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말하는enjoy의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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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y Sophisticated Capitalizm Society

Some people say that we are facing the end of the world. Murakami Haruki usually says "Highly Sophisticated Capitalizm Society" in his short story. How could we endure our agony in this bush? Haruki said "Enjoy Your Life!". The meaning of 'enjoy' is quitely different from the usual definition of the word at the moment. First, please realize you are real human beings. Secondly, kindly sympathize the principal points of human beings. Thirdly, clearly understand what drives our world to the end of the world. --Roman

하루키의 글들에 나타난 Highly Sophisticated Capitalizm Society 에서 Enjoy의 의미에 대한 고찰

고도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는 하루키의 글에 대해서

서론, 하루키 문학, 독자와 비평가들의 거울과도 같은 작품
하루키를 어떻게 읽던지, 그것은 각자가 자신이 경험이나 정보로 만들어온 부분에 갖다 맞추면 묘하게 잘 들어맞는, 마치 자신의 생각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라, 솔직히 '누가' 난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얘기하면, 묘하게 상처입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문학사상사에서 펴낸, 본격 하루키 평론들을 보거나 곳곳에 띄워져 있는 서평들을 읽다보면, 과연 하루키는 누구지? 뭐라 말하기가 곤란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정통 연애소설로서 노르웨이의숲의 캐릭터들이 일련의 극적 요소를 증폭시키기 위해서, 적절히 배치되고, 사람들에게 매력을 납득시킬 수 있을만큼 아가자기하게 짜여졌다는 면을 강조하고, 누군가는 '헛간을태우다'같은 단편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이고, 언어학적인 면을 부각해서, 디지털 언어의 사용에 대한 예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김난주같은이는 인간의 원형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근원의 우물 속으로부터 뭔가를 퍼오는 작품이다라는 보통은 그 분들이 속해 있는 일련의 그룹들의 성향이나 경향, 습속에 호응하는 해석들을 내어놓고 있다.

평론은 때로, 작품의 가치를 심하게 오독하곤 한다. 작품이 요새를 남부 마을 깊숙한 곳에 초라하게 놓아두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나바론의 요새처럼, 절경이 어우러진 섬에, 매커니즘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보다 화려한 위치에 떡하니 멋지게 놓아두었다라고도 하고, 솔직히는 견고한 합금을 걸쳐서, 섬세한 매커니즘과 유려한 상징, 비유, 은유 속에 심오한 의미와 더불어 놓아두었음에도, 뒷집 마당에 개집처럼 내놓은 것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마도 최적의 평가가 무엇인지를 모른체, 그의 책을 읽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호함을 모호함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러의미에서 하루키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80년대 정도의 정통적인 문학인들에게나, 하루키 이전의 한국 소설의 경향을 보자면, 한국 정통 소설가나 작가들이 처음으로 하루키의 책들을 들어 읽었다면, '뭐, 이렇게 쓰레기같은 작품'이 다 있지? 하는 생각들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속에는 솔직히, 위대한 사상이나, 위대한 삶의 가르침, 인생관, 세계관들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너에게나를보낸다"를 보자면, 그것은 '읽을거리'라는 표현을 갖는 작품에 보다 가깝다. 작가 자신도, 이 책이 위대한 '예술작품'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기피한다. 순문학으로서의 새로운 시도,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의 유희적 측면이 새롭게 부각된 소설로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볍고, 대중적이고 감성적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하루키 작품의 일부만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문학이 비추고 있는 것은, 고도산업자본주의에 대해서 비꼬고 약간은 조롱하면서, 인간이라는 것이 원래 얼마나 더 즐겁게 살 필요가 있는 동물인가의 측면이다. 물론, 이것은 일부 몇명, 또는 다수의 생각이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거울에 반사되듯이 비추어지고 있는 측면에 불과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고도자본주의 사회로의 일본사회가 진입하는 부분에 대한 하루키 작품들의 비유적 설명
양을둘러싼모험,바람의노래를들어라, 1973년의핀볼에서 우리는 하루키의 작품이 고도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고난 뒤의 일본, 그속의 젊은이들 그리고, 일본사회가 고도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기까지의 내용들이 일련의 우화와도 같은 얘기들과 더불어 소개되고 있다.

쥐와 "나"는 이 사회 속에서, 솔직히 무엇을 해야하는지, 또는 비판하고, 열렬히 저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어떤 종류의 의식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에서 보다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의욕따위 그들에겐 전혀 없다. 마치, 성공의 욕구따위가 완전히 거세된 것 같다. 그 이유는 여러각도에서 소개된다. "나"는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평범한 가족이었고, 매일같이 아버지의 구두를 닦았던 것이 가족생활의 언급된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쥐의 경우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일련의 자본가, 이른바 부자이다. 질나쁜 상품을 만들어서, 전후 일본 사회에 무작위로 팔아먹고, 그 이후에 보다 확장되어서, 사람들이 무슨 피해를 보건 말건 상관없이, 공장을 짓고, 소비자들에게,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품을 팔아 계속해서 '부'를 늘려간다. '쥐'는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이나 계급, 부유한 환경자체를 긍정했다면, "나"와 맥주나 계속해서 들이키고, 왠지 아무 의욕없는 듯한 나날을 보내며, 일탈일뿐인 소설나부랭이나 쓰면서, 소설속의 일상을 지속해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존재규명의 유희와도 같은 강박적으로 숫자세는 모습(전화밸소리,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갖가지 행위가 벌어진 것의 수치를 계속해서 파악하는 것)들은,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규명이 그정도를 통해서나 어느정도 감잡히게 되는 젊음. 어떤 의미에서는 비극적으로 왜소화해버린, 고도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인간형, 또는 어중간한선인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1973년의핀볼은 자본주의 메커니즘 속에 갇혀서, 핀볼게임같은 시스템 속에서 얻는 유희속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보다 확장되는 꿈을 갖고 사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마치, 요요처럼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일정 이상의 가능성은 더가질 수 없도록, 그자신 어느정도 벗어났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금 이끄는 상황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소비하는 기계, 중독되는 기계, 그리고 부속으로서 적절히 가공되어야 하는 시스템 속에 들어와 있는 소설 속의 모두를 보고 있다. 이 고도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 소설 속에 내재화 되지 않는, 주로 유럽소설의 뿌리들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의미심장한 주제들을 다루는 작품들은 화려한 꿈을 자주 꾸고, 그 스케일은 점점 커지며,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과, 인간의 지적 변혁에 대한 강렬한 열망, 인간 고유의 부분에 대한 사고, 사유, 이른바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 포커스를 맞추지만, 실로, 하루키의 소설은 그 위대한 작업들로부터 조금은 멀어져 있다. 그것은 보다 평범한 위치나 사고의 소유자들이, 이 사회속에서 분명한 현상으로 겪는 일들에, 소소한 일상사에 그 포커스를 마추고 있다. 유럽적이라기 보다는 미국적이다. 소설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이 밀란쿤데라사유하는존재의아름다움에 나와 있는대로 존재하고 있다면, 하루키의 소설은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미국 소설"이라는 줄기에 속해 있다.

문화의 향유, 도시의 기호화, 서로를 쓰다듬는 섹스

하루키 글들에는 멋진 문화의 양식들이 다채롭게, 그렇지만, 절제력 있게 등장한다. 수많은 팝송들과 재즈, 그리고, 때때로 클래식, 멋진 음식을 먹기도 하고, 때때로 사치스러운 짓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이 시대의 도시 속에서,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즐거움의 가능한 양태들을 줄기차게 말해주고 있다. 문화는 그 자체에 봉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통해서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감동을 체험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보다 자연스럽게, 솔직하게 느끼도록 이끌어준다. 미국문화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과도 가끔 맞닥뜨리곤 하게 되는데, 솔직히, 그런 모습들은, 그의 소설들 속에서는, 부지불식간에 망가지게 된다. 우리가 미국인이라도, 보다 관심을 끌고, 매력을 느끼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한국의 것이건, 일본의 것이건, 솔직히 즐길 수 있는 인간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반복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도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복잡한 기계의 일부인 부속으로서 끝까지 살아가게 되는 것은, 일하지 않는 자는 밥을 굶어야 하고, 게으름은 빈궁을 불러들이니 죽어라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는 강박적인 주입에 의한 것일 수 있다. 하루키의 글은 그러나 즐길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것이 멋진 감각으로 자신에게 스며들어오게끔 말한다.

갖가지의 브랜드 이름, 음료수, 술이름, 차이름, 가게 이름. 전통적인 글쓰기에 따르자면, 쓸데없는 것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화를 내면서, '이런 쓸데 없는 것들을 쓰라고 글이란게 있는게 아니야!'라고 외쳤지만, 하루키의 글들의 대중적 성공은 그런 말들을 무색하다는 듯이 쓸어가 버린다. 그것들을 즐기고 구입하고 사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인식 속에 얼마나 많은 상품의 브랜드가 많은 의미의 기호가 되어서 들어차 있는가를 토한 음식을 보면서 낮에 먹은 음식을 살피고 있는 주정뱅이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처럼, 자세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보다 편안한 기호로서, 우리들의 눈에 보여지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끈다.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는 바로 우리의 진실이다. 이 사회 속에서, 그러나 무엇이 자신을 소비하도록 이끄는가에 대한 약간의 사색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하루키는 놓아두지 않는다. '차는 페라리, 시계는 롤렉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점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모두를 똑같아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커피 체인점을 보면서, 똑같은 규격의 찻집이 전세계나 전국의 어디라도 존재하는 그 맥빠지고, 모두를 균일한 모습으로 만들고 있는 역학들을 가만히, 점잖게 조롱하고 있다. 우리에게 즐거움은, 백로처럼 되는 것도, 보다 고상한 왕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보다, 정성이 있고, 보다 즐거움이 있는 자리에 우리자신으로서 온전히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원하는 규격품 속에서 헤메이며, 사회 속에 파묻혀 버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도록 만든다. 저항감없이, 서서히 나는 책을 읽으면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결국에는 죽는다. 사라진다. 그것도, 일정하게 아주 먼거리에 있던 죽음이 찾아와서 죽는게 아니라 단 1초 후에라도 죽을 수가 있다. 그 사라짐을 팽팽하다싶을 정도의 긴장감으로, 진심으로 내부에 받아들일 수 있는, 또한 누구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란 결국 그 섹스라는 것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의미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금세라도 사라질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경의이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관계로서의 섹스, 그리고, 타인의 의미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미의 섹스나, 아무런 고려가 없는 섹스는 그의 글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속에 묘사되어 있는 것들을 읽다보면, 섹스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추잡스럽다는 느낌은 오히려 저멀리로 사라져버린다. 묘사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를 그는 중시하고 있다. 내가 진심으로 이 삶의 한복판에서 어느덧 사라져버릴 수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이 거대한 자본과 매커니즘의 도시에서, 서로를 아낌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규명하는 존재임을 더더욱 드러내는 의미로서의 관계, 커뮤니케이션의 너무도 인간적인 방식,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멈추지 않는 주제의 변주
하루키는 태엽감는새를 통해서 좀 더 사회적이고도 본질적인 주제, 또는 사회 속으로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주제를 다루고자 하였으나,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아닌 침묵으로 꽤 긴 시간 멈추어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그의 작가적 생명이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니냐라는 판단을 내려버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언더그라운드와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해버린 신변잡기 푸트니크의연인들을 넘어서서, 해변의카프카로 적어도 한국에선 다시금 자신을 향한 독자들의 관심에 부응하였다. 15세의 의미는 무엇인가, 터질듯한 에너지의 응축과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사회의 힘과 무게에 미칠듯한 진통을 겪는 나이이자, 자신의 세계 이해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커다랗게 열리는 나이인가? 아니면, 그다지 순수하지 못한 세계화 불합리로 점철된 기성세대가 다시금 반복해주는 불합리적인 질서가 뻔히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인가? 아니면, 진정한 삶의 질서를 깨닫고,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그 질서의 위로 차츰차츰 올라가는 작업에 몰입하도록 이끄는 시기인가?

Roman은 하루키가 태엽감는새에서 본격적으로 말하지 못했던 내용인 자기자신의 아버지되기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느꼈다. 생활 윤리건 정치윤리이건 우리의 눈앞에서 어느새 저곳으로 사라져버리고, 전통의 도덕적 덕목들이 맹렬하게 무너지는 시대에, 이제 남아 있는 개개인들에게 남겨진 것은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 세상에 맞는 윤리를 자기 자신을 통해서 만들어 내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는 말을 다시금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를 맺는 스토리가 살리고 있는 인간 본연의 성숙의 신화, 그리고 성욕 없이 고집 세게 자신의 무지와 더불어 형성된 윤리를 지켜가는 이면적인 또 다른 인물의 모습은 스토리의 어디에서도 합치되지 않지만, 이 두 인물의 모습이 바로 소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성숙에 대한 자극"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의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통해서 찾아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 미약하지만, 즐거운 소설의 진행이 끝나면서 작은 소리로 들려온 메세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훈계나 경구 같은 것이 아니어서, 더더욱 내부에 진득하니 오래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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