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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자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의 글.


예전에 맑스의 <공산당선언>을 읽은 적이 있다. 크로포트킨의 글을 읽으면서 그때와 같은 가슴 벅참을 경험했다. 시대를 움직인 명문으로 꼽고 싶다. --김우재


{{|크로포트킨씨의 입론의 근거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는 말하기를 ‘사회성립은 다만 인류 협동(協同)의 사회적 본능에 의한 것이라’하였고 ‘문화 발생은 다만 몇 세기, 몇 천만 명의 이름 없는 군중의 한갓 노력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사회는 사랑과 동정심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류 협동의 의식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하였고 또 그의 말은 ‘...동물의 사회성(社會性)을 단순히 사랑과 동정심으로만 본다면 실로 동물의 보편성과 중요성을 감소시킨다.

인류의 도덕도 이러하다. 만약 단순히 사랑과 개인 동정심으로 윤리의 기초를 삼는다면 도리어 전체 도덕 감정의 의의를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웃집에 불이 남을 보면 곧 물통을 가지고 그 집으로 달아간다. 이 이웃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집이다. 이것이 결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비교적 광대하고 비교적 막연한 협동심과 사회성의 감정이 우리를 감동시킨 것이다. 동물도 역시 이러하다. 반추류(反芻類)와 야마(野馬)가 한 무리가 되어 늑대를 방어하는 것은 이것은 사랑도 아니고 진정한 동정심도 아니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사냥꾼이 그를 공격함을 방어하며 어린 고양이와 어린 양과의 장난이나 각종 작은 새가 가을날에 놀며 즐기는 이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니다. 더욱 한 종류의 노루 새끼들이 각처에 분산하여 있다가 큰 내를 건너려할 때는 모두 한 곳에 모인다. 이 역시 사랑도 아니고 동정심도 아니다.

사랑과 동정심보다 더욱 광대한 감정―곧 동물과 인류 사회 중 점점 진보하는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은 동물과 인류로 하여금 상부상조의 실천으로부터 힘을 얻게 할 수 있다. 또 그들로 하여금 사회 생활로부터 쾌락을 얻게 할 수 있다. 사랑와 동정심과 희생은 비록 우리의 도덕 감정의 발전에 큰 공헌이 있지마는 그러나 인류사회는 사랑과 동정심으로 기초를 만듦이 아니고 다만 인류의 협동의식으로 기초를 만든다. 비록 본능의 영역에만 한정돼 있지만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상부상조의 실험으로부터 나온 힘을 승인하게 되며 무의식으로 개인의 행복은 모든 타인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승인하게 되며 더욱 무의식적으로 각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개인의 권리와 자기의 권리가 동등하다고 인정케 하는 정의와 평등을 승인케 한다. 허다한 고상한 도덕 감정은 이 광대한 필연의 기초위에서 발전한다.’

크로포트킨씨의 사상은 인류의 사회는 인류의 협동적 본능이 조성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자신은 곧 전세계다. 비록 작은 세포나마 모두 ‘자치적 유기체며 자치적 유기체는 협동이며 상부상조한다.’ 고로 그는 호조(互助)를 사회 성립의 일개 중대한 요소로 보았다.“(38-40쪽,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바꾸었음) --1920년대의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잡지 『동광』(제10호, 1927년2월)에서 |}}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면서 동시에 이것이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간주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인간이 자율적이라면 아나키즘보다 좋은제도는 현재까지 없지 않을까? 참 아나키는 제도가 아닌가? --잡종
동의한표 폭발물이나 던지는 과격함으로만 포장되는 것도 문제고,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아나키즘을 이해하는 것도 문제이다.

도대체 왜 우리가 협동이라는 인류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얻은 지혜를 버리려 하는가?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유리한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경쟁의 힘이 아니라 협동의 힘이다. 치밀한 생존 전략으로서 협동은 경쟁보다 우월하다고 난 믿는다.--잡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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