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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화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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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진보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활동들만을 위해서 거의 독점적으로 확보된 특별 조건이란 말인가?|}}
어째서 진보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활동들만을 위해서 거의 독점적으로 확보된 특별 조건이란 말인가?|}}
즉 왜 과학 활동 만이 예술이나 정치 이론등이 변천하는 방식과 다르게 꾸준히 전진하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는 사회과학이 과학이기는 한것인가? 하는 논쟁의 중심화두이기도 하다. 만일 발전하는 것을 모두 과학이라고 한다면, 고대와 근대 유럽에서의 회화의 발전도 과학인가? 과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과학적 발전은 여러 타분야에서의 발전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자 사회는 일단 하나의 패러다임이 안착되면 그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아니라 퍼즐풀이에 골몰함으로서 효율성을 증대시킨다.
또 한가지, 개인의 창의적인 활동이 이렇게 배타적으로 그 전문분야의 구성원들에게만 공표되고 또 그들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전문 사회는 다시 더 없다. 즉, 과학자는 사회의 유행을 빗겨난 채로 효율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최근의 인간복제에 관한 논의는 과학의 발전을 막고 있지만, 이젠 과학자도 사회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과학의 교과과정은 매우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우재는 연구를 위해 다시 찰스다윈의 논문이나 멘델의 논문을 뒤져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물론 추억으로서는 가치가 있겠지만..이러한 방법은 엄청나게 효과적이었다. 과학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미국에 의해 훨씬 빠른속도로 전진한다. 이미 풀렸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관점을 채택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이제 이러한 진보에는 방향이 (또는 목적이) 존재하는가를 정리하면서 마무리를 하자.
과학의 진보는 정말로 알고 싶은것으로의 진화인가..아니면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 인가. 찰스다윈이 고민했던 문제들로부터 토마스쿤도 힌트를 얻은 듯 한다. 다윈의 가장 깊은 고민은 창조주의자들도 일반 대중도 아니었다. 그것은 진화가 목표지향적으로 일어난다고 믿었던 스펜서나 라마르크 등의 자연철학자들이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Hebert Spencer 가 만든 말로, 다윈은 이를 사용해도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 뿐이다. 지금에서의 이야기이지만, 스펜서는 진화론을 몇십년동안 사회적 규약에 의해 속박되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나쁜 사회학자이다. (순전히 김우재의 생각이다)
과학적 진보에는 방향이 없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좀 더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찰스다윈을 이해했으면, 토마스쿤의 진리 라는 개념도 이해할 수 있다. 상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는 좀 더 가까운 진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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