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력있는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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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비판은 방외자들이 한다. 하지만 진실로 설득력있는비판은 그 본령에 있거나 혹은 있어 본 사람이 하는, 일종의 자기 반성을 포함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을 위한 비판이다.

그러나

비판은 현재의 시스템/체계/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 현재의 사회나 체계에 대해 행하는 일이다. 만약 설득력있는비판이 위의 정의처럼만 가능하다면, 정치가에 대해서는 정치의 본령에 있거나 있어보아야 하고, 리더를 비판하려면 리더의 본령에 가보아야 하고, 기득권이나 부자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본령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설득력있는비판은 자기 반성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설득력있는비판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는 꽤 좁다. 한 체계가 다양성을 유지하는 이상, 반대되는 것에 대해, 입장이 다른 사람이나 단체, 등에 대한 비판은 필수적이다. 이들이 설득력있는비판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비판하는 사람을 위한 비판', 이라는 말은 비판의 목적이 이기적이면 안된다는 것을 잘 지적하고 있으나, 비판 자체가 시스템의 기존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체를 건강하게 하는 유동성이라는 것을 빠뜨리고 있다. 나쁜 비판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비난이라고 새로 이름 붙여야 할 것이다. 이기적인 비판은, 비판의 모습을 한 비난이며, 누구의 책임이라는 것을 밝히려고한다. 좋은 비판, 설득력있는비판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되고, 개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참 아쉽다. 왜 사주추명학을 쉽게 쉽게 비판하는 사람 대부분은 사주추명학의 앞뜰은 물론 문턱도 넘어본 적이 없고(그렇다고 해서 사주추명학이 진리라는 건 아님) Functional Programming Language를 비판하는 사람은 FP의 패러다임으로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하나라도 만들어 본 적이 없으며, 위키를 쉽게 쉽게 비판하는 사람은 왜 남들에게 위키즌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키에 익숙해져 본 적이 없을까. 뚜웨이밍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이는 곧 스스로 "뭔가 더 배울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고, 동시에 구업을 짓는 것이다. 좀 더 설득력있는비판을 더 듣게 되기를, 또 나 스스로 그런 비판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김창준

설득력있는비판의 한 예는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이다. 만약 아무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만을 일삼고 있다면, 그건 비판에 맛들린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시니컬한(냉소적, 견유적) 태도는 얼핏 지적인 태도같지만, 실제로는 시니컬한 태도외에는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이라면 그것은 '비판'이 아닌 더 적당한 다른 이름이 있을 것 같다. 이른바 건설적 비판이라는 명칭이 있다. 대안이 제시되고 명확한 비판의 이유가 있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상대와 대화를 하는 것만큼 피곤하고 이른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은 또한 드물다.--Roman

김우재는 진정한 비판은 건설을 위한 전초전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비판은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설득력있는비판은 그 결과가 해체가 아닌 건설이 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판자체가 해체가 되는 역설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비판은 종종 반대를위한반대로 인식되고 무한대립을 부른다.

설득력있는비판은 그 결과가 해체가 아닌 건설이 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계(System)가 닫힌 계(Closed System)인 경우에는 위의 주장이 상당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러나,
  1. 비판의 목적이 해체인 경우에는? 예를 들어,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비판의 목적은 재벌을 건설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자는 것이다.
  2. 닫히지 않은 계에서는 해체와 건설을 구분할 수 없지 않나? 재벌해체 주장의 예의 경우, 더 큰 사회 전체의 경제시스템에서는 건설적 비판이 될 수 있다(적어도 재벌해체 주장자는 그렇게 말한다).
관점에 따라 반대를위한반대는 언제든지 건설적 반대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 Aragorn의 생각이다. 비판자에게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은 대안을 가진 비판자의 입을 함구시키는 테크닉으로 많이 쓰인다.

모든 문제제기가 답까지 준비할 수는 없죠. 물론 문제 제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비판이 될 수 있지만 대안까지 토론하는 비판보다는 약간 하급이긴 하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안이 없다고 문제제기 마저 무시해버리는 태도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timelesstime

모든 비판은 이기적 비판이 될 수밖에 없으며 -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한다면, 말없이 희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 반대를 위한 반대, 비판을 위한 비판 또한 유의미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부의 비판, 자기 반성이 더 강한 영향력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Aragorn

닫힌계의 예로 재벌해체를 드셨는데 2월화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재벌이라는 집단이 닫힌계 인가요?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특수집단일 뿐이지, 재벌이 닫힌계가 된다면, 다른 어떠한 집단이라도 닫힌계라고 칭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재벌을 닫힌계로 상정하려면, 비판도 말 그대로 자기반성, '연말 연시에는 불우이웃을 도웁시다.'나 '여행은 유럽 대도시보다는 유서깊은 그리스로마로' 정도의 비판이어야 합니다. 재벌이 닫힌계인데 '재벌해체'를 주장한다면, 이는 재벌이라는 계(system) 속에서 어떠한 정당한, 정상적인, 유효한 비판도 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풍의 언급이라면 모를까요.). 재벌 대신 '외국인 차별 심한 한국사회'나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는 인류'를 닫힌계로 놓고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될겁니다. -- 2월화

재벌해체를 닫힌계의 예로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재벌해체는 그냥 예일 뿐이고, 일반적으로 닫힌 계는 드물죠. 닫힌 계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선 반대를위한반대가 얼마든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시야를 한정시키고 그 시스템이 닫힌 계라는 전제를 적용시켜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Aragorn

닫힌계라는 부분은 제가 잘못 읽었군요. :)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반대를위한반대는 (그것이 유효하더라도) 해체와 같은 의미로 쓰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 2월화


과가 경제과라서 그런지 몰라도 선생님(교수님)들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각종 논박과 비판등이 들어오는데 선생님께서 비판에도 수준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 비판에는 애정을 가지고 하라 - 냉소나 공격적인 비판은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악에받힌 항변을 가져 옵니다. 이전에 담배 이야기 가지고 여기서 인간 말종이라는 단어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이 있었지요...그러나 애정이 있는 비판에는 상대는 겸손해 집니다.

  • 건설적인 대안을 준비하라 - 비판의 요점은 문제를 들고 그에 대한 더 나은 무엇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판의 초보이지요. 예를 들어 남이 힘들여서 기업 재무제표를 이용해서 기업 분석을 하면 요즘 재무제표를 믿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하면서 그 사람의 주장을 싸그리 무시한다든가 하는 거지요.

  • 항상 칭찬을 잊지 마라 - 이건 사소한 예의인데 우리는 그냥 앉아서 말로 쏘아대지만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한 사람은 며칠을 새면서 한 것입니다. 아무리 쓸데없는 짓을 해서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상태더라도 서두는 칭찬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 참여하라 -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토론에 약해서리 남 발표하면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러나 그러면 발표의 시너지 효과가 안나지요. 서로 비판하고 말하면서 호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timelesstime

내부에 오래 살다보면 비판의 기회를 잃게 되거나, 길들여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 다닐때의 제 모습을 돌이켜 보면, 현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비판적이었던 모습만 기억납니다. 외부에서의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값집니다. 우리가 쉽게 잊고 지나갔을 사소한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해주니까요. 받아들여 녹이고 하나로 만들면 그만입니다. 외부와 내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우재

같은 것일지라도, 기독교인에게 이슬람교인이 뭐라고 충격적인 비판을 해주는 것보다, 같은 기독교인이나 목사가 어떤 충격적인 비판을 해주는 것이 더 효과가 높지 않을까요. 잘 아는 교회 오빠가 Jesus Mysteries라는 책을 소개해 주는 것과 낯설은 무신론자가 같은 책을 소개하는 것, 어떨까요? 또 같은 기독교인이라면 상대의 처지를 좀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더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창준

네. 설득력이 더 높다는 점에서 내부의 비판은 효과적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바는 종종 자신의 좁은 전공분야의 외부로부터 개념적인 진보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는다. 는 Ernst Mayr의 이야기와 통합니다. 노스모크가 Closed System으로 남지 않으려면 외부의 비판에 귀기울이고 (비록 그것이 감정적 반발을 사고, 비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내부의 비판이 외부의 비판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부의 비판은 항상 타협점을 찾기 때문에 타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외부의 비판이 가지는 혁명성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우재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부에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동의하는 사람만이 남아있는 것이고, 비판할 거리가 있는 사람은 저절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이 노스모크의 모습입니다. 설득력이 더 있다 아니다는 것은 별 관계 없는 이야기 같군요. 무엇을 이야기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이야기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이야기했느냐가 중요하다면, 끼리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노는 것이고, 권위에 의존하고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한가지 노파심 같은 말을 덧붙인다면, 외부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이 내부라고 간주되는 사람들보다 위키를 잘 모른다, 혹은 거꾸로 내부 사람이 더 잘 안다, 이런 것은 편견입니다. 이미 더 잘 안다, 누가 더 경험이 많다 등이 의미없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개인 홈페이지에 홈페이지 분류 태그 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아무리 봐도 WikiGardening이라고 언급된 것들이 별 필요없는 집안 청소 같은데 말입니다.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상관없는 것 말입니다. 결벽증을 약간만 누그러뜨리면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Aragorn

동의한표 -- 혁희, 개인의 홈페이지는 그 개인이 활발한 활동만 한다면 충분히 미아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판자는 항상 제시자보다 유리한 입장인 것 같습니다. :)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만은...) --mus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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