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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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禪宗)에서 수행자의 마음을 연마하기 위해 과하는 시험 문제.

즉 공안은 수수께끼나 문제의 형태로 주로 제시되는 논리를초월한진리를 터득하는 지적인 게임에 가깝다. 불교의 역대 조사들이 만들어 놓은 공안은 1700 여가지나 된다고 한다. 단, 공안은 단순한 지적 게임의 테두리를 벗어난다. 공안은 IQ 테스트가 아니다. 사실, 공안에는 풀이과정이 없다. 가슴에 사무치면 어느 날 가슴에서 공안은 확 풀어진다고 한다. 대각을 이루었을 때에 이 1700 여 공안을 모두 지혜의 눈, 즉 법안(法眼)으로 꿰뚫어 알 수 있고, 어렴풋이 깨달은 사람은 몇 개 정도의 공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공안은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와 같은 말이다.

공안이란 그런 것이다. 정의되지 않은 연산이다. 절대로 그 문제의 틀 내에서는 풀지 못한다. 예부터 불교에서 공안의 답을 발설하는 사람은 절대로 깨달음을 못 얻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기치기이다. 하지만 애정이 가득한 사기치기이다. -- 산우행, naya, munikang




1. 병속의 새 공안

새의 비유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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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어릴 때 병 속에 들어갔다. 새는 커지고 병은 상대적으로 작다. 병을 깨지 말고, 새를 죽이지도 말고 새를 꺼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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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새가 원래 병 속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는 자신의 몸에 구속되었던 적이 없다. 그런 것처럼 생각했을 뿐이다. 이것은 라즈니쉬가 답을 단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벼랑 끝에서 줄을 타고 올라온 사람에게 이제는 줄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에게 생명과 같았던 줄이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공안은 너는 벼랑 밑에 있었던 적조차 없다. 너는 항상 여기 있었다. 라고 말한다. SeeAlso [http]IQ박물관기사


'논리를 짜맞추어 전제를 통과하는' 답을 내려고 집착할 필요가 없다. - 새의 비유만 보더라도 - 답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흔히 답은 곧 원리지만, 공안은 그렇지 않다. 답을 내는 것은 그래서 무의미하다. 스스로 진정 깨친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있고, 남에게서 들은 사람에게는 재미가 있을 뿐이다.

원래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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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사인 남전(南泉)의 지인 중에 육긍(陸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출가한 몸은 아니었지만 스님들과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선객으로 한때 어사대부까지 지낸 관리 출신 선비였다. 그래서 곧잘 남전의 처소를 찾곤 했는데, 남전 역시 그와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육긍이 남전에게 문제를 하나 냈다. 그들은 가끔 기괴한 문제로 선문답을 주고받던 사이였기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스님, 문제를 하나 낼 테니 풀어보시겠습니까?"
"그러지요."
남전이 흥미로운 눈으로 육긍을 쳐다보았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병 속에 거위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위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스님이라면 병속에 든 이 거위를 어떻게 꺼내시겠습니까? 단, 병을 깨거나 거위를 다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육긍이 말을 마치자 남전은 대뜸 그를 불렀다.
"대부!"
어사대부를 지낸 육긍을 남전은 항상 그렇게 불렀기에 육긍은 반사적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때 남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벌써 나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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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새의비유로 시작되는 소설이 김성동의 소설만다라이다.


새에게 알을 낳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알에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도 새니까..병속에 들어간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면 되는군요. --김우재
히야 기가막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새는 원래 병 속에 있지 않았군요! 역시 발생을 생각하시는.. ^^ 근데 생각해보니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새가 태어나자 마자는 알보다 작지 않나요? 만약에 그런 새만 들어갈 수 있는 병이라면.. 음.. 알은 나오지 못하지 않을까요? --naya

재미 있군요. 양자역학적 터널링 효과에 의해 새는 일정확률로 병 밖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밖에서 관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새가 밖에서 보일지도 모르죠, 아닌가? -_- 아니구나. 결국 새를 꺼낼 확률은 거의 0가 아닌가요. 그러니깐 저 공안에 대한 답은, 새를 꺼낼 수도 없고 새는 나갈 필요도 없다. 병안에 있는 한 죽이지도 않고 병을 깨지도 않는다니 밖에 나가는 것보다 안전하고 자유롭지 않겠는가. 인간은 정신적 자유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언제나 자유를 갈망하지만, 자유는 불가능한 환상이고 게다가 불필요하다. 오히려 구속된 상태에서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느낄 것이다. --오티움
흠.. 꺼내보라고 했는데.. 새가 꺼내지질 않았잖아요.. --;; 이게 머람. --naya

제가 들었던 위 공안의 답은 병이 고무병이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전공별로 코끼리 냉장고에 집어넣기 유머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dotory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싫어요. 아니 새가 중요하지 그깟 병이 중요해요?' --Skullkid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싫어요. 아니 병이 중요하지 그깟 새가 중요해요?' -- gerecter


문제를 읽어보니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답이군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답이군요. 문제부정패턴을 익힌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답이네요. 그런걸 두고 무슨 깨달음이라니, 말장난을 두고도 깨달았다하면 깨달은 것이요, 하니 깨달은 이를 두고 뭐라하지는 않겠지만, 공명이 보면 낮잠을 잘 상황인듯.-_- 차라리 병이란 개념이 딱딱한 유리병같은 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고무같은 신축성을 가진 제재라 보는 것이 더 올바른 답인듯, 그래도 병이란 것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재질문제도 볼수 없다면 새의 깃털을 입구로 빼내어서 새를 복제시키는 것은 어떨까 싶고, 시간이 역전되는 차원으로 병을 가져가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 새를 꺼낼수도 있고, 병이 유리라 보면 처음에 들어갔다는 것이 입구로 들어간것이 아니라 뒷벽에 유리에 비친것으로 본다고 치면 곧 새가 자라나도 나와있는것과 마찬가지인듯. 아, 글적다가 보니 마지막에 적은 문장이 더 맞는 공안의 답인듯하네요.어떻게 오역의 세월을 거치고, 말의 생략의 과정을 거쳐서리 "새가 들어가지 않고 유리에 비쳤다."가 "새가 들어가지 않았다."로 바뀐듯, 음. 역시 과거의 역사를 얘기를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네요.--rururara
이 문제를 보니까, 저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연상되더군요. 달걀을 세울 때, 달걀의 일부분을 깨서 세운 것이죠. 달걀이 깨졌으므로 이것도 문제부정패턴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공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나, 공안이라는 것은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기 위한 문제들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daybreak

새는 그냥 잡고 빼내면 됩니다. 새가 들어간 병이 꼭 병모양 일 필요는 없지 않을 까요. 그 병의 모양이 사발이나 바케스처럼 입구가 크다면 나오는 것은 쉬울듯 하군요.공안에서 병이 새에 비해 작다고 했으니 이는 새의 몸의 일부가 이미 병밖으로 나왔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몸의 일부가 밖으로 삐져 나올수 있을 만큼 입구가 크다는 것 까지 도출되고 좀더 생각을 확장하면 입구가 더 크다면 새를 빼는 것은 쉽군요.

공안인지라 답에서 어떤 교훈을 짜내야 한다면 들어있다해서 막힌것은 아니라 머 이런거겠죠 --tigger

1. 새가 병보다 커질 수 있으려면, 이미 병 밖으로 나와야한다. 조그만 상자안에 갖혀서 자란 벼륙은 그 상자만큼밖에 뛰지 못하든, 그 병 속에서 자란 새가 병 속에 들어있었다면, 병만한 크기 밖에 안될 것이다. 이미 새는 병속에서 있을 수 없을만큼 컸으므로, 새는 병에서 나온지 오래다.
2. 새는 마음이다. 작은 병에 갖힌 마음이 병에 갖혀있을 수 없을만큼 커버렸다면, 그 마음은 이미 병 밖에 나올 만큼 커져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큰 마음이 병안에서 클 수가 없다. 마음은 병에서 나온지 오래다. 그러나 마음이란 것이 어디안에서 나오고 들어가고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마음이 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병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naya


위의 문제부정패턴 이야기처럼, 어차피 선사가 아닌다음에야, 저는 억지로 답을 멋있게 읊기 보다는, 문제가 현실적인 우리 삶에 제시해주는 가치를 갖고 고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말하자면, 이 공안은 처음 새가 작았을 때 유리병에 넣었는데, 새가 좀 더 커져서, 이제 병 입을 통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는 겁니다. 물론 분위기 잡으면서, 문제의 정해지지 않은 가정을 자기 나름대로 정하면서, "동자승이여, 내가 언제 이렇다고 했지 저렇다고는 했느냐?" 하면서 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속되고, 속세적인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 공안의 핵심은 상충되는 두 고귀한 가치가 부딪힐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리병도 아주 멋지고 질좋은 보물 크리스탈이고, 새도 정말 희귀하고 아름다운 새 입니다. 이렇게 두 귀한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어물쩡거리면서 가만히 두면, 새는 병을 꽉 채울정도로 커져서 결국 질식사해버릴 것이고, 병도 새를 이기지 못하고 깨져버릴 것입니다. 잔인하지만 새를 죽이고 토막내서 병에서 꺼내면 병을 얻을 수 있고, 병을 깨면 새를 구할 수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에 대해 결단을 내리면, 아깝게 하나를 포기하지만, 하나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고통스런 결단을 내릴 필요없이 둘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새와 병을 서로 다른 관성계에 두면서 절묘하게 속도를 조절해서, 병 입구를 상대론적 길이 팽창 효과로 늘입니다. 그리고 새를 빼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와 병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이런 효과를 얻으려면 어마어마한 장비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앞서 언급하신 분의 말처럼 양자 터널링 효과를 이용해도 되겠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몇천억년, 몇조년, 몇경년의 시간을 투입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애초에 생각한 "가치"의 문제를 호도해 버린 것입니다. 한 마리 새와 병 하나를 위해서 몇 천억년의 세월과 범우주적인 인간의 노력, 생명, 자원 투자는 애초에 우리가 새를 꺼내기로 한 목적과 달라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냉동 기술로 새를 보존처리 한 다음 그 상태에서 새를 분해해서 빼냅니다. 그리고 다시 접합수술을 한 뒤에 해동해서 되살리는 것입니다. 더 현실적인 방법은 레이저 커터로 단면이 깨끗하게 병을 잘라 새를 꺼내고, 레이저 용융 접합으로 병을 다시 깔끔하게 붙이는 것입니다. 기술이 아주 좋다면, 병은 크게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며, 병에 검댕이 좀 묻은 정도의 가치 손실만이 있을 것입니다. 깔끔한 해답은 아니지만, 이 경우, 인간적인 가치 판단으로 볼때, 병은 사실상 깨지지 않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즉 깨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 gerecter

산우행의 생각에는 " 새의 영혼을 끄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새는 새의 몸이 아닌 새의 영혼이 새가 아닐까요? 원래 새의 영혼은 병속에 같혀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이에 비추어 볼때 나의 영혼이 나이지 몸은 진정한 내가 아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곧 나의 영혼이고, 나의 영혼이 곧 몸이라는 것이 동양철학의 주된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naya
그러면 영혼을 꺼내면 몸이 같이 따라 나올까요? --산우행

좋습니다. 그런데, 몸도 꺼내는 방법을 상상하기 힘든데. 도대체 무슨 수로 영혼을 꺼낼 수 있을까요? -- gerecter

munikang 제 생각에는 위 문제에서 병에 갖힌 새를 꺼내라는 문제는 대승적 견지에 있어 중생구원이라고 하는 문제를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즉 병속에 갖힌 새는 중생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이에 선사의 질문은 "중생들이 미혹하여 병속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중생들을 구제하겠느냐?" 라고 묻는 것이며, 이에 대한 답은 "보살은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제도된 중생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부터 답을 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보살의 견지에서 보면 중생과 보살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즉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 이 없는 것이 바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국 이질문은 질문을 받는자가 대승을 깨쳤는지를 알아보는 공안이라고 봐야겠지요. 그에 대한 답은 "구제하였으나 구제받은 중생은 없다"입니다. 즉 중생은 자신이 병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괴로운 것일뿐 그는 단 한번도 병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를 병에서 꺼내고자 하는 자와 그 새는 같은 자 입니다. 꺼내고자 하는자 = 보살 = 중생이므로 새를 병에서 꺼내고자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이미 병 밖에 있는 자 입니다. 그런데 그 새는 꺼내고자 하는 자와 같은자이니 새는 이미 밖에 있어야 겠지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새를 꺼내고자 하는 자가 없다면, 새는 병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멋집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구원해줄 사람은 필요 없는 거군요. -- 가영

새 혼자 병밖에 있고 나머지 우주가 병안에 있는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 코지모

이 페이지는 볼 때 마다 웃느라 사람 미치게 하는 그런 함박웃음을 주는 페이지입니다.(지금도맛이간사람처럼,낄낄낄)

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새를 넣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 "새를 꺼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 옛날에 병안에 넣어서 기르는 척 하다가 바로 꺼내서 기른 거라 할 수 있지요.

따라서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지고 말았습니다."는 이 말의 해석이 결정타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병안에 있으면서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말로만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이미 병 밖으로 나와서 폴짝폴짝(어?새는이게아닌가?) 훠얼훠얼 자연을 누리며 자유를 누리며 몸집이 커졌는데, 얼마나 컸는고 하니, 그 새가 병안에 있었다면 주둥이를 통해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커졌다"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할 터이므로, '남전'이 물음을 던진 '육긍'에게 하는 말이 "벌써 나왔소"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D

--맑은

2. 깃발 공안

남에게서 들은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있는데... 정확한 스님들의 이름은 잊었습니다. 두 스님이 펄럭이는 깃발을 앞에 두고 다투다가 고승에게 누가 맞는지 물었답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인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인지? 스스로 깨우친 분들의 답이 궁금하군요.
혜능 선사는 너희들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였습니다.
기발(氣發)이나 이발(理發)을 다툴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공부 하는 것도 중요하지 만 공부를 왜 하는지를 잊지 않는게 더 중요한게 아닐까... 이렇게 해석은 안될까요? --마족

육조 혜능(慧能)이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참석했던 법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공안

1700공안중에 최고의 것은 역시 이것이죠.
문 :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 무엇이오?
답 : 이빨에 털이 났기 때문이니라.--류기정



4. 고양이 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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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절의 스님이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옆 절 스님의 다리를 분질렀다. 옆 절의 스님들이 와서 항의하자 스님들은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 싸우는 걸 본 절의 주지가 사정을 듣고 고양이와 칼을 가져 오라고 했다. 그리고 "누구든 한마디 깨달은 말을 해 보아라 만약 못하면 이 칼로 고양이 목을 치겠다." 그러나 모두들 설마 주지스님이 고양이를 죽일까? 우물쭈물 하다가 말을 못하였다. 이에 주지스님이 고양이의 목을 쳐버렸다. 그리곤 "못난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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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당신이 무어라 답해야 고양이가 살까? ---munikang


:) 별 상관없는 이야기 입니다만, 가만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무슨 고양이가 얼마나 힘이 세길래 옆 절 스님의 다리를 분지를 수 있을까요? 거대 고양이 괴물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 gerecter
계단에서 고양이에게 발을 걸렸다는군요 :)

어디인가에 비슷한 문제의 링크가 있었던 듯 합니다. "스님께서 어쨌든지 고양이를 꼭 죽일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이 틀렸다면, 스님은 고양이를 죽이지 않겠지요. 그 말이 맞다면 진실을 말했으니, 주지는 역시 고양이 목을 치면 안되지요. 물론, "말못하면 죽인다고 했지, 내가 언제 말하면 살려준다고 했느냐?" 혹은 "그건 재밌는 말일지언정 핵심 깨달음이 아니야." 한다음에, 주지가 고양이를 죽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뭐 고양이는 죽었지만, 그래도 옆에 있는 동료 승려에게 "봐, 내 깨달음이 맞잖아." 할 수 있으니, 본전은 뽑는 거지요. 뭐. -- gerecter

gerecter의 다른 대답 : 양자론유머

하지만 공안은 논리로 푸는 것이 아닙니다. 주지 스님이 원하는 것은 깨달은 대답이지 논리가 아니거든요 문제의 열쇠중 하나는 고양이를 살리는 것이지 내 말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munikang

칼 or 고양이를 뺏앗어 도망갑니다. 그냥 고양이가 죽는게 싫습니다.--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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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안에 대한 조주선사의 이야기, 흔히 "남전참묘(南泉斬猫)"라 통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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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이 낮에 고양이 죽인 일을 이야기 하며, 조주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대답할텐가?" 조주는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짚신을 머리에 이고 뒤돌아 보지도 않고 휙 나가버렸다. 남전의 말 "자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고양이가 죽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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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소리야~ 무슨 일이 있었나? 와 같은 답으로 노승의 문제를 무시하여 노승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게 만들어 처음의 고양이 죽임을 없던일로 만든거 같습니다. 위에 고양이 가지고 도망간다는 이미 문제를 문제로 인식한 경우라서 틀린 답이군요. --마족
그런진 않습니다.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문제를 인식하고서 답을 하는 거시지요 ---munikang

저는 스님을 제압한다음에 "누구든 한마디 깨달은 말을 해 보아라 만약 못하면 이 칼로 주지의 목을 치겠다." 라고 말한 뒤, 고양이를 풀어줍니다.생명의 생사여탈을 함부로 하는게 깨달은 말이라면, 그 오만함이 싫군요. --가영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양이 공안을 풀어내면, 그 고양이의 죽음이 헛된것이 아닙니다. 물론 고양이 자신은 억울하다 생각할 수있겠지만 서두요, 고양이 공안에 대한 조주의 답을 이해한다면 오만함과 같은 문제는 사라집니다. 즉 고양이를 죽인것은 주지스님이 아닙니다. 참고로 제 페이지에 고양이공안에 대한 설명을 풀어놓았습니다. ---munikang

하지만 깨달음을 얻고 대자대비함을 베푸는 것이 대승의 본 의도가 아닌가요? 살생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건 동물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보다 동물이 좀더 중요하다고 볼수는 있지만 그런 생각은 자칫 인간 중심적인 생각으로 흘러가기가 쉽지 않은가요? 물론 불교의 세계관이 이 세상은 공이라고 하는 그 부분은 공감할수 있긴 하지만. 그것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있는걸 죽인다는것은 조금 극단적인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의 깨달음을 위해서 하나씩 죽인다는건 과격하지 않은가요? -_-; 하기사 깨달은 사람의 생각을 깨닫지 않은 사람이 평하는것 자체도 우습긴 하지만... --가영

저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깨달음보다, 다툼보다 고양이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 웃는걸음

5. 해를 가린 구름 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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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하늘에 높이떠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찌 작은 구름 하나가 해를 가리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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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답하시겠습니까? ---munikang

구름은 해를 가린 것이 아니라, 다만 내 머리 위, 내 눈 앞을 가린 것일 뿐. (뭐, 사실이 그렇죠.) -- gerecter

청정한 법(세상이치)은 세상에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 구름(생각-미망)으로 청정한 법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라고 묻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gerecter님의 답은 답이 되기 어려울듯 하네요. ---munikang

굳이 그렇게 돌려 생각한다면, 역시 답도 돌려 생각해야 겠죠. 항상 세상의 이치는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다만 자아가 인식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는, 눈으로 보는 것에 치중하는 순간, 눈이 느끼고 있지 못한데 치중하며 미망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제 답을 해석해 주십시오. :) -- gerecter
이치로는 아주 적정한 해답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무엇가 확 밝아오는 느낌이 없네요. 공안의 답변에는 항상 답변하는 자가 있는데 님의 답변에는 언어가 있습니다. ---munikang

천자는 높은 곳에서 위엄있게 아래를 태평히 다스리는데, 왜 탐관오리가 백성을 피폐하게 하는가. --Nairrti

저라면 일어나서 옷을 털겠습니다. --JStrane
왜 그렇지요? ---munikang
반응이 있다면 물어본 사람이 아닐겁니다. :) --JStr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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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해를 가렸다하여 낮이 밤이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해는 머리위에 존재 한다.그런데 무엇이 세상의 이치인지는 참 어렵군요. 구름을 세상의 이치로 보고 세상의 이치를 구름으로 보면 참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겟군요. --마족

제가 이해하기로는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이치는 공인것 같습니다. 반야심경이 바로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인데 이 경전이 바로 공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제가 일찍이 우주에 대해서 이렇게 심오하게 철학적-신비적-종교적으로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경전의 이름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고 하는데 어떤 스님에 의하면 이 경전은 제목만 이해한다면 더 읽을게 없다고 하네요, 달마 조차도 이 경전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하는 크다는 뜻인데 무릇 크다는 것은 모양이 없다(왜냐면 모양은 그것 밖에 무엇이 있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색향미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 이 모든 것을 여의었다면 더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감각으로는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면 무엇보다 큰 것은 결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인식되는 것은 모두 큰것에 의존하여서 만이 인식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이라 하나 공이 아닌것이며, 색이라 하나 색이 아닌것입니다. 그러니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이른 것이라 합니다. 또한 공은 모든것에 평등합니다. 그것이 자성(스스로의 성질)이 있다면 어떤 것도 자신의 성질을 드러내지 못하겠지요 즉 빨간종이 위에 빨간색 그림은 못그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 공안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구름이 해를 가리니 해가 있음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으로는 옳은 대답의 1/10^23 도 되지 못하겠지요. ---munikang

뭔지 모르지만 복잡한 이야기 군요. 한마디로 혹세무민? --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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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해고 구름은 구름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밝다 하더라도 구름이 가리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고.결국 별개의 사물이기 때문에 해는 해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각기 사는대로 산다고 생각.
윗글에 동의표 1표. 정말 대단하십니다.
구름과 세상은 스스로가 드러낼 뿐, 그때 해가 있거나 없었을 뿐입니다. 이걸 알기까지 2년이 걸렸군요. ---munikang

음 -_-; 어쩌면 사는 이치도 그런거 같군요. 매일 지하철에서 보는 사람도 결국 각자 사는대로 살뿐이니.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처럼 미미한 영향을 줄 지언정. 그 사람들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건 아니라 생각.(물론 대기의 순환이라던가 이런걸 따지고 보면 -_-; 태양은 나오긴 하겠는데 결국 간접일 뿐이라 생각) -- 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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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양 손으로 두 눈을 가리겠습니다. --나를잊어줘

6. 공안의 성격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공안에 대한 백과사전을 만들었는데, 성철스님은 이것이 불교를 가장 크게 망친 행위라고 통렬히 비판하셨다. 하나 하나가 옛 선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주옥같은 연습문제들로, 답을 미리 알아버리면, 푸는 과정이 의미가 없어진다. 답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풀이를 하는 동안 사유하는 과정과 그 절정으로 깨닫는 순간이 중요하다. 똑같은 답을 알고 있더라도, 깨달음을 거쳐 알게 된 답과 들어서 알게 된 답은 전혀 다르다.

스즈끼 다이세쓰가 책으로 정리했으며, 이는 교토학파에 의해서 그대로 답습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문제점은 교학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데 있으니, 연습문제의 해답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오답을 제시했다는 거죠. 화두의 의미를 모르는 자의 해답이란 그럴 만도 할 법. --류기정

근데 답을 달아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답이 답같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더 멋진 답을 내려고 노력하게 될테니. 위에 소개된 "병속의 새 공안" 의 예만 해도, 새가 들어간 적이 없다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오티움

마족이 보는 공안은 이렇습니다. 과연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게 무엇인가? 문제의 시발은 어디인가?에서 문제에 접근 해야한다 봅니다. 새가 병속에 들어갔는데 그놈을 다치지않고 병도 깨지 않고 꺼내라는 노승의 문제... 과연 이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까? 바로 문제의 시발은 노승의 권위가 아닐까요? 그 권위로 넌 나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라는 명령을 내리지요. 나는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까요? 바로 그 권위에서 그 속박에서 벗어남으로서 문제가 해결 되는거 같습니다. 이미 문제가 문제가 아닌 상황 그렇지만 그게 문제가 아닐수는 없죠. 왜냐면 그 노승의 권위가 나를 압박하기 때문이죠. 그 권위를 벗어나야만 문제는 해결 됩니다. 노승의 수염을 뽑을수있는 그러한 용기가 문제를 해결(원점을 지나 초월)하게 해주는거죠.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이미 노승의 권위는 없어지고 나는 노승과 친구가 되겟죠.--마족의 잡생각.

공안을 이해함에 있어, 문제 자체를 생각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가 바로 문제의 열쇠를 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공안은 언제나 에게로 되돌아오는 물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리커시브알고리즘이지요. ---munikang


말로 할 수없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닌가요? --solver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 주어진 지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들을 통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저 내용에 찬성하는 제 의견으로는, "저 공안 한줄을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에 국한되는게 아니라 저 공안 한줄로 나의 생각들이 얼마나 아울러졌냐 하는 것도 되세겨봐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보통 영감을 얻는 것은 그것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답을 미리 알려주는 것을 위험하게 여겼던 것이구요. 마치 공업수학 답안지를 나눠주면 학생들은 그 답에 맞게 과정을 조작하게 되잖아요? 틀린만큼 배운다고, 틀린것을 알고 어디가 틀렸는지 고민을 하는 과정이 사고를 틔우는 과정이라고 생각 하는데 답을 이미 알아버리면 틀리고 싶어도 틀릴 수가 없으니...;;; 바로 구루구루가 위대한 이유죠~ -0-;;; 공안의 결과들에 대하여 열띤 토론들을 하시길래 좀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두서없이 글 적습니다. --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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