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상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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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8971843438]

최고 인기의 좌파논객 진중권이 쓴 폭력과 상스러움. 우리가 배워온 폭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 한겨레21에 연재했던 Ex libris 란의 글모음.



왕따라는 평범한 사회 현상을 평범하게 다루는 것으로 책은 시작한다. 그러나 '진중권'은 이런 평범한 이야기로 끝낼 인간이 아니다. 자유와 공동체, 국가와 민족, 지식과 법률의 힘으로 가해지는 폭력을 그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말빨로 낱낱이 파헤친다. 박노자 씨의 당신들의대한민국과 함께 좌파건 우파건 꼭 읽어봐야 할 책. 우리가 얼마나 폭력에 대해 무관심하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 당연히 B) B) B) B) B) 만점 -- 까리용
DeleteMe 은유로서의건축책을 사면서 살까말까 고민했었는데.. 사서 봐야 겠군요 ;) --지원
진중권박노자(당신들의대한민국)보다 적어도 10미터는 더 파내려갔다고 보여지는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주류 코미사르들의 사회적 압박을 온힘을 다하여 밀어내고 있습니다. 386들 다 어디로 갔나 했었는데. 흠. 부제로 붙인 엑스리브리스(Ex Libris)가 더 내용에 부합하는 제목 같군요. 그리고 그가 레토릭에 대하여 짧게 설명한 것처럼, 그의 글의 스타일은 어투까지 합쳐서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단지 너무나 해박하여 따라갈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 고생했습니다. 강추! --zetapai

이 책에서 공감하는 내용을 기초로 삶의 바이블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하이 코미디에 또 다시 브라보~ --홍차중독

그의 주장에 손을 저을 필요는 없지만, 그의 말투는 솔직히 메스껍다.. --jii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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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누군가 도둑질을 할 경우, 그가 도둑질을 통해 볼 이득보다 적발되어 받을 처벌이 더 크다는 것을 몰라서 그 짓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범법 행위는 범죄의 발생 건수에 비해 적발 건수가 늘 턱없이 적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환경 범죄라고 다르겠는가? 남들이 비싼 공해 방지 시설을 설치하여 비용을 올리고 있을 때, 나 혼자서 몰래 공해 물질을 유기하여 경쟁에서 살아남는 게 낫다고들 생각할 것이다. (p.83)

군사독재자들은 자기들에게 결여된 정통성을 창출하기 위해 집권 초에는 늘 범죄 소탕이라는 정치 쇼를 벌이곤 한다. 이는 정변으로 인해 어지러운 공동체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제의를 통해 독재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엉뚱한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들이 흘릴 피를 통해 자기들의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다. (p.111)

근본주의란 본디 <<코란>>을 읽을 줄 아는 소수의 광신도들이 글을 모르는 다수 평신도의 알라가 되는 현상. (p.112)

공동체는 동질성을 전제하고, 동질성은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의미하고, 배제는 강제를 내포하고, 강제는 인격적 혹은 비인격적 지배와 폭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p.115)

공동체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개인주의'라는 자유주의 신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은 곧 '공정'과 '선', '합의'와 '계약'의 대립이다. 자유주의는 공정한 계약만으로 사회를 구성하기에 충분하다고 보는 반면, 공동체주의는 그런 형식적 절차 외에 "공공선에 대한 합의"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공공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종종 그것은 사회 보수층들이 가진 주관적 가치관을 의미한다. 이 경우 사회의 기득권층이 자기들이 가진 사적 가치관을 "공공선"이라고 사회 전체에 강요하고, 그들의 사적 도덕이 법 위에 서는 사태가 벌어진다. 강력한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사회가 우익이든, 좌익이든, 기독교 문명이든 이슬람 문명이든 "도덕"의 이름으로 초법적인 인권탑압을 저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p.122)

즉 지나치게 급진적인 비판은 당장 가능한 개혁조차 우습게 보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현상 유지에 복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 (p.142)

사형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수가 없으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 본다. (p.153)

남이 동성을 사랑하든, 이성을 사랑하든 내가 거기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것들은 '찬성'이나 '반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이 아니다. 그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찬반을 표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해괴하고 괴상한 일이다. (p.160)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성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해석, 즉 성서의 해석을 독점하는 자가 바로 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경직된 태도로 인해 젊은이들이 목숨을 끊어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신의 뜻이 아닐 게다.(p.162)

한마디로 레드 콤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외려 빨갱이 잡는 극성스런 반공 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반공주의적 언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p.198)

차라리 신념을 가진 반공주의자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병역 기피를 한 자들, 국가 안보를 담당한 기관의 자금을 유용한 자들, 그리고 북한군과 내통을 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라. 그 짓을 저지른 자들은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여전히 살아남아 떵떵거리지 않는가. 어떻게 이들을 이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반공'이라는 네거티브한 이념조차도 한갓 허위와 위선에 불과하며, 실은 수구 기득권층의 밥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 한국의 보수주의는 이념이 아니다. 처세술이다. (p.217)

'레드 콤플렉스'라는 집단 히스테리는 결국 '가해자와의 동일시'의 결과다. 해방 후에 행해졌던 가공할 이념적 탄압과 학살은 '살아남으려면 필사적으로 가해자 집단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민중들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 각인했고, 이것이 공격적인 반공주의로 결정화된 것이다. 불행한 경험을 처리하는 이문열의 개인적 방식 속에는 한국인 전체가 현대사의 경험을 처리하는 집단적 방식이 들어 있다. 창 없는 단자가 세계를 품듯이 미시구조 안에는 거시구조가 들어와 있다. (p.327 ~ p.328)

법은 윤리의 최소한만을 규정한다. 즉 패륜의 극단적 경우에만 법이 개입한다. 따라서 법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도 윤리적으로 '해도 될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존재한다. 그것을 가르는 것이 바로 규칙이고, 그 규칙을 지킬 때 인간은 위엄을 갖게 된다. (p.247)

최근 삼성 회장이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아들에게 변칙상속을 한 것이 발각되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는 법정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다고 그게 윤리적일까? 가질 만큼 가진 자까지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산다. 여기에 바로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박성이 있다. (p.248)

우연히 국적이 같은 골프 선수의 우승을 제 일처럼 기뻐하고, 우연히 국적이 같은 야구 선수가 던지는 공 하나에 전국이 떠들썩하다.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자아실현을 하는 법이다. (p.249)

집단에 함몰되는 것은 봉건적 주체(?)의 특성이다.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쓸데없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려 달려드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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