠은 로마 제정이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공화정기보다 더 복되고 영광스러웠던 증거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시오노 나나미도 혹 그런 딜레마에 부딪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점이 자못 궁금하다.
(1) 몇 개 신문기사를 발췌해 읽는 것으로 그 근거는 충분하다. "재계와 정부부처에 '로마학습'이 한창이다. 유수한 경영인은 물론 고위 공무원까지 나서 로마를 배우느라 삼복더위도 잊고 있다"(한국일보 1996년 8월 12일자). "삼성물산 전략경영팀은 최근 시오노 나나미의 베스트셀러 로마인이야기에서 6가지 세계정복 비결을 뽑아내 임직원들의 경영활동에 적극 응용하고 있다"(동아일보 1996년 10월 23일자. 고딕은 필자). "매일경제신문사와 이코노미스트 클럽이 공동주최하고 도서출판 한길사가 후원한 뉴밀레니엄 기획포럼 천년제국 로마로부터 배운다가 28일 저녁 하이야트 호텔 그랜드 불룸에서 개최됐다"(매일경제신문 1996년 10월 30일자)
(2) 기본 사료가 로마인 이야기를 쓰는데 얼마나 불가결한 것이었는가는 가령 4권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자르의 갈리아 원정을 기술한 부분(212∼466쪽)을, 직접 카이자르가 쓴 갈리아 전기(국역, 범우사)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카이자르의 글을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작가 자신의 문체로 비교해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카이자르의 글을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작가 자신의 문체로 각색했다는 느낌을 준다. 대체로 전 5권 가운데 두툼하게 쓰여진 2,4,5권은 그처럼 작가가 주로 기댈 수 있는 일관된 사료들이 남아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3) 정략론의 원제목은 리비우스 로마사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고이다. 따라서 제목만 보면 , 정략론은 기원전 293년까지의 로마사만을 취급하고 있다고 하겠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명제들의 근거를 주로 그 10권에서 찾겠다는 뜻일 뿐, 실은 제정기의 인물들과 사건들까지 거론된다. 아무튼 정략론에는 대체로 로마공화정 시대의 전체적 흐름에 대한 그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고 보아도 좋다.
(4) 정략론 1권 5항, 위의 책, 180쪽 참조. 아울러 1권 3항과 58항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들도 주목할 만하다. "자유인이 자유획득을 위한 운동에 궐기한다 해도 이것이 사회의 상태에 해를 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음대로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군주와 인민의 경우를 상정해보면 아무래도 군주보다 인민 쪽에 실패할 위험률이 적을 것 같다."(같은책, 179,340쪽)요컨대 마키아벨리는 군주, 귀족보다는 인민의 자유를 더 신뢰한 셈인데, 바로 이 '대중의 발견'에 그의 사상의 근대성이 놓여 있는 것이리라(강정인 편역, 마키아벨리의 이해에 실린 S. Wolin의 글, 특히 209∼219쪽을 참조).
(5)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자르 부분을 집필하면서 주로 프랑스의 까르꼬삐노가 쓴 카이자르 전기 율리우스 카이자르에 의존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이 구체적 사실들의 해설을 위해 참조했다면, 전체적 논조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카이자르 찬미론을 담은 몸젠의 로마사 마지막 권이 참조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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