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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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관용의 딜레마

"관용"은 나와 다른 남에 대한, 나와 남의 '차이'에 대한 너그러움과 포용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하고도 바람직한 덕목의 하나로 이야기된다. 또한 "관용"은 전체주의를 지양하고 "사상의 자유시장"과 같은 다원적 가치를 지향하는 민주 사회에서는 더욱 필수적인 시민의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상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이 그저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점을 CelebrationOfDifferences의 말처럼 인정하기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관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고 과연 가능한 것일까?

외국인혐오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예: KKK), 기독교 근본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Nazis, 무신론자, 극우보수주의자, 동성애자/동성애혐오자, 낙태권리주장/낙태금지주장, 사형제 지지/폐지... 등등등 서로 상치하는 많은 다양한 가치들을 전부 다 인정하는 것이 관용인가? 아니라면 그 중에 어떤 것에 대해 관용하고 어떤 것에 대해 관용하지않아야할 것인지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사회에 위협적인 가치에 대해서'라는 조건 하에 어떤 특정 가치를 금지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 반하는 모순인 것인가? 그러면 "모든" 것을 "어떠한" 이유에서건 방치하고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주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흔히들 "지사"라고 말하는 대쪽같은 사람들은 분명 특정 가치를 옹호하고 그것에 몸바치고 인생을 바쳤기 때문에 존경할 만하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반대되는 가치에 대해 "불관용"하는 정도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이래도 저래도 아무렇지않고 사회에 무관심하고 적극적으로 깊이 관여하지않는 수동적인 사람들은 "관용"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관용의딜레마...를 어케 생각해야할까. --우산


bleujin은 관용과 대쪽의 차이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관용은 자신이 피해자일때 하라고 듣는 단어이며 대쪽은 해당 행동으로 다른(혹은 나의..) 누군가 피해를 야기시키지 않기 위해 그 사람의 무언가를 희생하라는 요구이다.라고.. 즉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을 때 관용을 말하며 그 피해가 나한테 영향을 미칠것 같으면 대쪽을 이야기 합니다.

극단주의자, 근본주의자에 대해서 관용은 불가능합니다. 관용이란 말에는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내포되어 있습니다.(볼테르가 지적했듯이 말이죠.) 관용에는 적극적인 관용과 소극적인 관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질적인 상대방의 의견을 내면화 시켜 이해하려는 노력이 적극적인 관용으로,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 다름을 확인하는 것이 소극적인 관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무관심"은 소극적인 관용에 속하지 않을까요? 관용이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을 내포한다고 치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불관용을 실제로 행할 일은 거의 없을 듯 합니다. 토론 중에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만 확인해야할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토론을 매우 비생산적이라 보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서로의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오해를 줄여주는 효과를 주니까요. webtk

2. 앙가주망

우산님이 말하시는 관용똘레랑스(tolerance)란 말로 표현해도 되겠지요. 우리 사회는 똘레랑스가 부족하다는 홍세화씨의 의견에는 동의를 표합니다. 나와 다른 남을 포용하고 아울러 CelebrationOfDifferences 의 자세까지 가질 수 있다면 참 훌륭한 일이겠죠. 그러나 한 인간이 스스로의 동일성을 유지시킬 가치관을 가져야한다면 무엇을 가질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지처럼, 바람처럼은 살 수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사르트르가 말한 앙가주망(engagement)을 대안적으로 택했습니다. 앙가주망이란 어떤 가치, 이념에 대한 자유로운 헌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앙가주망을 가진 인간은 그렇지 않은 인간보다 조금 더 생산적으로, 조금 더 많은 적과 싸우며 살게 되겠지요. 참고로, 저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 만들기에 제 앙가주망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난도

흠...저도 난도님의 의견과 삶의 자세에 대해 동의하며 또 경의를 표합니다. 다만,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서 힘들뿐입니다. 그리고 특정가치를 옹호한다는 것과 반대되는 가치에 대한 불관용, 말하자면 일제시대때,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친일파에 대해서 관용적 태도를 취해야하는가하는 문제인가요? 어떤 기준이 필요하지않을까 생각됩니다만. 관용이라는 이름하에 모두를 묵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난감...--zetapai

3. 관용대상의 균질성의 문제

예들이 균질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용이라는 것은 공론장의 존재 위에 성립하는 개념이겠죠. '외국인혐오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스트, 나치' 들은 논리가 아닌 대중정서에 호소하는 집단입니다. 만일 이들이 공론장에 나선다면 관용적 태도로 토론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이들에 대해 관용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동성애자/동성애혐오자'의 경우 동성애혐오자 역시 감정의 차원에서 상대를 배제하는 집단이군요. '낙태권리주장/낙태금지주장, 사형제 지지/폐지'의 경우 사리분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인데 '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구나, 참 기쁘다'고 CelebrationOfDifferences 를 보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견해가 반드시 옳을 수만은 없다는 입장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도 경청하는 태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신론자'란 '유신론자/무신론자'의 쌍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사실 이것이 관용의 태도가 가장 잘 적용되는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을 믿는가 아닌가는 옳고 그름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믿음의 문제이고, 이 경우 우리들은 관용의 태도로 상대방의 존재를 기뻐하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삶은 많은 경우 합리가 아닌 힘에 의해 사태가 결정되기 마련이고, 이런 환경에서 관용이 설 자리는 무척 좁습니다. 그러나 관용의 태도가 단순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결국은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Khakii

그러게 말이에요, 그것들이 균질적인 게 아니어서 저도 황당하답니다(^^), 제가 위에 열거한 집단들이 사람들의 정치적 관용을 측정할 때 실지로 사용되는 집단들이어서 저는 더욱 관용의딜레마를 느끼지않을 수 없고 말이죠. (즉 그 집단들에게도 "발언과 행동의 기회/권리를 동등하게 부여해야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식으로 물어서 측정하거든요..) 저도 카키님처럼 그런 식으로 집단들이 옹호하는 가치들을 어느 정도 구분해서 "관용의 범위나 차원"을 나누어 생각하고 싶은데 왜 정치적 관용연구에서는 그런 식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극단적인 집단들에 대한 태도까지 논하는 것인지...이것이 바로 딜레마예요.^^ 요즘 제 최대의 관심사이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우산

우산님 이 부분의 공부가 어떻게 돼가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다른 분들의 의견도 더 들어보고 싶군요. 항상 부딪히게 되는 부분이어서요. 언뜻 드는 생각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치명적인 의견도 포용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건강한 사회라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하에 위험해보이는 움직임도 수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뭐가 건강한 것인지도 문제군요. 평등?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 또 건강한 사회(이 문구는 참 조잡하군요)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관용을 통해서? 아니면 분리수거를 통해서? 자꾸 꼬여만 갑니다(아마도 관용을 통해서라고 생각되는데, 이제 또다시 관용의딜레마가 문제되네요. 흑..ㅜㅜ 그러니까 묻는거죠..^^;;) --그놈

네 저도 실천적인 측면에서나 개인적인 가치와 신념 측면에서 고민스럽게도 항상 부딪히게 되는 부분이랍니다. ^^; 일단 정치학+사회심리 쪽에서 정리하고 있는, "관용"에 대한 연구전통과 그에 기반한 제 생각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볼께요:

4. 정치적 관용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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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일원적 민주주의(unitary democracy)와 적대적/경쟁적 민주주의(adversary democracy)의 철학이 존재한다고 해요. 일원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시작과 다름없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 사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교 또는 우정(friendship)" 개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평등"과 "합의," "공통의 이익," (하나더 넣자면 "직접적인 면대면 접촉"까지) 들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민주주의 방식 - 다수결 투표에 의한 의사결정 같은 것 - 의 철학을 일컫고요, 이후 르네상스 시기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태동을 계기로 시장과 개인의 이익을 옹호하고자하는 새로운 정치철학이 요구되면서 홉스 같은 이에 의해 적대적/경쟁적 민주주의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철학은 경제에서의 자유방임주의와 같이 "갈등"과 "자기이익(self-interest)"이 충돌하게 냅두자는 사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전의 일원적 민주주의가 "상호간의 공통된 합의와 존중"에서 평등을 찾았다면, 이것은 인간 "개개인의 이성에 대한 절대신뢰와 각자의 '동등한' 이익의 '보호'"에서 평등을 찾는 원리입니다.

60년대부터 정치학 분야에서 "참여적 민주주의" 쪽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실증적인 연구들 역시 일원적 민주주의에 기반한 철학을 기본전제로 깔고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 즉 면대면 대화와 토론을 통한 공동의 합의를 중시하는 직접적 민주주의에 대한 향수랄까.. - 다른 한편으론 그 "공동의 합의"라는 것이 "억압"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고 전체주의적 폭정의 성격이 있으니까 그리고도 모든 "견해"는 "반대(disagreement)"를 만남으로써 다시한번 검토되고 더욱 합리적인 것으로 연마될 수 있으므로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중요하게 요구되기도 했을 것이고..) 따라서 "다원주의" 개념은 포기될 수 없이 남아있어야했겠지요 매우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의 하나로서 말예요.

19세기 중반에 토크빌을 필두로, 바람직한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회상황이나 법과 같은 제도적인 것보다는 그 바탕의 특정원리들이 중요하다는 주장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어요, 즉 민주주의의 전제조건같은 것들이 바탕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위에 언급한 "참여적 민주주의" 연구경향에서부터 정치학자들이 결론짓기를,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태도들이 핵심적으로 중요하고, 그것은 실질적인 문제들을 논할 때의 "절차상의 규범(자유, 평등, 개인주의 등)"에 어떤 합의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답니다. (즉 게임의 법칙에 대한 동의가 전제되어야한달까..)

이에 실증연구 쪽의 학자들은 그러한 과정들을 잘 유지하는 참여적인 바람직한 정치문화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특정한 가치들을 잘 내면화하고 태도적/행동적으로 지향해야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그 특정가치들을 발견하는데 주력한 결과, 실지로 "정치적 관용"이나 "상호신뢰"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밝혀내죠. 그리고 개인들의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 등의 민주적인 가치를 잘 내면화한 사람들은 실지로 관용이나 신뢰도 높다는 관계도 밝혀내고요.

결론적으로,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보통 "정상(popular norms)"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상당히 많이 벗어난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즉 자신이 아무리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기꺼이 그 노력과 기회를 인정해주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철학이 최근엔 상당히 기본적으로 공통되게 깔려있는 것같아요.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러한 관용 역시, 각 개인이 민주적 가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내면화하였는가, 또 개인성향의 권위적인 정도, 그리고 각자가 반대세력을 얼마나 위협적으로 인식하는가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고 나뉘지만요.. 이건 또 더 깊이 들어간 문제니까..)

그러니까 "게임의 법칙"을 존중하는 정도에서의 관용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이겠죠.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정치지식은 물론 정치의식/참여가 높은데 관용의 수준 역시 교육수준과 비례한답니다. 분명한 점은, 관용성이 높다는 것이 결코 "반대되는 견해/가치/시각"에 동조하거나 감정이입까지 할 필요까지를 의미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죠. 단지, 그들도 나랑은 다르지만 그들의 견해를 피력할 기회와 권리는 인정해주자 그러고나서 평등한 상태에서 페어게임을 하자는 것인 것같아요. "사상의 자유시장"의 논리처럼 이 쓰레기 저 쓰레기 다 함께 섞여도 그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것, 가장 합리적인 것이 스스로 자연스레 드러나 궁극에는 승리하리라는 믿음같은 것이 저변에 깔려있을 것이고요. (물론 일상생활에서 이런 신념을 항상 유지하기란 우리들 개인으로선 쉽진 않은 일인 것이 분명하지만요..^^;)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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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용의 대상?: 소아성애주의

소아성애자 --> 엄..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관용해야할/혹은 하지말아야할 논의가 되고 있는 가치인가요? 그냥 도착증의 하나 아니에요? 내가 관용성이 없는 걸까..? ^^; --우산

외국에는 소아성애자 단체까지 있고, 그런 단체들의 캐치프레이즈가 "아이들도 즐길 권리가 있다"라던가..-_-;;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관용의딜레마를 다루려면 가장 극단적인 경우까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 전 pedophile을 말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 애들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인 모양이군요. 전에 어떤 애가 "미성년자성매매" 문제에 대해서 "애들을 왜 보호하냐? 걔네들도 다 권리가 있다" 머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걸 들은 적이 한번 있었는데, 그런 단체까지 있나봐요? 음..정치적 관용에 대해 실증적으로 연구할 때는 아직까지 그런 극단적인 집단에 대한 태도까진 포함을 시키고 있지않는 듯한데...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덧붙이자면, 생각해보니까 그 '소아성애주의'를 정치적 관용 측정할 때 대상으로 아직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극단적인 경우여서가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수가 힘있는 정치활동을 펼칠 만큼의 조직으로 아직은 성장하지못한 때문이지 싶네요. 정치란 어차피 뜻맞는 사람들끼리 영향력있는 이익집단들로 모여 갈등하는 것이라고 할 때 소수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고자 정치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하려면 어느 정도 겨룰 만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야하지않겠어요.. 한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다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고 또 학문적으로 관용 연구를 할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결국 "모든" 시각을 포함시켜 연구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나중에 '소아성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지면 그래서 다른 집단들처럼 힘도 좀 있어지면 그땐 또 모르겠지만요. ^^ --우산

6. 논의

관용은 '보편성'과 관계가 있고 그 보편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고 발전하는 듯.. --아무개

제가 아는 관용이란 '나와 다른 것도 인정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배웠고 또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다만 저는 이 관용도 '상호작용'이지 '무비판적인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kkk단, 외국인혐오주의자, 기독교근본주의자, 공산주의자 등등은 그 관용을 무시한 사람들이겠죠. 자신이 관용의 정신을 지키지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바란다? 웃기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틀렸다'이지, '다르다'라고 생각해 줄 필요는 없는듯 싶습니다. --김우성
kkk단, 외국인혐오주의자도 관용의 관점에서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나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침해할 때, 즉 범죄를 저지를 때 그에 대해 제재할 수 있을 뿐, 그들이 어떠한 헛소리,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더라도 그들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그에 못지 않게 나도 그들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틀렸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치적 투쟁을 통해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Aragorn
네엠, 그렇습니다. 이거 오래된 글을 보니 반갑군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들의 '편협성'에 대한 것입니다. kkk단은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그들은 나와 남이 다르다는 관용의 정신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외국인혐오주의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만. 원론자체가 '관용'의 정신을 벗어났기 때문에 전 그들에게 '관용'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정치적 투쟁을 통해 물리치는 것이 당연히 옳겠죠. 그리고 사회의 인식도 좀 바뀌어야 할 듯 싶습니다. 뭐 저도 거리를 가다가 흑인을 보면 '깜디다'라고 신기한듯 바라볼때가 있었습니다만..; --김우성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옳고 그름을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들 자기이익을 위해 필사적으로 주장하는데말이죠. 물론 어느정도 보편성이라는 것이 있고 폭력적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나쁘니까 그런 것이 발생하지않도록은 모두 조심할 일이지요. 예컨대 낙태문제만 해도 낙태권리/낙태금지 모두 각자의 정당한 논리들을 가지고 있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인데 낙태금지주의에 너무 맹신한 사람들은 낙태하는 병원을 폭파시키고 하잖아요, 그런 일은 없도록 하면서 서로 존중하면서 합리적으로 논의하면 될 것이니까요. 아라곤님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각자가 각자의 주장을 피력하는 노력을 할 자유와 기회와 권리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스스로는 자기 영역에서 열심히 노력해야할 것이라는 말씀이겠지요. 내가 생각하기에 썩어빠진 생각을 하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완전히 입다물게 억압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산
미성년자성문제는 좀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단순히 돈 몇 푼 때문에 일생에 큰 멍에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겠죠. 왜 미성년자이겠습니까? 아직 생각하는 것이 멀리 나가지 못해서 미성년자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런 미성년자 중에서도 자신의 불행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지만 자신은 애로티시즘에 빠져 살겠다..한다면 그것은 '관용'과 '자유'의 정신으로는 막을 수 없겠죠. 자기 삶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니까... --김우성
미성년자가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 사회시스템이 충분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방법이고, 그러한 상황에 이른다면 미성년자성문제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법적인 미성년자를 정신적인, 인격적인 미성년자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도덕관념, 판단력은 이미 3~4살이 되어 말을 할 때 다 형성되고, 글을 쓸 수 있게 될 쯤에는 독립된 인격으로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의 미성년자는 사실 경제적인 능력을 기준으로 나눈 것에 불과합니다. 사회에서 경쟁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 과정 도중에는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미성년으로서 법적인 권리와 의무가 제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통념에서도 나이와는 별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독립했느냐 여부가 어른 대접을 제대로 받느냐를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Aragorn


musiki의 학교 사회학 교수인 윤원근은 동감의사회학을 강조한다. 인간사회에서 자연스러운 보편적 동감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동감은 유연하나 끊어지지 않는다. 관용은 무한하지 않다. 이 동감의 범위 하에서만 허용되는 관용일 것이다. --musiki
그런데 그 선생님이 주장하신 바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동감"과 "관용"은 좀 많이 다른 것같습니다. "관용"은 다양한 관점과 가치의 존재를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정이지 어떤 특정 견해에 반드시 "동감(sympathy or agreement)"하거나 "(감정)이입(empathy)"할 것을 전제하지는 않거든요. --우산

동감이 허용하지 않는 범위까지의 관용을 사실상 인류사회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100%동감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감은 유연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유연성이 관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관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그 동감의 끈을 끊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식문화에 있어 개나 혐오식품을 먹는 것은 문화의 차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관용할 수 있으나 식인종마저 문화의 차이로 관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감과 관용이 같은 개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관용의 허용범위는 동감의 끈이 유지되는 범위라고 하겠습니다. --mus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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