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위한기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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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1. 보다 빨리, 보다 많이, 보다 복잡하게


현대 사회는 과학과 기술이 과거 종교의 위치를 대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과학기술 중심의 사회에서는 특히, 복잡한 것과 세련된 것은 서로 항등식을 이룬다. 이것보다 저것이 좀 더 복잡한 기술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면 당연히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더 멋지고 또 더 편리한 것이다.

이런 "高度" 기술 우선주의 덕분에 어제의 기술적 쾌거가 오늘날의 장난감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1969년 인류 과학기술의 이정표로 남은 아폴로 달 탐사선에 들어간 롬(ROM)의 용량은 48KB였지만, 오늘날의 웬만한 아동용 고급 전자장난감에도 256KB가 넘는 롬이 탑재된다. 1985년도에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크레이-2 슈퍼 컴퓨터의 연산 속도(초당 10억 번의 부동 소수점 연산 능력)는 요즘 홀대받는 구형 데스크탑 컴퓨터의 수준일 뿐이다. 1991년 우주 왕복선에 내장된 컴퓨터의 속도는 요즘 메르세데스 벤쯔 S-500에 내장되는 컴퓨터의 100분의 1 속도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빠르고, 더 큰 용량의 새 컴퓨터 모델이 나오면 실질적 필요성 없이 일단 구형 컴퓨터를 갈아치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기계를 대표하는 숫자 자리수가 제공하는 가상적인 富에 흐뭇해 한다. "내 컴퓨터가 1GHz인데, 이건 요즘 최신 기종이라구. 저것보다는 3배 이상 빠르지..." 모 방송 시트콤에서 본 이런 장면이 생각난다. "제가 새로 산 디지탈 카메라 좀 보세요! CCD 해상도가 1174x884 픽셀이에요! 대단하지 않아요?"/"으응... 멋지군. 근데 그게 무슨 뜻이지?"/"저도 잘 몰라요."

우리는 이러한 복잡성(혹은 표면적 단순성과 편의로 위장된 복잡성)에 경도된 채, 그것들이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게, 그리고 우리 자신을 좀 더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아무래도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자전거를 가진 사람보다 더 자유로울 것이며, 핸드폰을 가진 사람이 호출기를 가진 사람보다 더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진보하고 복잡한 기술일 수록 우리 자신을 옥죄고 종속케 하는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혹시 자신을 핸드폰의 노예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핸드폰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에게 우리가 "쓰임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진 않았는가. 복잡한 기계를 사서 사용하다가 문득, 괜히 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그 기계가 안겨주는 총 스트레스의 양이, 단순히 자신의 나태함을 보완해 주는 약간의 편리함보다 적을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복고적 감상주의를 읊으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 이런 기계와 기술을 사용하면 보다 잘 살 수(live better) 있을까. 기억용량과 속도의 100배가 실질적인 100배 가치를 의미하는가.

어떤 기술에 대한 평가는 이 기술이 과거의 것보다 더 복잡하고 구현에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얼마나 더 가치 있게 해 줄 수 있는 지로 평가되어야 한다. 기술 자체를 위한 기술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삶을 위한, 삶의 발전을 위한 기술이어야 한다.

2. 자동성과 유연성


모든 기술은 기본적으로 자동성*을 통한 편리를 추구한다. 하지만 어떤 시스템 하에서건, 자동성이 강조되면 으레 유연성*과 능동성은 무시되기 쉽다. 자동성을 통한 "완전성"의 추구는 결국 공백이 결여된 건축물을 생산해낼 뿐이다. 그 자체로 완벽한 집은 거주자가 들어설 여지를 없애며 외부존재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들어가서 함께 어우러질 공간이 있는 집이어야 한다. 훌륭한 디자인은 절대 완전하지 않다. 완전한 것은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그 안으로 스며 들어설 여지가 있는 디자인, 그 빔(虛)의 부족함이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 필자는 여기서 자동성을 한가지 일(task)을 할 때 얼마나 적은 개념적 단계를 거치느냐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 자동성은 사용자 없는 도구가 가지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사용자와 도구로 이루어지는 전체 시스템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 해당 시스템(도구+사용자)이 초기에 목적으로 하는 작업 외에 얼마나 다양한 작업을 쉽게 할 수 있는가, 새로운 차원의 문제상황에도 알맞게 적응하며 새로운 쓸모를 창출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개념. 이때의 작업은 우리 삶에서 실존적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용자와 사용되어지는 도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았을 때, 그 도구가 자동성은 높지만 유연성이 낮은 경우, 양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스템은 어떤 새로운 창발도 가져오지 못하며, 낮은 유연성으로 조만간 도태되고 폐기되어진다. 자동성이 높다는 허울아래 器的 성질이 강한, 즉 어느 한쪽으로의 쓰임을 강요하는 하이테크 제품일 수록 그 생명주기가 짧을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복잡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생명주기가 짧고, 원시적이고 단순한 것들이 더 오래 간다는 점이다. 여기서 원시적이고 단순한 것이란, 반기술주의를 말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유연성과 능동성이 높으며 사용주체에게 자율성을 주는 기술을 말한다.

반면, 자동성이 낮고 유연성이 높은 시스템에서는 참여 개체들이 똑똑해질 여지가 많고 또 이렇게 되게끔 자극한다. 시스템 전체의 共進化*(coevolution)를 촉발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만의 문화와 패턴을 형성하고 공유할 수 있게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사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동성의 결여를 보충하게끔 스스로 똑똑해지도록 지속적인 요청을 한다. 이것은 전체 시스템의 유연함과 자율성,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다.

  • 이 진화의 전제 조건은 객체 각각의 자율성(autonomy)과 상호소통(intercommunication)의 자유로움의 보장이다

고자동성은 곧 부패를 의미한다*. 현재의 틀에 종속되고 고정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 하에서 시스템은 우선 군더더기와도 같은 유연성을 배제하고(따라서 자율성도 사라진다), 나중에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 집합이 형성되었을 때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스템 전체의 파국을 가져온다. 결국, 저자동·고유연 시스템에서 각 주체가 능동적이고 지능적인 사용을 통해 자동성을 내재화 하고, 또 새로운 차원의 자동성을 창조하여 고자동·고유연을 획득하며, 유연성이 감소한 경우에는 다시 새로운 조직화를 통해 높은 수준의 유연성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앞에 밝혔듯이 필자가 자동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3. 白紙의 위대함


하이테크의 반의어를 LowTech라고 한다. 워드프로세서를 하이테크라고 한다면, 종이와 필기구는 분명히 LowTech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 백 년을 손상 없이 견뎌내는 전통 한지의 "기술"이 워드프로세서의 그것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그 유연성이라는 면을 생각해보자. 종이와 필기구로 해낼 수 있는 일은 현재 수준의 워드프로세서가 하는 일보다 훨씬 다양하다 -- 현재의 워드프로세서는 그 디자이너가 의도한 방향으로만 사용된다. 분명히 워드프로세서가 더 편리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의 워드 프로세서는 사용하는 사람과 함께 적응하여 다양한 쓸모를 창출하는 유연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그런 워드프로세서를 소프트웨어(무른모)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는 (특히 생산자는)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동시에 (소비자에게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소비주체의 입장에서는 생산자가 틀 지어 놓은 세상을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예외는 없다.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실존이다. 문제는 생산자가 소비자의 게으름과 작당하여, 지극히 고형적이고 한정적인 건축물만 제공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비록 고자동 고유연 제품이라고 할지라도 경제성에 의해 유연성은 자동성과 거래되어진다. 하지만, 종이는 그런 제약이 비교적 적다. 비유하자면 줄쳐진 노트와 공백의 연습장으로 볼 수 있다. 줄쳐진 노트는 사람의 생각을 한 쪽으로 몬다. 아무래도 그 노트를 쓰는 사람은 직선적인 필기를 하기 쉽고, 따라서 사고도 한 방향으로 틀 지워지기 쉽다. 반면, 공백 연습장은 그야말로 자유롭다. 원한다면 줄을 그어서(비록 수고스럽기는 하더라도) 줄친 노트처럼 쓸 수도 있다.

정보화니, 고도 기술이니 하는 미명 하에 사람들은 자신을 강요한다. 이런 강박 관념 속에서 자신이 불편하다는 사실도 감지하지 못한다. 자기최면 상태에 빠진 것이다. 간단히 손으로 그리면 될 것을, 불편한 오피스웨어로 온갖 묘책을 짜내느라 시간은 시간대로, 정력은 정력대로 소모한다. 같은 발표를 하더라도, 손으로 그린 것이 컴퓨터의 정해진 빵틀로 찍어낸 도형들 보다 훨씬 전달력이 강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인다. "왜 컴퓨터 놔두고 이런 전근대적인 방법을 쓰나요? 다시 하세요."

4. 인터넷을 꿈꾸다


인터넷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런 세상을 꿈꾼 것은 인류 역사에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그런 세상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시공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의사소통하고 일종의 집합적지성이 가능한 세상이었다. 인터넷 선구자로 꼽히는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 테드 넬슨(Ted Nelson),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등이 꿈꾸었던 인터넷은 현재의 시장과 정부의 합작에 의해 끌려 다니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상호작용적(interactive)이고 어떤 개인에 의해 컨트롤되지 않는 자유와 참여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가? 텔레비젼이나 신문 등에 비해 상호작용성이 훨씬 더 높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터넷은 상호소통의 대명사가 되어있지만, 오히려 인간 개개인을 단절시키고 골방에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게다가, 인터넷에서 흔해 빠진 게시판을 제외하고, 그 상호작용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 설사 게시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한 의사소통을 지원하고 있는가? 나의 글은 영원히 나의 글일 뿐이고, 남의 글은 남의 글일 뿐이다. 교각이 존재하지 않는 섬이다.

5. 두 종류의 사회


세상은 크게 보아 두 종류의 기본적 사회관의 조합에 의해 구성된다. 비관주의적 사회관과 낙관주의적 사회관이 그것이다. 전자가 법치 사회라면 후자는 덕치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전자를 불신에 기반한 사회라면 후자는 믿음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양자 모두 그 순수한 형태로는 실존하지 못한다. 인간은 어차피 성선이니 성악이니 하는 단순 이분법적 구도로는 설명하기 힘든 존재니까.

필자는 발전한 사회일 수록 외부적인 조율보다는 개체의 내부적 자율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생각하기에 성문화된 법체계를 갖춘 사회가 더 발전된 형태라고 말하기 쉽지만, 그보다 더 발전된 것이 암묵적인 문화 공유를 통한 질서 유지, 혹은 자율성과 윤리성에 의존하며 규칙을 내재화한 사회가 더 세련되고 격조 있는 사회가 아닐까 한다.

see also TrustVsLegalism

6. 모두가 주인인 세상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사상가요, 달인으로 존경을 받는 워드 커닝엄(WardCunningham)이라는 사람은 1994년 처음으로 사용자간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협동작업을 도와줄 웹 사이트를 만들게 된다. 그는 그것을 위키위키(Wikiwiki 하와이어로 '빨리빨리'라는 의미)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말하는 LowTech 저자동고유연성 시스템의 한가지 예이다. 기본적으로 이 위키위키는 모든 사용자가 아무런 제한 없이 웹 페이지를 만들고, 지우고, 수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집단에서 파워라는 것은 제한과 배제에서 오지만, 이곳의 파워는 자유와 참여에서 온다. 정치에서 말하는 파워(권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배제와 제한, 배타적 소유에서 온다. 남이 갖지 못하는 것을 내가 갖는데서 오는 차별적 파워라는 것이 정치 권력의, 나아가서 정치 자체의 성립 요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웹 공동체에서도 이런 식의 배타적 파워가 주도적이다. 손님이 존재하고, 이들은 무료 회원과 구분되며, 또 그 위에 유료회원이 있고, 마지막엔 웹 마스터 혹은 관리자라고 하는 최고 권력자가 존재한다. 회원은 남이 쓴 글에 대해 수정이나 삭제 권한이 없다. 이런 제약에서부터 오히려 자신의 글에 대한 권리와 파워가 생긴다.
하지만 위키의 경우는 다르다. 모든 것이 자유롭고, 모두가 동등하며, 어떠한 물리적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다(실질적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보다 무형적으로 일종의 문화나 암묵적 합의로서 존재한다). 남이 내 글을 고치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영을 하는 것이 위키위키 문화이다. 예컨대, 위키위키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경우에는, "위키위키"라는 페이지를 만들고 그곳에 "위키위키는 새로운 협동 시스템이다"는 식으로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한 두 문장 긁적거려 두기만 한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 뒤에 해당 페이지를 재방문하게 되면 진화한 자신의 글을 보고 놀랄 것이다. 다른 사용자들이 좀더 정확하고 폭 넓은 정보로 수정해준 덕택이다.

쉽게는, 커다란 화이트 보드를 생각하면 된다. 형사 영화 같은 것을 보면 경찰서 내에 커다란 칠판 하나가 있다. 거기에 각종 정보를 휘갈기기도 하고 덕지덕지 붙이기도 하면서,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모아온 정보를 그곳에 자유로이 옮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게 되고, 사건과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아! 범인은 외팔이야!" 같은 해답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현재 그나마 사용되고 있는 인터넷 상의 상호작용 체계는 그것이 이메일이건, 게시판이건, 유즈넷이건 모든 글이 개별적으로 분절된 채 저장된다. 이것은 종합적인 사고를 하는데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7. 진화하는 텍스트


더욱 큰 문제는 그런 글들이 체계화된 지식으로 축적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단순히 정보의 파편들만 무수히 모아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지식이 되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위키의 경우 관리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든 토픽과 토픽 간에, 페이지 간에 서로 링크 걸기가 쉽고, 자유롭다. 또 기존의 페이지를 마음대로 어떤 양식으로든 수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글 자체가 진화를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논의를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경우 최초로 그 주제를 꺼내는 사람은 "한국의 경제 상황"이라는 이름의 페이지를 만들고 간단하게 여는 글(Opening Statement라고 한다)을 몇 줄 적어 둔다. 그러면 다른 사용자들이 그 페이지를 보고 자신의 생각을 "그 페이지 안에" 추가한다. 조금 후에는 격렬한 토론이 진행될 것이다. 이를 위키에서는 토론모드(Discussion Mode)에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후에는 모종의 합의가 보이거나 안정화 단계로 접어든다. 그만큼 그 글을 수정하거나 추가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면 이 때 어떤 사람이 글 구조조정(Refactoring이라고 한다)을 한다. 물론 그 역시 임의의 사용자일 뿐이다. 해당 페이지의 요약판을 간략하게 추려내서 지저분한 논의들을 정리하는 것이다(기존 게시판의 경우 어떤 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글들을 다 읽어봐야만 비로소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특히 그런 경우 주장이 엎치락뒤치락 하기 마련이며 결국 모든 글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때 그 글은 문서모드(Document Mode)가 된다. 이러한 지식 구조를 매우 손쉽게 그리고 동적으로 유연하게 再改編 할 수 있다는 것이 위키만의 큰 미덕이다. 게시판에서는 주요한 안건일지라도 날짜만 조금 지나면 다른 글 속에 묻혀서 몇 페이지 넘어가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버리기 일수인데 -- 동일한 게시판에서 비슷한 질문이 수십번 반복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 위키에서는, 예컨대 건축 관련 페이지에서 논의가 진행되다가 "사무실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서너줄 이상 늘어나면 그 즉시 "사무실의 디자인"이라는 제목의 새 페이지를 만들어서 링크를 연결할 수 있다. 물론, "아무나". 그리고 이 새로운 페이지는 기존 여타의 페이지들과 단어나 어구 단위로 링크가 되어서 그야말로 그물망의 일부가 된다. 한마디로 "공동의 마인드맵"을 그려 나가는 셈이다. 진화하는 맵.

8. 중우정치의 우려


대부분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이런 위키위키의 아이디어를 듣자 마자, 성공할 수 없는 이상적인 시스템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쉽다. 쉽게 생각하기엔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 버릴 것 같지만 이제까지 대부분의 위키위키들은 정 반대로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성공적인 공동의 칠판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아무래도 "누구나" 고칠 수 있다는 점 --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해킹을 했다고 해서 영웅이 되진 못하므로 -- 과 기존 내용의 높은 질과 수준, 참가자들의 올바른 비판의식 등이 그야 말로 "개나 소"로 하여금 사이트를 엉망으로 만들게 유혹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마도,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하는데서 오는 사춘기적 쾌감의 부재 때문인지, 아니면 고급스럽고 분위기 있으며 격조 높아 보이는 장소 -- 위키는 그 본질 때문인지 신호 대 잡음 비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고밀도 정보의 집합체다 -- 에는 취객들도 행동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무언의 압박감 같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워드 커닝엄이 열은 오리지널 위키 사이트는 몇 년간을 수 백, 수 천 명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며 상호간의 암묵적 합의와 자생적 문화 속에 지속적으로 그 '지식망'을 진화해 왔다. 참여자들의 자율적 비판의식에 의존하면서도, 꼭 그것을 전제하는 것만은 아니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기만 하면 참여자들 스스로 그런 자율성을 길러 전체적 자정기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을 조성해 줄 "자발적 초기 기여자"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 Buckminster Fuller, "Reform the environment, stop trying to reform the people. They will reform themselves if the environment is right."

9.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어떤 사람이 벽에 그림을 걸려고 한다. 그는 망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몇 시간에 걸쳐 집안 샅샅이 망치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사실 그의 앞에는 뺀찌가 있었다. 그걸로도 충분히 벽에 그림을 걸 수 있었다. 자신의 문제를 "망치를 찾아야 한다"로 잘못 한정했기 때문이다. 기술이라는 레인을 달리는 경주마가 되지 말자. 우리가 도대체 왜 그렇게 기술에 노력을 하는지를 생각하자. 기술을 위한 기술에 현혹되어 자동성으로 우리 자신을 마비시키지 말고, 우리 자신을, 자율성을 찾아야 한다.

인공지능 분야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마빈 민스키(MarvinMinsky) 박사가 DougEngelbart와 했던 대화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마빈 민스키가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 시스템을 엥겔바르트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멋지지 않은가? 얘는 아주 똑똑한 놈이라구."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엥겔바르트가 대답했다.

"난 컴퓨터를 똑똑하게 만드는 것보다 인간을 똑똑하게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다네."

--김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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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기사는 당시에 국수집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분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그자리에서 그냥 받아적으셨고 나중에 확인없이 기사를 내셨습니다. 제가 했던(혹은 하려고 했던) 말은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았을까 합니다.

"호주 퍼쓰(Perth) 근방에서는 별도의 기차표 확인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표를 갖고 있다 싶으면 그냥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타면 됩니다. 표를 넣고 확인하는 기계 조차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가끔씩 경찰 몇 명이 기차에 탑승을 해서 좌악 훑어나가는 작업을 하죠 --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고생을 합니다. 하지만 늘 표를 갖고 타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시스템이죠. 그냥 달려 들어가서 차에 올라타면 되니까요.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사회 시스템이 "무임 승차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디자인 된 것이 아니고, 유임 승차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 표를 사고 승차할 것이다"라는 긍정적 가정을 중심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는 것이죠. 위키도 이와 비슷합니다. 남의 글을 모조리 삭제하는 해킹을 중심으로 시스템이 디자인 된 것이 아니고, "아마도 사람들은 위키를 잘 이용할 것이다"라는 가정을 중심으로 디자인 되었고, 실제로 사람들은 그 가정대로 편리하게 잘 사용을 하더라, 뭐 이런 거죠."

물론 호주 퍼쓰에서 그런 시스템이 가능한(혹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인구 밀도라든가, 문화적 차이 등 여러 요소가 있긴 하겠죠. 하지만 그런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내 수영장 여기저기에 옷이며 소지품을 특별히 지키는 사람 없이 방치해 놓은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호주에서도 비교적 드문 장면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제게는 어떤 깨달음을 줬거든요. 즉, 우리의 사회란 것은 소수의 "A의 여집합"을 중심으로 디자인된 것은 아닐까, 만약 "A 집합"을 중심으로 디자인된다면 어떨까,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여러가지 화두를 얻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를위한기술인가의 "두 종류의 사회"에서 상술하고 있습니다.

--김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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