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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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일꾼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일꾼이 되어 일을 하고 일을 끝낸 뒤 휴식을 취할 수 있길 바라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휴식'이란 말이 낯설기까지 하다. 그 보다는 '죽지 못해 살기'란 말이 더 익숙한 것이 씁쓸할 뿐인 현실이다. 아무튼 그 선 상에 있는 우리들의 많은 일들 중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몫이어야 마땅할 많은 일들이 가정의 어깨 위에 고스란히 얹혀 있다. 이미 공론화된 것들조차도 실질적 해결책이라 할 수 없는 정도로 운영되고 있기도 하고. 울타리밖으로는 근본이 그러하듯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될 울타리 밖으로 나아가 사회의 몫으로 자리잡아야 할 일들에 관해 살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맑은

늙으신 부모님 모시는 일

노인복지문제와 함께 이 시대의 중심에 선 우리들 부모님의 현 주소도 한 번 쯤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딸가진 부모는 무조건 이해해라라는 사회적 강요로부터 이야기의 고리를 꿰었지만 딸가진부모는무조건이해해라의 전반적 흐름과는 좀 삐딱 선을 탄 듯한 문제의식을 하나 보태 본다.

"부모님 모시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할 수 있다."는 상황은 불균형 상태를 바로 잡아 균형을 찾으려는 긍정적 '반응'으로도 볼 수 있고 인습 타파의 '불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딸가진부모는무조건이해해라라는 말조차 성립되지 않던 과거 역사가 있었다는 걸 상기해 두자. 그러면 서로에게 치미는 분노의 원인과 대상이 따로 있음을 알고 좀 더 현명한 대처가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가 날 때면 언제라도 를 꼭 펼쳐 보자. 에서 보여주는 뜻은 나의 현실 어디에라도 있는 것이다.

딸들이나 아들이나 부모를 모시고 싶은 마음은 하나인데 현실의 부모 입장은 왜 딸,아들처럼 하나가 될 수 없을까. 평등하냐 불평등하냐를 떠나, 일단 그러한 불균형 속에 있는 부모님들의 입장은 이미 소외가 아닐까. 딸들 쪽이든 아들 쪽이든 결과적으로 한 쪽 부모는 배제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쉽게 말해 한 집에서 양가 부모님을 모두 모시겠다는 발상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양쪽 모두 독자를 둔 가정의 결합인 경우 한 쪽 부모의 배제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요즘은 이런 경우를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관련하여 한 동안 이런 생각을 깊이 해 왔다.아이를 기르는 일에 관한 사회적 접근법들은 열려 있고 해결책 마련을 위한 목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지만 노부모를 모시는 일에 관한 사회적 접근법은 너무도 굳건히 닫혀 있는 것이 아닌가. 노부모를 모시는 일은 여전히 당연히 어디까지나 가족이란 울타리 안의 몫일 뿐이라는 통념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 혹시, 노부모를 모시는 일에 관한 사회 제도적 움직임들이 우리나라 어디에선가 움트고 있을까? 혹시,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어떤 기업에서 탁아소를 운영하면 이런저런 제도적 지원을 한다." 와 같은 맥락의 노부모 모시는 일에 대한 어떤 제도적 움직임. 시야가 좁고 귀가 어두운 탓인지 아직은 그런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그런 제도적 뒷받침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즉 사회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딸가진부모는무조건이해해라의 어긋남은 우리들이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달라질 것이 있다면 '딸들'이 있던 자리에 '아들'이 박히고 이집 저집 공평히 일을 분배한다는 논리로는 딸들과 아들이 있던 자리에 '가족'이 박히는 정도. 여기까지는 결코 달라진 것이 없다. 진정으로 달라지려면 그 딸들이 있던 자리에 끝내는 '사회'가 박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개인적 소외문제를 떠나 이번에는 사회적 고려를 잠깐 해 볼까. 만약, 벌이가 시원찮은 맞벌이 부부가 치매로 고생하고 계신 노부모님을 울타리 안에서만 모셔야 한다면 그 집이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은 따논 당상이렸다. 그 집이 아파트라면 어떨까?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가져올 불씨를 안고 사는 셈이지 않을까. 그러한 처지의 가정이 공동주택 한 동에 한 가구만 있을 것도 아니고 보면 작은 불씨가 아니라 다이나마이트를 끌어 안고 사는 셈이지 않은가?

사회적 손실에 관한 예시는 사회적 접근이 필요함을 사회의 이기적 측면으로 설명해 보려 했던 것이고 계산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그런 수지타산은 실상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계산을 넣지 않고서도 사회적 해법의 명백한 필요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노부모를 모시는 일에 관한 사회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 속에서라면 다음의 논리를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약이 심한 것일까. 각자의 무의식을 한 번쯤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가? 아래의 논리 속에 살고 있음을 피해갈 도리 역시 없다.

"아이는 사회의 희망이고, 부모는 사회의 퇴물이다."

그 아이가 그 부모인 것을. 희망을 퇴물이라 하면 심각한 모순이 아닌가. 이것을 근거로 내 세운다면 역부족일까?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은 고민에 깊숙이 빠져 들었던 즈음에 대구지하철방화참사가 터졌다. 정부는 그 모순을 결과적으로 인정했다고 본다. 희망이 퇴물인 모순된 현실과 그 모순이 종국에는 대구지하철방화참사를 불렀다는 비극의 현실을 직시했던 모양일까, 그 즈음에 노인요양 관련 정책을 떡하니 내 놓았다. 하지만 그 시발은 '사회의 고령화'와 그로 인한 '노인 수발 비용의 증대'라는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라 한다. 고령화, 고령화, 말로만, 그것도 너무도 조용히 속닥거리고만 있다가 대구지하철방화참사가 터지자 몽롱하게 졸고 있던 정신이 확 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고령화 사회의 노인들은 표밭이기 때문에 그 사고가 없었어도 가까운 장래에 그러한 정책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필연'이라고 해야할까. 사람들이 몰려있는 표 밭에는 언제나 정책도 많은 법.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노인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의 원칙'에 사회적 합의를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합의의 구체적 산물로 보건 복지부에서 "모든 노인이 보편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http]『공적 노인요양 보장제도』도입 기획안을 공식 발표했다. (2003.03.17)" ( see also 관련 기사, [http]노인요양 국가가 책임진다. )

치료 가능성이 있는 노인은 요양 시설로 가서 치료를 받고 가까운 장래에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면 될 것이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노인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이라도 간간히 기억이 선명하게 찾아드는 때가 있을 터인데, 그 때 격리되어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 순간 자식들을 눈 앞에서 볼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다면 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일인가. "자식은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살고, 부모는 제주도에서 늙은 시절을 요양하는" 이런 형국으로 치닫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 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정부는 토론 공화국 아닌가. 정부 관계자의 귀가 간지럽도록 열심히 입심을 보태 보자.

지금은 2003년 여름. 정부는 2004년 첫 시행을 하겠다 하였다. 2004년은 곧 내일이다. 내일 무슨 잔치가 있는데 오늘 이렇게 조용한 집안도 있을까? 그 발표가 있은 뒤 관련 소식을 언론을 통해서는 쉬이 접할 수가 없었다. 대구지하철방화참사라는 사건이 식어 버리니 덩달아 식어 버린 것이 아니어야 할텐데. 대구지하철방화참사의 모방범죄의 확산을 막고 늙어 병들면 이 한 몸 기댈 곳 없는 나라 라며 불안에 떠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거짓 행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켜보겠다. 실현되는 그 날이 오면 기뻐라 반기며 이 글을 수정할 수 있길 소망한다.

결과적으로 노인 요양문제의 사회적 접근이란 탁아와 교육문제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문제로 치부되어 오던 숱한 일들이 사회화로 나아가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숱한 사회적 과제들을 끌어 안은 채 그동안 묵묵히 살아 왔음을 인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산아, 육아, 교육, 통신, 고용, 건강, 연금, 요양 등등이 모두 하나 같은 대목. 평생에 걸친 기초생활의 담보 문제가 가정의 몫에서 사회의 몫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것들이다.

노인들은 그렇다. 그런데 아직 일할 힘이 넉넉한 어른들은 어떨까. 자르기 쉽고 뽑기 쉽게 하자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모님들이 너무 빨리 경제 활동 영역으로부터 배제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아무도 나무랄 수 없도록. 늙은 사람 자르기는 쉬워도 늙은 사람 뽑는 일에는 그 누가 나서겠는가. 아직 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물 취급된 부모님들, 우리 사회의 최후의 사각지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 단물 다 빨아 먹고 내다 버린 헌신짝 신세의 어른들. 이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지금 우리들 자신의 부모님. 현 정부(노무현 정권)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적극 지지하여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현 정부의 의지라 해야할지 노무현의 의지라 해야할지는 의문이다. 물론 정책 자체는 이어받은 것이긴 하나 그것을 특별히 강조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숱한 사회적 문제를 양산시킨 그 노동정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승의 여지가 있단 말인가. 가족의 품으로도 직장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길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의 모습. 그 모습이 우리 부모님들의 현주소이다.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모두 채워가며 자식 새끼 먹여 살리려 애를 쓰던 어머니. 생명을 위협하며 한 시도 쉼없이 혀를 날름거리는 현실에 맞서 싸우다가 울타리 밖에서 울타리 안으로 밀려드는 고개 숙인 아버지의 쓰디쓴 한숨을 끝끝내 견디지 못한 채 그만 자식까지 잡아먹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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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카드 빚에 가위 눌리다 막다른 길로 내 몰린 어머니.

인천 부평구 청천동 ㅅ아파트에서 자녀 3명과 함께 17일 투신자살한 손아무개(34)씨 가족은 남편의 실직으로 카드빚을 내 살아오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인천 부평경찰서는 조사 결과, 손씨가 생활비 조달을 위해 카드빚 2천여만원과 은행 대출금 1천만원 등 모두 3천여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고 18일 밝혔다.
......
아파트 주민들은 ...... “아이 엄마도 애들이 셋이나 되다 보니 어디 나가서 일도 제대로 못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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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날인 2003년 7월 18일(금)에 정부는 [http]노숙자 등 취약계층 보호대책을 발표했다.

아, 또 하나의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이다. 그렇다 한 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부분의 사건사고는 소만 잃은 상태로 끝나 버리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대구지하철방화참사와 같이 아파트에 불을 질러 물귀신 처럼 남들까지 죽음으로 끌고 가지 않고 자기네 네식구만 달랑 죽었으니, 천만다행이라 하리? 아마도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21C에 굶어 죽은 사람이라 제목을 붙이는 게 차라리 낫겠다. 사람이 굶어 죽는 판국에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향하여!라니, 이 얼마나 가당찮은 말인가? 그 가당찮은 선동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있은 뒤에는 이른바 '대책'들이 속속 나와주니 이것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다르다면 다를 수 있는 21C의 새역사가 아니겠는가.

지금.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선의 교정이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직접적인 교정은 아니다. 다만, 노인문제의 사회적 접근법이 궁극에는 경제 활동에서 배제되고 최후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의 부모님 일반으로 확산될 것임을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말로 마냥 기다리기에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젊어서 알 수 있다면. 늙어서 할 수 있다면. from 명언

(그리되길 소망하며) --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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