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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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라도, 이것이 없으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특히나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실감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일반론적인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과는 달리, 특수 학문적인 의미에서와도 달리 커뮤니케이션은 곧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자기의 육체 또한 실체성을 가지도록 만드는, 인류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시간이 지나면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이 얘기는 또다른 것으로 변해갈 것이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 우리는 [http]스승의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 - 까리용

뉘앙스, 또는 느끼는 감각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언어의 정의의 경우에는 한국어와 영어가 정의하고 있는 부분이나 쓰이는 용례가 다르다. 어떤 단어의 경우에는, 그렇게, 조금은 조롱을 사더라도 한국어로 영어를 쓰는 것이 어느정도 정확한 화자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다. 무라카미하루키댄스댄스댄스를 보자면, 번역문이 원문장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면, 이 일례로 확실히 볼 수 있는 '고져스(Gorgeous)'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한 여자의 매력을 평가하는 화자의 언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아니면, 정확히 그 여자의 매력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이 등장한다. 그냥 멋지다라든가, 화려하다, 고급스럽다, 부티난다, 아름답다, 이쁘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타 언어로 교체한 것이다.

한국어로 영어를 쓰는 것에 있는 실질적인 이득, 물론 그 중에는 조금 조롱기를 피할 수 없는 언어용례가 있을 수 있지만, 확실한 언어표현을 성공시키는 방법을 하나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를 최초에 사용한 사람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Communication이라고 쓰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쓴 것은 그러한 형태로 사용되는 단어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보 전달내지는 공감각의 요소가 더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같은 언어 수단을 통한, (말, 노래, 글, 디지털 정보를 쌍방이 함께 쓰는)의 교류라고 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는 그 언어 수단이 다른 것끼리도 맞물리는 상황에 대해 더 적절히 표현한다.

이를테면, 스승의 언어가 되는지 안되는지 알 수 없는 한국어 영화 제목이 일본 상영관에 그대로 걸리는 것은 우리나라 말의 뉘앙스, 감각에 대해서, 보다 일본인들이 잘 공명하는 실제적인 이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쉬리나, 카루(텔미썸딩), 유령 등등...검색해보면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이 '스승의 언어'라고 무의식적으로 옛날부터 느껴왔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빵이나 담배같은 이미 우리나라 말화한 외래어의 경우에도 그것이 스승의 언어였을까? 다시 돌아보고 생각해볼만한 언어사용에 대한 한 면을 드러내주는 것이 '스승의 언어'가 담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과유불급의 교훈에 대해서는 항상 염두에 둘만하다.--Roman

입장의 고수냐, 아니면 커뮤니케이션이냐

정보의 기하급수적인 확장, 인류가 근 2년간 만들어온 정보의 양이, 그 이전까지 만들었던 정보의 반정도가 이미 되었다라고하는 기사문이 있다.(카더라통신 그러나 검색가능이라는 표시는 해놓겠다.) 인류의 정체성, 각각의 개개인이 가진 정체라는 것을 바닷가 해변의 파도처럼 쉼없이 흔들고 휩쓸어버리는 정보의 홍수는, 어제 나의 입장이 오늘 그의 입장이나 그녀의 입장으로 변화하는 것을 수시로 가능케하고 체험케 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예시가 담겨져 있는 무질의 소설(밀란쿤데라사유하는존재의아름다움에서 인용)을 보면, 두 학자가 서로 논쟁을 하던 중에, 서로 그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 자신의 입장이 상대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상대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이 되기도 하는 과정을 겪다가, 결국에는 한 학자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논쟁은 인간을배제한논리에 입각한 논쟁과는 거리가 먼, 바로 타나토스, 상대를 죽이고, 파괴하고자 하는 본능의 싸움으로 비화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이때는 둘 중에 누가 하나 죽어야만 이 논쟁의 끝이 나오게 된다. 물론, 무질의 소설은 극단적인 상황을 소설 속 세계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논쟁의 와중에서 그 논쟁의 중요한 의미와 가져야 할 휼륭한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상대를 그로기로 몰아가는 것에만 신경을 기울이다보면, 그 논쟁은 이미, 언어의 교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창과 방패를 든 전쟁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그순간 싸우고 이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아주 현실적인 판단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창을 들어버린 상대에게 방패를 버리고, 커뮤니케이션하자고 말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이기적유전자링크를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의 법칙이 이러한 내용에 연결될 수 있다.) 분명히 우리의 생이 1초 뒤에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은 물처럼 흘러 어느계곡 어느 산천을 지나고 있게 되기 마련이다. 오늘 이 입장을 갖고 그 입장을 이겼다고, 내일 이 입장을 가진 누군가에게 그 입장에서 당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커뮤니케이션이 확장되고, 끊임없이 변종화하는 세계에서, 이제 입장이라는 것에 목숨을 거는, 또는 단단한 껍질 안에 있는 것은 견고하고, 멋져보이긴 하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아주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함께 부서지는 것을 예견하게할 수도 있다.

물론,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의 중간중간에는 독선이나 자기 아집, 배타적 태도가 필요해질 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어쩌면 어제까지 멋졌던 당신이 좀스럽고 곱살맞은 사람으로 둔갑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물처럼 흘러가는 커뮤니케이션, 노스모키안커뮤니케이션하는 자세는 어쩌면 그런 것에 더 가닿을 수 있을 때 보다 현명한 자신을 변화무쌍하게 만들 수 있는 기본적인 자질이 아닐까? 변화하지 않는 것은 사멸한다. (그러나 변화와 변심이라는 것은 조금은 다른 개념이다.)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할 때, 난 그 말이나 정보나 지식, 문화, 음악, 춤 등등을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그것들을 받아들인 뒤에 당신의 것으로 바꾸어서 내게 전달해주는 그 무엇인가이다. 이 시대의 위대한 정보, 문화의 분석자나 전달자, 창작자들 중에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은 지척으로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당신의 언어를 더 듣고 싶어한다. 다른 매체나 사람들이 아무리 섬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라면,커뮤니케이션을 하자고 덤벼든 그 순간이 아무런 의미나 감흥이 없는 순간으로 바뀐다. ThisIsNotAnEncyclopedia

대화를 하다보면은 상대방이 나에게 주는 정보가 출처가 정확하지 않거나 사실에서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는 걸 종종 발견하게 된다. 교양수업에서 얼핏 들었던거 같은데 이걸 커뮤니케이션 상의 잡음(noise)라고 해야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정을 상당히 많이 겪게 되니 오히려 사람에게서 직접 들은 정보라도 그 원래 소스가 불분명한 경우는 믿지 않는 편이다. 소위 "애들이 그러더라."나 "카더라 통신"이 경우가 대표적인게 되겠다. 만약 곡 필요한 경우라면 비교적 그 방면 전문가나 경험자가 많은 동호회나 까페에 문의를 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상의 오류.. 상당히 무섭더라는...--nonfiction

때로, 아날로그적으로 주어지는 양적으로 팽창되고 세밀한 내용 자체가 바로 설득 또는 정확한 정보 전달 요소가 되고, 때로 강렬하고 함축된 디지털적인 표현이 설득 또는 정확한 정보 전달 요소가 되는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다. 양자는 서로를 보조한다. --Roman

커뮤니케이션 시론
{{|우리는 마케팅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손님으로 초대한 주인이고 광고가 그 진행을 맡은 다중매체 시대에 살고 있다.
소비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마케팅도 커뮤니케이션이고 광고도 커뮤니케이션이다.
상표도 커뮤니케이션이고 상거래도 커뮤니케이션이다.
곧 커뮤니케이션도 커뮤니케이션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면 그것은 모두 커뮤니케이션에서 생긴 것이다.
결국 해결책도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 다비트 보스하르트 "소비의미래"|}}

욕도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욕하고 난 뒤의 결과는 커뮤니케이션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옹호되지는 않는다. --R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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