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가능한 진리는 불확정성에 지배되므로, 진리근사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진정한 진리는 정확하게 정의하거나 기술할 수 없기 때문에 모순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으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불교의 화두, 공안이란 이러한 모순과 공존할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항상 논리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한정지워진 불가능한일에 대한 가능한 일의 경계 내에서의 자유 밖에 없기 때문에, 다양성과 분화 속에서의 발전이 아니라, 수렴과 통일에 의한 발전만이 가능하다.
논리를초월한진리의 몇가지 예 ¶
가끔 이런 것들을 대하면, 이런 것들을 이르기 위해서 우선 더더욱 첨예한 논리를 쌓아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 없이 바로 이런 것만 한다면 이상할 것 같다. 과거에 '교'없이 '선'만으로 수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 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naya
GoedelEscherBach에 삼단논법이라는 논리학의 기본적인 도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A: 모든 사람은 죽는다.
B: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Z: 따라서,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B: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Z: 따라서,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A, B 명제를 인정하는 사람이 Z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A, B가 참이라면, Z도 참이다. 라는 새로운 명제를 다시 인정해야 한다. 이 명제를 C라고 하고, A, B, C 명제를 인정하는 사람이 Z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시, A, B, C가 참이면, Z도 참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인정해야 한다. 이 명제를 D라고 하고, A, B, C, D 명제를 인정하는 사람이 Z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무한퇴행에 대한 이야기군요. 호프스태터의 이야기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위의 이야기만을 놓고 보자면 이 논법은 잘못되었습니다. 삼단논법은 "대전제와 소전제가 옳다면 결론도 참이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증명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논리학의 공리를 지탱해주는 것 중 하나는 모순의 원천적인 거부입니다. 즉, 동일한 논리적 전개가 A와 ~A를 동시에 산출하면 안된다는 거죠. "물은 물이고 물이 아니다"라는 식의 심오한 이야기가 아닌 이상,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주장한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니까요. 다시 말해 논리학은,
- 명제는 참 혹은 거짓의 값을 취해야 하고,
- 명제들의 논리적 전개가 모순을 함축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