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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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자신이 생각하는 형이상학이나. 어떠한 엉뚱한 생각.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어떤 것이라도 적는 곳입니다. 그 어떤것이라도..

무엇이 진실일까. 보이는 것들중에 진실이 존재할까? 혹은 내가 현재 하고 있는 혹은 보고 있는것들이 모두 허상일까.

우주는 끊임없이 반복한다.또 반복한다. 태어나고.. 퍼지고.. 소멸한다.. 나의 과거.. 현재.. 소멸.. 다시 나의 과거.. 현재.. 소멸.. 과거.. 현재.. 소멸.. 이렇게 계속해서 우주가 반복한다면? 그렇다고 전제한후.. 나는 그럼 몇번째의 우주속에서 현재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까..

운명은 존재할까. 내가 가야하는 길.. 우주의 법칙.. 우주도 또한 크게봐서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나는 우주의 발톱속에 때의 구성 요소의 정도 밖에 안되겠지.. 그렇다면 너무 허망하지 않을까. 아무리 지구 온통을 발칵 뒤집어 놓아 봤자. 우주의 발톱속에 때 정도만을 뒤집는 정도이니.. 태양계라고 해봤자. 우주의 발톱 앞부분 정도 뿐이 안될껄..

시간은 계속 흐른다.. 흐르고 흐른다.. 나는 지금 a 를 쳤는데 저 a 를 친순간은 금세 과거가 돼어 버린다. 또 b 를 친다.. 저 b 도 과거이다.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 점을 찍는 순간에도 . 시간은 흐른다.. 원래 제대로 따져보면 시간이라는 개념 조차도 인간이 형상화 시킨 하나의 도구일뿐일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을수도 있다. 우주는 그래서 넓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왜 태어 났을까.. 내가 우주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말하고 듣고..그런것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우주는 뭘까.. 어떤 공간에서 우주가 생긴것이며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주의 밖은 어떻게 돼어 있을까.. 결국 세상은 유한한 것일까.. 우주 밖은 끊임없이 펼쳐진 어떠한 공간일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현재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순간 없어 지는 걸까..나의 의식 자체가 없어진다면. 나는 무엇일까. 나의 생각.. 이 느낌.. 이런것들은 무엇일까. 의식이 없어진다면.. 현재의 나도 없는 것이다.

옷걸이는 그저 그러한 형태를 나타낸다.언어는 모든것을 표현할수는 없다. 언어는 인간이 단정짓고 약속해놓은 그저 도구의 형상화일뿐이다.재털이라고 부르는것에 물건을 담아놓으면 물건상자가 된다.빗자루를 매질할때 쓰면 몽둥이가 된다.즉 정해진것은 없다. 그러한 형태를 그저 우리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컴퓨터 위에 앉으면 컴퓨터는 의자가 된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때문에 존재해야 하는가. 국제문제와 문화.정치.예술.살인.농사.역사.국가.도둑.강간.강도.음악.미술.컴퓨터.산소.마우스.담배.칠판. 이러한 것들.. 답답하다.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것을.. 기껏 우주의 발톱의 때 정도밖에 안돼는 세상에서 우리는 바둥거리며 살아간다. 수많은 고민.걱정.질병.전쟁.사상.일.나태.가식.대인관계.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런것들로 몸이 온통 감긴 상태에서 우리는 몸부림 친다. 발톱의 때 속에서..

세상에 많은것들은 묻힌다. 드러난 실체보다 묻혀없어지는게 몇억배로 많다. 예를들면 우주안에 어떤 행성에 그 행성속에 태양계에 그 태양계안에 지구에 지구안에 한국에 한국안에 내가 지금 이글을 쓰면서 눈을 깜빡이는것을 과연 누가 볼것인가.. 그런것들은 묻혀 없어진다. 어느 바다에 수억마리 멸치때 가운데 한놈이 똥을 싼다. 과연 그것을 누가 봤는가. 모르게 모르게 모든게 묻혀간다. 내가 이글을 쓰는 동안 저쪽 다른 어느나라에서 어떤 노인은 죽어 갈것이고 혹은 누가 보게될지 모르지만 이글을 보는 이가 이글을 보는동안에 어느곳에서는 어떤이가 우유배달을 하고있을것이다.

자유란 인간에게는 없다. 먹을것의 자유에서 해방돼지 못하고. 싸는것의 자유에서 해방돼지 못한다. 추우면 얼어죽는다는 단순한 진리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게도 살아갈수잇는 자유마저 침해당한다. 자유란 인간적인 개념에서는 많이 보인다. 어떠어떠한 자유를 달라. 머리기를수잇는 자유. 공부할수 있는자유. 그리고 삶.. 아니 삶이 아니다 사회이며 문명이며 문화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속에서 탈피코자 자유를 갈망한다.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나또한 자유란 없다. 이미 난 이글을 쓰면서 자유에서 동떨어져 버렸으니까.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무엇인가? 이글은 이 단어. 자유란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약속일뿐이다. 자유라는 아니 이렇게 생긴 모양을 보고 자유라는 글을 유추해내며 그리고 유추해낸 단어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을 생각한다. 자유는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부터 자유는 없는것이다. 이글을 쓴다는것 자체가 자유가 아니라 한글이라는 단어체계에 속박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류승열이 아니다. 나는 나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런 글을 쓰는 행위를 하고있는 나일뿐이다. 단지 나일 뿐이다.아니 나도 아니고 어떠한 존재일뿐이다. 언어를 부정한다. 언어부정.. 류승열이라는 게 나라면 다른 류승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나여야 한다.

우리는 신이 될수 있을까. 유전공학의 발달과 우주개발로 다른 은하계를 찾아내서 지구와 같은 환경을 조성시킨후. 그곳에 복제인간을 떨어뜨려 논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며.어려워 할때는 도와주고. 이리저리 이끈다.법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고.우리를 신이라 부르게 한다.그렇지 않으면 발달된 과학기술로써 우박과 비의 벌을 내린다.성경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한다.그리고 그들의 전쟁을 지켜보며 그들이 하는 섹스를 지켜본다. 심심하면 새로만든 질병을 하나 퍼뜨리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본다. 또 심심하면 해일을 일으키고. 그들이 궁금해 하도록 그 행성 이곳저곳에 미스테리한 것을 만들어 놓는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구경한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현재 당신들과 나를 보고 있는 또다른 신들이 있을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즐긴다. 심심하면 해일과 태풍을 일으키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구경하고.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기위해 에이즈를 퍼뜨려 놓았다. 지구의 비밀과 신의 비밀을 알게된 사람은 의문사를 당하게 만든다.아직 그것을 알기에는 이르기 때문이다. 또 고대 서적중에 신과 고대의 비밀을 풀어줄 서적이 있다면 그 서적이 있는곳은 의문스럽게 파괴된다. 신은 그렇게 되물림 될지도 모른다. 신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는 또 신이되어 다른 인간을 구경한다.

우리에겐 자유란 없다.죽은후에도 의식이 존재해야 한다면 죽어서까지 이 세계에 속박돼어 살아가야 한다.천국은 영원하다지.그렇다면 우리에겐 영원히 자유란 없다!! --hitking

그정도의 신이라면 헛점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그리고 자유가 없는 것은 자유가 자유라는 개념속에 갇혀 있기 때문일 수도...--아무개

신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우리는 모든걸 할수 있고 모든걸 버릴수도 있다. 신에게도 허점은 있다. 신또한 우주라는 틀속에서 자유롭지 못할것이다. 우리가 전지전능하게 바라보는 신은 단지 우리보다 지적으로,과학적으로,혹은 육체적으로 우월할 뿐이다. 그들에게 다른것이 있는것은 아니다. 인류의 과학은 굉장히 많이 발달했다 많은 인공위성들이 지구 곳곳을 둘러보고 레이더 밖의 영역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지구를 정찰할 목적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비행기를 보내지만 간혹가다가 인류에게 걸릴때가 있다. 그들은 이제 인류를 몰살시키기도 어렵고,정찰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다른곳에 다른 인간들을 만들고 있을것이다.--hitking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의 의미가 되새겨집니다.Channy

인간이 만들어낸(창조자라고 해도 좋겠다) 모든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목적과 존재가치가 있다. 소파는 우리를 편안히 앉게 해 주고, 등은 어두움을 밝혀주고, 식탁은 음식이 담긴 그릇을, 그릇은 음식을 담고, 커텐은 세상의 빛을 가려주며, 책꽂이는 책을 정리할수 있게 하고, 컴퓨터는 다양한 기능으로 그 유용가치를 뽐낸다.

그러나..정작 인간(창조자)에게 있어 스스로의 목적성을 망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아니, 망각하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말할수도 있겠다. 여기서..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다. 사물이나 인간(창조자) 모두 그 자체로서의 목적성은 無에 가깝다는 것이다. 오로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만이 그 목적성을 찾을수 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것 같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우리가 만들어낸 사물과 같이 목적성 혹은 삶의 의미 또는 존재가치는 스스로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혹은 다른 곳에서 찾을수 있고 찾게 되는것은 아닐까?

만약, 신이 스스로 있는 者, 절대적인 者 라고 한다면 난 그 신의 가치를 인정할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는 우리, 인간이 있기에 존재할수 있으므로...예하

나는 우주안에서 그 누구도 창조자가 될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를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자면 흔히 발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속에서 위액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미 인간(우주)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우리는 발견 {위액(발명)}을 할 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신도 절대적일수는 없다.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 우주안에 존재하는 영향력있는 어떠한 개체일 뿐이다. 이 세상, 이 우주 안에서 우주를 초월한 존재는 없다. 혹시 모른다. 우주 밖에 또한 어떠한 세계가 있을런지도.. --hitking

진실논쟁

설 연휴라고 며칠을 밤늦게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습니다. 할일도 많으니 빨리 건전한 생활로 돌아가야 할텐데 말이죠..-_- 요즘들어 부쩍 글로 사기치는게 참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정보 부족과 게으름에서 오는 사기치기도 있을 수 있는 것 같고요. 악의로 교묘하게 사실 관계를 왜곡한다던지 하면 그 폐해는 더 심각하겠죠. 제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글 잘쓰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그렇게 화려하고 멋져 보일 수가 없고 부러워했었는데, 지금은 얄팍한 글솜씨에 속아넘어가지 말고 그 알맹이의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물론 제가 쓰는 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과연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이고,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의 한계란 어디까지인 걸까요?--Khakii

음, Roman도 오랬동안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렸을 적, 내가 참으로 거짓말을 본의와 본의아니게 많이 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생각들이 모이고, 경험들이 압박하고 하여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람들과 말을 하길 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입을 다물 수는 없고,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쓰거나 말하기를 그만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이 바로, 사람들로부터, 또는 나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하는 방법임을 깨닫기 시작한거죠. 나중에 들키거나 수정되더라도, 전달하고 싶은 내부의 내용을 일단은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내용에 수정이 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은 결국 다듬어가는 과정,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 속에서 밝혀질 수 있다. 그 믿음을 갖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듣고 싶은 얘기를 듣는거죠. 물론,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도사린 함정들을 십분 염두에 두면서, 때때로 말을 하지 않아야 할 곳이 있고, 침묵이 언어로 기능을 발휘하는 상황이나 문제가 있곤 합니다. 그러나,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담그면, 인생은 언제나 밋밋하고, 바보스러운 맛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듣고, 말하는 것, 읽고, 쓰는 것은, 죽는 날까지 반복되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그 앞의 장벽들을 때로는 자신이 넘어서지 못하더라도, 감내하고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땐 바로 자신의 앞에서 사라지는 것. 진실은 결국 자신이 신경쓰고 노력한만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 인생이 항상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다... 뭐 그런 생각하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중인게, 적어도 Roman인 것입니다. 설사, 생무지 완전 양아치가 나라고 하더라도, 내가 얘기하고자 할 때, 그 말자체를 듣기도 전에, 넌 양아치니까 입 다물어...하는 정도면, 그 사람과는 대화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때로, 마찬가지의 이유로, 상대방이 나와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정도로도, 커뮤니케이션은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신경 쓰면, 진실에 보다 근접한 것이나, 근접하지 않은 것을, 자기의 현실 속에서, 어느정도는 가려낼 수 있습니다. 진실의 한계를 알기 전에, 먼저, "현실적으로" 진실을 가려낼 준비를 자신이 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스모크 안에서, 부정확한 면을 많이 가진 난 오히려 평안합니다. 부정확함과 오류가 발설되어도, 이를 가려낼 사람들은 이미 가려내고 있고, 수정해내고 있다라는 믿음(어느정도의 근거를 가진)이 있으니까요. 그 수정된 상황들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은 기쁨으로 범벅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나름의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해, 수정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부분의 기쁨이기도 합니다.--Roman

진실이란 단어가 실존을 바탕으로 생겨난 단어일까요? 어쩌면 진실이란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도 그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자신의 사유에서 찾고자하여, 별거아닌 사실을 멋있는 말로 포장한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지금 나의 눈앞에 보이는것은 모니터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컴퓨터의 주변기기이다"라는 말도 멋있는 진실이 될 수 있겠네요...무엇을 향해 나아감은 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삶에 동기를 부여하죠...목표란건요...그렇지만 우리의 목표의 실존에 대한 의심없이 함부로 다가가는건 결국엔 그 목표에 다다를수 없더라도 너무 소모적인 일이지 않을까요? 그저 님께서 말하고,듣고,읽고,쓰는것을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지않을까 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아 없는것에 다가가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도 먼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살고있지만...... 아...벅잡하여라... :) --벽공기

진실이 없다라고 생각하면,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지진 않을까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뇌의학의 발달에 의해서 결국에는 '진실'이라기보다는 데카르트가 살고 있었던 사회, 시대에 있어서나 최적, 최선의 진실이 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저마다의 진실이나마 구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벌판에서 칼을 들고 싸우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해봅니다. 진실이 혹 없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절망감이나 부정적인 의식은 다른 가능성들의 완벽한 폐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벽공기씨의 사고의 편린이겠죠, 설마 진실같은 것 필요도 없어라고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진실이라는 것에 거는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속에서, 보다 나은 곳으로 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다 평범하고,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일상적인 부분이 아닐까요?--Roman

전 어떻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말을 잘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무엇이 사람들의 혀를 그렇게 단련시킬까요? 어쨌든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진실의 실존여부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이죠.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히 필요하다라고 말해야죠. 사람들에게서 진실에대한 믿음(어딘가에 자신이 추구하는 무엇인가가 있을것이란 생각)을 빼앗는것은 종교인들에게서 그들의 신을 빼앗는 것에 빗댈수 있겠네요. 그건 삶의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빼앗는일이죠. 그렇지만 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진실이 없다고 하여 사람들이 마냥 마이너스적인 행동만을 할것이라곤 기대할 수 없을것 같은데요... --벽공기

제이콥의거짓말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동감할 수 있죠. 진실이 없다고 해도, 플러스는 있는 하나의 반증이거나 예시. 많은 종교가, 사실은 진실의 기반보다는 허위의 기반 위에서 더 온전할 때 등등... 항상 말이 길어지면, 한발자국 더 나아갈 필요가 없는 부분까지 나가곤 하니까...조금은 더 진실해지기 위해서, 내지는 진실이 없는 곳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얼레벌레 교묘한 표현은 쓰지 않도록, Roman도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글을 벽공기씨가 친히, 홈페이지에 올려주어서, 내심 기뻤다라는 말 전합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말을 잘 하는건, 말을 교묘하게 잘해서 틀린 것도 맞게 하는 쪽보다는, 자신의 지식을 얼마만큼 보다 이해가 용이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타인에게 전달할까를, 좀 더 고민하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 비해서 더많이 모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쟁이나 경쟁도 없지는 않지만, 이곳은 보다, 정보의 전달과 공유, 혼융과 잡종적지식의 곧바른 구성에 대한 열망에 차 있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구요, 보다 인간적인 이해를 요청하는 부분에도, 사려가 깊은 동네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 좋게 생각하자면 그렇단 소리지요. 1개월차 Roman이었습니다.


진실와 진리, 그리고 그 사이의 빈 공간.. 그것들은 존재하는 걸까..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무엇을 존재케하는 것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보다 넓고 깊어질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자유란게 극히 한정적이고 때로는 치사하리만큼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인문과학..순수과학이 그 영역을 넓게 깊게 할 수록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유는 분명 그에 비례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이 진리가 존재할까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태만상인 그 그릇이 서로 다르다고 부정할 수 없으며 닮았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 어느 공통점은 가지고 있을겁니다. 그것을 진실 또는 진리라 이름지을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극간에서 누구나 무엇이든 취하고 있지만 늘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 때로는 허망함에 멈춰버리는 것. 그래도 지금 제가 느끼는 확실한 하나는 죽어도 진정 죽어지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 살아야하고 그럼 다시 화두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가 되네요.. 이런 맞물림..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집니다.. --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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