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생명의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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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 신문에서..



1. 과학기술과생명의괴리 에 관한 문제제기

<!> 위에서 보면 공학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은 걸로 그리고 있다. 이에 대해서 본인은 상당히 의구심이 든다. 인간들은 한 때 과학과 기술이 모든것을 해결해 줄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살았다. 그 결과는 결국 인간 자신에게 돌아왔다. 과학기술은 항상 장미빛인가?... 위의 내용에서도 나타났듯이 인간에 무해한 농약이 생태계에는 안 좋을 수 있다. 사람이 먹고 안 죽는데 벌레라고 먹고 죽어줄리가 없지..만약에 죽는다손 치더라도 먹이사슬의 파괴일 뿐이다.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편리라는 것은 자연과의 괴리를 뜻하는 바가 크다. 물론 지금은 그 피해를 알고 해결해 나갈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궁극적으로 자연과의 친화를 바랄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자동차를 대기오염에 무해한 전기로 바꾸었다고 치자..그렇다고 도로를 안 내는 것이 아니고, 터널을 안 뚫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만드는 재료가 공해를 안 만들까? 단순히 연료에 의한 공해가 없다는 사실에만 기인하여 그걸 만드는 공장에서의 공해는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고속철이 전기를 써서 공해를 안 낸다고 해도 그 속력으로 인한 소음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방음벽이라는 것도 인간이 사는 곳 중심으로 밖에 만들지 않을 것이 뻔한데...그리고 구하는 재료는 모두 자연을 인간 입맛데로 요리하면서 나온 것이 아닌가?..모든 제품에 사용하는 재료를 자연친화적으로 바꾸는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만약 바꾼다손 치자 그것이 인간에게 해가 없지만 다른 생명에게 완전히 해가 없다고 말 할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경제성의 논리가 그것을 사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추구하는 자연친화적 기술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중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아직은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사람과의 조화는 너무도 어렵다고 본다. 인간이 편리라는 것을 추구하는 한...하지만 묶어 두기에는 인간은 자연을 관장하는 신에게서 너무도 자유롭다...아이러니하게도..이 기술이라는 것이 슬슬 인간자체를 괴리시키고 있는 우스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결국 먼 옛날 네안데르탈레인이 몽둥이를 손에 든 순간 인간은 자연과의 결별을 고한거다....--nonfiction

제6의멸종, 이타적유전자를 함께 읽어보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김우재

인간이 이렇듯 자연에 대해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것 역시도 순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해 보셨나요. 우리들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 말로 스스로를 자연에 포함된 존재로 본다기 보다는 스스로를 신적 존재로 올려 놓고 시작하는 사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을 것이 뻔한데, 더이상 기술이란 것에 기대봐야 답이 나올 수 없는 한계상황에 도달했다. 그런데 왜 사서 고생하느냐' 라는 비관적 자세보다는, 이미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인생을 즐겁게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공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아요. 그 편리한 쓰임새로 말미암아 오늘날 기술이 낳은 노이즈 속에 살고 있는 것이라면, 문제를 생산한 주체가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안해 보십니까. 자연을 살리는데 있어서 공학은 '원인제거'라는 방법적 측면에서 보자면 할일이 많고 아주 중요한 키라고 생각합니다. '복합적 원인 제거'를 위해서는 사회전체가 참여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나, 현상적으로 이미 닿아져 있는 문제인만큼은 꼭 '사회 전체'의 참여를 기다리면서 넋놓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음표만 던지는 삶보다는 부분적으로나마 느낌표를 찍을 수 삶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bullsajo

문제제기 문단이 좀 비관적으로 쓰여지긴 했지만, 의도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신"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 맹신이라는 것이 공학과 생명의 괴리를 만들어 낸 원인이 된 것이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문명이 모든것을 해결해 줄 듯이 교육을 받아 왔지만, 진정 우리의 삶과 자연에 대한 이득을 계산해 보면 얻은 편리에 대해서 잃은 자연과 정신의 숭고함은 너무나도 큰 것입니다. 인간도 일종의 생물인것이 불변의 진리일진데, 우리를 제외한 생물을에게 해로운 것이 우리에게도 좋을 것이 없겠지요. 인간의 호기심과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인만큼, 이것들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입장의 우리들로서는 스스로에게 위에 제가 처음 적었던 문단의 질문을 스스로 끊임없이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생각보다는 글이 좀 과격하게 되어버렸지만.. 사회과학쪽은 어떤 상황에 대한 이면의 탐구가 많았지만 공학은 스스로의 발전이라는 틀에 갖혀서 스스로 비판을 할 시간이 없었다는 생각이 평소에 많이 들었습니다. --nonfiction

위의 만화가 갖고 있는 몇가지 오류를 지적하자면,
  1. 궁극적인 농업기술의 미래를 기계화된 시스템, 자동화되고 지능을 갖춘 전문가시스템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농업기술 자체의 발전된 미래는 보여주지 않는다(현재의 방법론과 동일하다). 기계공학자가 농업문제를 해결하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과학은 기계공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2. 농업이 그림같은 전원생활로 바뀔 것이라 낙관하고 있다. 취미로 화단 가꾸며 정원사를 고용하지 않는한 그렇게 될 수 없다.
  3. 농사 짓기 힘들지 않게 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다. 누구나 돈 벌기 위해서는 골머리 썩히고 힘들어 한다. 농사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많은 교육과 지식, 고도의 사고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팔다리 성한 누구나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고, 경쟁사회에서 절대 많은 수익을 낼 수 없다.
  4. 경제적 가치 생산에 있어 "컴퓨터(기계)만으로 모든 것이 척척"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기계가 많은 것을 도와주면, 생산력이 높아질 뿐, 사람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더 확대되고 추상적으로 복잡해지기만 한다.
  5. 기계화되고 시스템화된 농업기술의 결과 "농촌총각"이라는 개인이 사업의 주체가 될 것이라 보고 있다. 현재 농업의 주체가 개인이나 가족인 이유는 과도한 육체적인 노동력이 필요하고, 자본이 투입되어 경제적 이득을 얻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소규모 자영농이 가능할 뿐, 기계화되고 시스템화되면 기업체가 농업의 주체가 되어 버린다.
  6. 농촌 총각이 장가 못가는 이유에 대해 "몸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접근한다. 돈을 못 벌기 때문이다. 몸이 힘들어도 돈을 많이 버는 운동선수는 장가가기 쉽다. 광고속의 박찬호는 장가가기 어려운 듯 하지만.
  7. 과학기술이 농촌총각의 장가 못가는 문제를 해결하리라 낙관하고 있다. 고도의 과학기술이 개입되려면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고, 그러면 "농촌총각"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세분화시켜 지적하자니 한두가지가 걸리는 것이 아니로군요.

Aragorn이 위 만화를 보고서 든 느낌은, 과학기술과생명의괴리 보다도, 농촌총각 문제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 농촌의 미래에 대한 잘못된 이해, 과학기술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만화를 그린 사람이, 과학과 농촌총각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죠.

일간지의 짧은 만화에 무슨 대단히 심오한 내용이 담겨있을 수가 없지만, "농촌총각"이 위 만화를 보게 되면 매우 씁쓸할 겁니다.

차라리 유통구조의 개선을 통해 지금과 같은 수준의 농산물 소비자 가격을 유지하면서 인력을 투입하여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고 고수익을 얻는 구조가 낫다고 봅니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보면, 자연친화, 환경중심의 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것을 인력에 의존해야 합니다. 인력에 의존하지 않으려니 독한 농약을 쓰게 되는 것이죠.

유기농 작물에 많은 비용을 지불할 소비자층이 형성되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농촌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인건비 싼 중국산에 절대 당해낼 수 없고, 넓은 땅(싼 땅)에 대규모로 기업화된 외국의 농작물에 당해낼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 농사짓는 농부를 선택할 수 있으려면, 농업 자체가 안정화된 시스템을 갖추어야만 됩니다. 걸핏하면 고추파동이니 무슨 파동이니하며 농작물 가격이 들쭉날쭉 거려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지금 수준에서 열심히 일하면 큰 걱정없이 먹고 살 수는 있는 환경이 되어야 그곳에 자신의 미래를 던질 수 있습니다.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불안정한 중소기업보다 안정된 대기업, 공직을 선호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른 대안이 없는 농촌총각,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농촌총각에 비해, 배우자를 찾는 여자는 매우 냉정하면서도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평생 뼈빠지게 고생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본 여자가 또다시 농촌총각에게 시집가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Aragorn

2. 과학기술의 자아비판

  • 사회과학쪽은 어떤 상황에 대한 이면의 탐구가 많았지만 공학은 스스로의 발전이라는 틀에 갖혀서 스스로 비판을 할 시간이 없었다는 생각이 평소에 많이 들었습니다.--nonfiction
  • 이면의 탐구란 것도 사실상 했다고 할 수가 없다. 현재까지는 내가 가진 기술적 측면이라는 것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하고 싶은 일로, 그 이상으로 인지하지를 못했다. --bullsajo

3. 스스로 질문하기

3.1. 누가 왜 과학기술을 맹신하게 되었는가

근대 이후로 급속도로 발전해온 과학이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준 것은 사실입니다. 과학 기술자들은 물론 그것의 산물로 물질적인 면에서 윤택한 삶을 누려온 대부분의 사람들로서는 과학을 부정할 수 없었고 또 맹신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속도와 그것을 고찰하고 진지하게 반성할 인문학적 토양의 형성 및 파급의 속도에 차이가 생기고 그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일부분에서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의 풍조가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을 위한 인문학적 토양이란 비단 학자들 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부분입니다. 과학기술의 산물이 보여주는 시각적 체험적 산물들이 쉽고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확산되는 반면, 그것을 제대로 고찰해보려는 시도나 사회적 분위기는 그 특성상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 인문학의 범주에 학문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있는(실생활에서의 연관성이 아니라) 많은 수의 사람들로서는 그 결과물을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편이 그것을 이용하기 전에 고찰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 맹신을 불러온 원인의 하나로 과학 기술에 대한 몰이해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과학 기술이 세분화되고 기술적으로 고도화되면서 (동일한 큰 범주의 학자들이 자신의 세부 연구분야가 아닌 부분은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다수의 비전공자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대상에 대한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이해해야 하는 바. 과학, 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 그것이 가져다 주는 (개인적, 사회적)이미지만으로 형성된 가치판단은 올바른 것이 되기 힘들다고 봅니다. 과학 기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 불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과학 기술에 대한 이미지는 직접적으로 과학 기술에 의해 혜택(또는 불이익)을 받았던 개인적 경험에 의해 형성됨은 물론, 개인이 속한 사회의 대상(과학 기술)에 대한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자본과 권력에 많은 영향을 받아온 매스컴으로서는 자본과 권력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과학 기술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제공해왔고, (역시, 사실 확인및 고찰보다는 그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수용하는 편이 개인적으로 훨씬 수월한 사고과정이므로) 대중이 그것을 별다른 여과 없이 받아들여왔던 것도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풍조에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비교적 과학 기술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는 전공자들(학자및 기술 연구직 종사자들)은 과학 기술에 대한 제대로된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흐름은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전공자들이 비전공자들에 비해 보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편중된 지식과 정보는 보다 확고한 사고의 오류를 가져올 수 있음을 생각해봐야합니다. 이제까지의 초등, 중등 ,고등 교육 과정에서 제공해온 지식과 정보는 대상(과학 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보다 비중있게 다루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상황은 고등교육의 방향으로 갈 수록 심각해져서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의 대부분이 그것이 주는 개인적인 재미만을 과학 활동의 동기로 삼고 과학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가치판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치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문제 야기한 원인은 다음에 첨부한 홍성욱 선생님의 글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3.2.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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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으로세상보기 '균형 잡힌' 전문가 교육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 교수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 대학 4년 동안 가르쳐야 할 내용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지난 3백~4백년간 축적된 지식은 물론 20세기에 새롭게 발전한 내용의 일부라도 학생들에게 전수하려면 4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내가 있는 토론토대에서도 대학 4년이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엔지니어를 배출하기에 턱없이 짧기 때문에 공대를 5년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공대 교수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다. 과학이나 공학 교육은 그래서 더 빡빡해진다. 전공 학점이 늘어나고 실험 실습이 길어진다. 철학과 같은 인문학 과목은커녕 인접 학과의 수업도 교양을 제외하고는 듣기 힘들다. 대학원에서는 다른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엄두도 못낸다. 나는 공대 학생들에게 과학사를 강의하는데, 내게 배정된 수업시간은 낮 12시에서 오후 1시, 즉 점심시간이다. 그 때가 학생들이 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학생들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내 수업을 듣고, 곧바로 네다섯 시간 이어지는 실험실습으로 달려간다. 배울 것이 많아졌다는 것은 과학기술이 전문화.세분화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950년대를 전후해 과학 논문 가운데, 두 명이 공동으로 쓴 논문이 한 명이 독자적으로 쓴 논문보다 많아졌다. 요즘은 두 명이 쓴 논문도 찾아보기 어렵다. 네 명이 협동연구를 통해 쓴 논문이 보통이다. 과학에서의 협동연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관심을 가진 학자들간의 학문 연구로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학문의 발전에서 다양한 분야의 방법론과 관심이 융합되는 일도 잦아진다. 환경학과 같은 학문은 과학.공학.사회과학.인문학의 '잡종' 분야다. 생물학은 생명윤리나 인간지놈계획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연구하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 점점 더 많은 접점을 만들고 있으며, 엔지니어링 프로젝트에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다. 따라서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의 교육과정에서 자신의 연구와 프로젝트가 가지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더 깊게 숙고해 볼 기회를 가지는 것이 무척 중요해진다. 과학기술의 역사, 그 사회적 영향과 이를 둘러싼 논쟁, 과학기술과 인간, 과학기술과 예술과 같은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신의 일과 전공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평가해보는 시도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모순' 이 존재한다. 기본적 전문 지식을 갖춘 과학자나 엔지니어를 만들기 위해 대학 4년간 교육해야 할 내용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대체 언제 폭넓은 소양을 위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싶다. 혹시 지금 우리의 과학.공학교육이 교수들이 배우고 싶었는데 못 배워서 안타까웠던 내용을 전부 제공하려는 '욕심' 에 근거한 것은 아닌??정보 혁명의 시대에 '스스로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 이 진정 중요하다면, 이 모든 과목이 정말 학생에게 다 필요한 것인가? 그러다 보니 사회에서 꼭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자신과 다른 생각의 근거를 이해하고 합의를 이룰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일과 전공의 의미를 세상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교육하지 못하고 학생들을 졸업시키는 것은 아닐까? '균형 잡힌'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학에 몸담은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이 위와 같은 질문을 숙고해봄으로써 발상을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의 협소한 '터널 비전'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과 이에 추가로 지급되는 비용은 결국 사회의 부담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길게 보았을 때, 균형 잡힌 전문가를 키워내는 제대로 된 교육은 우리의 '위험사회' 를 극복할 힘이다.

홍성욱 <토론토대 교수.과학기술사> o 옮긴이 :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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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행발언 <!>

I propose nonfiction to read CanSelfishnessSaveTheEnvironment It might help you. I really, really want to let you know that the science is reflecting on itself --감사

Engineering is not the science ,simply, A skill base on the science.... unfortunately....
Thank for your proposal-nonfiction

흐름님께서 제안하신 '왜 과학기술을 맹신하게 되었나?'라는 페이지도 만들어 볼만한거 같습니다.nonfiction

어쩌면 이런 고민들 자체가 하나의 교만일지도 모른다.

나는 '과학기술과생명의괴리'라는 말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연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일이란 자연의 일부분이 하는 일이 됩니다. 자연 스스로가 자신과 괴리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몇 년 들어서 지구의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빚어낸 현상이며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모두들 알다시피 지구의 역사에서 볼때 지구 전체의 기온 변동이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발생시키고 있는 이 기온 상승도 그 동안 지구의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기온 상승이나 기온 하강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겁니까. 혹자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온 상승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과거의 기온 변동들과는 구별된다고 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인공적'이라는 말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연과 대립되는 존재, 아니 구분되는 존재로 보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교만이 아닐까요? - Yeomman

예..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맞습니다. 다만 근세이후부터 자연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을 뿐이지요, 그런것을 인식하고 바꾸어 보는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 이 페이지를 연겁니다. 분명히 이때까지는 괴리가 있었습니다. 자연을 배려하고 만들어진 기술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면 말이지요..설마 플라스틱을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순수하게 자연에서 나온 소재는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다른 곳에 탈을 안 끼치고 말이죠..non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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