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쓰는 필기구들과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내 방 책상의 제일 윗 서랍에는 학부 다닐 때 쓰던 삐삐가 아직 남아 있다. 학교에 공부할 자리가 생긴 후로 집에선 놀기만 하는 터라 책상을 쓸 일이 거의 없지만, 가끔 할 일이 없거나 공부할 게 아주 많아 밤 늦게 방 책상에 앉게 되면 삐삐가 들어 있는 그 서랍을 열어보게 된다. 삐삐는 이제 오랬동안 건전지도 끼워지지 않은 채 버려져, 낡은 추억의 냄새만을 풍기고 있는 듯 하다. 한 때 바쁘게 제 몸의 전기 회로를 돌려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던 화려했던 시절을 삐삐는 기억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유효 기간을 다 한 전자 제품을 보는 일은 퇴락한 古家나 말라 비틀어진 장미꽃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군대에 들어 가기 전에, 말하자면 마지막 여행으로 친구와 함께 동해에 간 적이 있다. 대포항에서 회를 안주로 술을 마신 다음 날 찾아간 五色에서, 나는 겨울 계곡의 맑은 물 밑에 빛갈 고운 단풍잎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물은 쉼없이 흘러가도 지난 계절의 추억은 거기 그 자리에 조용히 남는다. 돌아보면, 그들은 예전의 아름다웠던 그 빛갈 그대로 거기에 있다.
제대하고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울릉도에 놀러 갔었다. 울릉도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울릉도에서가 아니라 울릉도 바깥의 작은 섬에서 울릉도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내가 넓은 바다 한 가운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쪽빛으로 출렁이는 바다의 깊이를 두렵게 지각했다. 약초 농사를 짓는 단 한 가구가 사는, 걸어서 섬 둘레를 다 도는데 10분도 채 안 걸리는 작은 섬에서 울릉도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 섬 사이 바다에 집에 두고 온 삐삐를 던져 넣는 상상을 했었다. 삐삐는 그 바다 밑 바닥 어느 돌 틈인가에 고즈넉이 잠겨, 제게로 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더 먼 바다 어딘가로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 그 바다 깊은 곳에 가끔 따뜻한 햇살이 닿는다면 삐삐는 그 빛 속에서 조그맣게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내가 죽기 전에 가 볼 가장 아름다운 바다에 나의 삐삐를 던져 넣는 꿈을 꾸곤 한다. 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그 곳에서 나의 삐삐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지금도 바스락거리는 삐삐의 낮은 속삭임을 위해. --Khakii
울릉도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울릉도에서가 아니라 울릉도 바깥의 작은 섬에서 울릉도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이 문장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만치 서서 관조하는 모습. 바닷속에 가라앉은 삐삐에 대한 상상은 한편의 안데르센 동화같습니다.
삐삐는 작고 간단하고 튼튼!!하다. 예전에 세탁기에 넣고 빨아서 분해가 된 적이 있었는데, 부품을 모아 말리고 조립하니 차차 기능들이 복구가 되었다. --picxenk
예전에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리모컨이 물에 빠졌었는데 부품을 말리고 조립하니 기능들이 복구되더군요. 마치 생명같아요 --강철
첫 연애를 하던 시절, 삐삐에 보관된 음성녹음은 장기보관을 해도 한 달후면 사라졌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도 안타까워서 지워지기 전에 듣고 또 듣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그때 핸드폰을 쓰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 kuroko
현명한 직장인의 선택 삐삐 --asiawide
우리나라에서는 삐삐의 생명이 굉장히 짧았던거 같다. 괜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삐삐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유행을 하다가 금방 식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런 예들을 하나 둘 접하게 되니 정말 두려워진다.
2년전만해도 삐삐를 보면 낭만적이라고들 얘기했었는데, 지금 삐삐를 쓰면 그런얘기 들을까? --Dennis
얼마 전 친구가 삐삐얘기를 하길래, 전 말괄량이삐삐를 떠올렸어요. 제가 삐삐를 잊었더라구요~ 삐삐는 그 사람의 사서함이잖아요? 한 친구는 삐삐에 음악을 녹음해가지고, 맨날 저보고 들어보고 평가해달라고 했답니다. 꼭 자신에게 삐삐쳐주는 사람을 반기는 안주인같지요?... 삐삐, 하고 쓰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군요..이젠 추억속에 삐삐군요 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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