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장, 박광수. 그의 밑에서 일할 뻔 했던 여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랫사람들을 개 부리듯 하는 개입니다. 일에서도 생활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그의 만화에서 나오는 좋은 생각들은 상당수 나우누리 등이 출처였습니다. 암튼 초기 박광수 작품에 느꼈던 감동들이 작가 자신을 알아갈 수록 배신감으로 변했던.. --godai
1. 주장들 ¶
'틀리다'와 '다르다'는 다른 단어인데 틀리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틀리다가 다르다를 대체하는 것은 그럴만한 의미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같지 않다는 점'에 틀리다는 주목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같지 않다는 점'에 틀리다는 주목한다.
단어의 변칙적 사용은 그 쓰임이 규칙적이며 광범위할 때, 암묵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그 쓰임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공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언어의 변천과정이다.)
그러나 '틀리다'가 '다르다'를 대체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르다'가 '틀리다'를 대체하는 경우는 없다. 예를들어, "나와 너는 다르다"를 "나와 너는 틀리다"로 바꿔쓰는 사람은 있어도 "이 문제 틀렸다"를 "이 문제 달랐다."라고 바꿔 쓰는 사람은 없다. 왜일까? -- 쓴귤
그것은 '다르다'를 대체하는 '틀리다'의 용법이 대략 말해서 '같지 않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경우에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미장, 이를테면 '다른 사람 없어?'는 '틀리다'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아말감
우리말을 영어의 단어와 비교해서 내용을 확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잘못된 문제입니다. 틀리다가 Different와 wrong이라는 뜻을 둘 다 갖고 있고, 다르다를 wrong에 한정하고 생각하면서 이런 토론이 되는군요. 영어의 뜻을 배제하고 토론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개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단어적 의미보다는 위에 있는 광수생각의 내용처럼 "자신의 것과 다른 것은 틀린 것인가"의 문제로 보는게 좋을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개개인의 차이에 대한 관용 뭐 이런 폼나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좋다/싫다"는 감정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 케니
"틀리다"는 "맞다"에 상대되는 말이고, "다르다"는 "같다"와 상대되는 말인 점으로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가치판단의 문제 ¶
다르다는 것은 상이함의 자각이라 보여지지만 틀리다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는게 아닐까?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보는 사고는 혹 우리 속에 숨은 파시즘은 아닐까?
(과거와 달리) 틀리다가 다르다와 혼용되어 사용되는 점을 말하는 것이고, 물론 양자가 일대일 치환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진 않는다. 사전우선주의고 뭐고 간에 원래 틀리다와 다르다는 분명 달랐고, 어떻게 하다보니 틀리다를 다르다 대용으로 쓰게도 되었는데, 이게 우리의 파쇼의식이 만들어 낸 것인지, 혹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라도) 더욱 파쇼적이 되게끔 만들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어찌되었건 뭔가 경사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나, "틀림"을 무의식적으로 wrong으로(혹은 "맞지/바르지 않음") 인식하는 언어대중이 아직까지는 대다수인 이 시점에서.
참고로 시오노나나미는 다신교란 자기가 믿지않는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했다.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다른 신을 틀렸다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zetapai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다른 신을 틀렸다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zetapai
틀리다는 가치함축적인 언어이다. 나와 내가 아닌 존재 사이의 가치의 밀도를 달리하여 보는 시각이 그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 선과 악, 공정과 불공정, 합법과 불법등과 같은 규범적인 가치관이 강화된 사고에서 이런 식의 언어사용은 강화된다고 한다. 물론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가릴 수 있는 수학이나 기하학 체계에서는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 다르다식의 언어는 당연히 상호존중적인 혹은 권력이 분산된 그리고 규범적 가치관이 상당히 와해된 형태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그 사용빈도가 많아진다고 한다. 굳이 소쉬르의 예를 이끌어오지 않더라도, 언어와 사회는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Nestor
2.1. 가치가 포함된 말과 그렇지 않은 말 ¶
다르다의 반대말은 '같다' 이고, 틀리다의 반대말은 '맞다(옳다)' 이다. 과연 같지않다다는 말은 가치중립적이고, 맞지않다는 말은 가치함축적일까? 물론 양자간의 정도(가치함축도?)의 차이는 인정하고 던지는 질문이다... -LedZeppelin
2.2. 언어공동체에서의 쓰임새 ¶
실제로 그것이 사전적인 정의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차이를 확연히 구분해서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맞지 않다에는 사전적인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르다에는 집단적으로 사용되고 개인들이 포함시키는 가치판단이 들어있을 경우가 많지 않을까? 사전적인 정의는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언어공동체에서 그렇게 쓰이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fin
2.4. 일본어에서 '다르다' ¶
일본어에서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는다. 두 경우에 모두 같은 단어(違う, ちがう, 치가우)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틀리다'보다는 '다르다'에 가깝다. 실제로 일영사전에서 찾아보니 'differ from'이 가장 먼저 나오고 'be wrong'은 가장 뒤에 나왔다. 그런데 어째선지 우리나라에서는 이 '違う'를 번역할 때, '다르다'라고 하는 경우보다 '틀리다'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이응준
gerecter는 다르다와 틀리다에 대한 혼돈 이,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고정관념보다는, 단순히 일본어의 영향에 따른 혼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르다'의 품사는 형용사, '틀리다'의 품사는 동사. 유의할 것은 일본어 'ちがう'도 동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용사를 써야 할 곳에 동사 '틀리다'를 사용할 수도 있는 경우는 대부분 '다르다'를 '틀리다'가 대체한다. 하지만, 평균적인 국어 실력을 가진 사람이 봤을 때 형용사를 쓰는 것이 너무도 명백한 경우에는 아직도 '틀리다' 대신 '다르다'를 쓴다. 이것은 분명 일본어 동사인 'ちがう'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이 일본어 단어가 국어 용법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식민지 시절을 보낸 영향보다는 최근의 젊은 세대에 일본 문화가 침투한 영향이 훨씬 크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Lbird
2.5. 역사적 관점에서 ¶
틀린 것은 다른 것이 되었다. 절대권력의 시대, 가치판단의 기준은 절대적 기준. 이 시대에는 '다르다'보다 '틀리다'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다르다'는 쓰였다. 이 시대에 틀린 것은 '가치판단'이고 다른 것은 '가'와'나'이다. 민중권력.민주권력의 시대, 권력의 힘이 약한 만큼 가치판단의 기준 자체도 점점 줄어들고, 이전에 이미 있던 기준을 내 세울 때 조차도 'OrICouldBeWrong'이 항상 따라 붙는다. 바로 다양성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틀리다'보다 '다르다'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이전 시대로부터의 과도기에는 과거의 언어습관으로 인해 '다르다'가 '틀리다'로 잘못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틀리다'는 쓰인다. 이 시대에 틀린 것은 '해답이 정해진 문제에 대해 제출한 답이 틀린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다른 것이다. 심지어 가치판단과 윤리문제에 대한 의견 등에서 모두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다. '다르다'가 자주 쓰이면서 '틀리다'로 잘못 쓰인 경우들이 옛날에 비해 눈에 잘 띄었던 모양이다. 옛날 같으면 그냥 넘어가 버렸을 것들도 꼭 꼬집고 넘어간다.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 라고 하며.
틀린 것이 많던 그 시절이 다른 것이 많은 이 시절에 비해 사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 같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날아가 살아 본다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혀를 마구 굴리다가 사약을 받아 들고서 한다는 말이 이러겠지. "수월한 삶이 다 좋은 건 아니구나, 흑흑흑"
점점 사라져 가는 "틀린 것"들. 다른 것들만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이제 "상대방을 설득하고 여러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 "뭬야?"라며 상대방을 혼구녕낼 만한 가치란 것도 결국 함께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회초리, 즉 어른들의 독재수단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렇듯 그 뜻이 퇴색해 버린 회초리를 쓰려다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상처를 입고 떠나간 일이 있었다. 양자 모두 안타깝기 그지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그래도 되는' 어른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아이도 없다. 온라인에서는 똑 같이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노스모크에서도 말 한마디 할 때가 그렇게 조심스러웠고 어떤 때는 뜻하지 않게 어줍잖게 '판단'을 하게 된 것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꾸짖을 사람도 없고 꾸짖을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이런 세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모두가 한 번쯤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뭔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다양성을 지향하다보면 분명 그런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꾸짖을 사람이 없다면 과연 무엇에 기대고 살아야 할까. 맑은이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숙제로 남겨놓고 넘어가자.
맑은이는 어린일까 어른일까 노인일까, 과연 누가 그것을 알까. 모르기에 제멋대로일 수도 있겠지만, 모르기에 서로가 서로를 편견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온라인커뮤니티가 우리들에게 주는 기회이다.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나 모든 편견들을 훌훌 벗어던져야만 한다. 어? 나만 그러면 되는 건가? 앗, 곁가지를 경계하며 계속 써 내려가자.
그렇다. 지금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에 산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겨우 태동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 든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이런 좋은 날에 그런 시대가 온 줄도 모르고 과거를 답습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정부부문에서는 군대와 공무원들의 세계가 그러하고, 민간부문에서는 깡패조직이 대표적 잔재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절대권력의 시대를 접고, 세습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나라의 일꾼을 뽑고, 왕권이 아니라 민권을 위한 일꾼이 되길 소망했던 현대사도, 군부독재가 종식될 때까지는 여전히 절대권력의 시대였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군부독재를 끝장 냈다 하여 곧바로 민주와 다양성의 시대로 달려갈 수가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왜일까? 그 다음 시대가 먼저 태동해야 하고, 그 다음 시대로 달리려면 먼저 걸어야 하니까. '태동'은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시대에 걸맞는 최소한의 법제들이 잘 다듬어졌는가를 보는 것이고, '걸음마'는 상대방을 존중하며 토론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고, '달리기'는 그 바탕 위에서 부딪힘을 매끄럽게 아름답게 훌륭하게 해결하며 공존의 가치를 높여 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중에서 꿈틀거리는 태동기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역시도 이분법으로 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는 다양한 온라인커뮤니티에서 '꿈틀 거리며 동시에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상태라고 본다. OrICouldBeWrong
그러기에 우리들의 말과 글들이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고 불완전한 것이 많겠는가? 옳고 그르고 틀리고 맞고 그런 얘기가 아니다. 감정의 기복을 제어할 능력들이 그 만큼 넉넉치 못할 것이기에 글에서도 대부분의 심정들은 나타나게 마련인데, 앞서 부족한 글이라 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약간의 부딪힘이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부딪힘에 노출된 당사자가 그가 누군든 간에 당사자들은 극단적 반응을 자제하며 훌륭하게 마인드컬트롤을 마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어떤 이는 맑은이의 이 말이 너무도 답답하고 짜증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끌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면 부딪힘을, 부딪힘에 대한 반응들에, 울그락불그락 하며 달려 들거나 마음에 상처를 얻어 다시는 쳐다 보기 싫은 상대로 낙인 찍거나, 그런 가슴 아픈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소망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슬기롭게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노스모크가 거듭날 수 있기를.
선의 폭력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폭력이면 이미 악인데 선이 행하는 폭력이 있을 수가 있나? 그건 모순이다. 그렇다, 이 말을 쓰고 있는 맑은이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쓰는 이것이 처음인 말이다. 그것은 다양성의 시대에만 그 뜻이 존재할 수 있다. 다양성의 시대가 아니라면 '선의 폭력'이란 말 자체는 성립할 수가 없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휴머니즘이라 하여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마음에 두고 하는 모든 일이 '선'일 때는 문제가 없으나 의도하지 않게 '악'이 되었을 때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매장을 하는 순간에조차도 그것이 악인지를 모른다. 다만, 매장당한 사람이 더 이상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외로울까를 느낄 때, 비로소 모두를 위한 선한 행동이라 했던 것이 악이었음을 폭력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악의 존재를 어찌 선을 행하는 처음부터 알 수 있겠는가. '결과로서 최악'인 것이다. 한 쪽의 선을 위해 다른 한 쪽을 희생시키는 것이기에, 선한 색의 안경을 끼고 있는 한 절대 악의 존재를 눈치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선의 폭력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노스모크에서조차도 여러번 경험했다. 영화『Minority Report(소수의견)』를 보면, 선이 행하는 폭력의 극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그런 것이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는 안 되지, 감탄을 연발하는 영화다. 그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일반적인 음모론적 전개이다. 거기서 음모를 빼고 보면 감독이 주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 음모가 없었다 해도 그런 극단의 모습은 단순한 선의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영화에 나오는 범죄예방시스템은 금단의 꿈이었고 선의 폭력이었다. 범죄예방시스템은 많은 사람들을 범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저지르는 합법적이고 극안한 범죄였다는 걸 알 수가 있다. 다름을다름으로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위정자들에게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하기'는 너무도 익숙하였기에 잉태된 슬픈 현실이었다는 것. 모든 걸 한 가지로 재단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 속에서 비롯된 결과였다는 것.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데 익숙해질 수 있는 가치관과 그 습관들의 확산을 통해서만 그러한 '위하는 것이니 괜찮다는 식의' 무모한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는 것. 영화가 끝날 때 쯤 보여지는 평온한 삶의 모습, 세상의 불완전한 질서가 주는 안도감.
나는 정말 수도 없이 깨닫는다, 인간을배제한논리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인간을 위한다는 논리가 결국은 인간을 가두고 말 것이라는 걸.
그 깨달음이 다르다와틀리다와 무슨 상관이 있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지점, 좋은 것이 좋다는 바로 그 지점, 다시 말해 악에 대항할 때뿐만이 아니라 뭔가 지극히 선한 것이 나를 유혹하고 그 선한 길로 내가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곳에 '너무 획일화 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물음표를 꼭 던져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글의 시작에 '역사적 관점에서'라는 토를 달아 놓았는데, 각 시대의 윤리적 관점과 그 흐름을 본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시대에는 윤리적 관점에서의 '틀리다/맞다'는 그 자체로 참으로 위험한 것 같다.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획일화'로 치닫게 마련이라는 것. '선의 폭력'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나니까 '절대 선'의 존재는 간단히 부정되고 만다. 안타깝다, 그러면 도무지 어디에 기대고 살아야 할까? 기댈 생각말고 똑 바로 서서 살라고? 아이고 다리 아파라. 아이고 허리 아파라. 그래도 기댈 곳이 한 군데쯤은 있어야, 고단한 생을 조금이라도 쉬어가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댈 곳이, 딱 한 군데 있긴 하다. 그 곳은 바로 물음표. 물음표에 기대어 살라고? 기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원성이 마구 들려온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맑은이가 그 딜레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물음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물음표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이 바람직하지 못해 보일 때에도 "그렇게 하면 안 돼." 라기보다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그렇지 않니? 내 생각은 이런데 니 생각은 그래?" 라고 하면 참 듣기도 좋을 것 같고, 듣는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양손에 들고 번갈아 보니, 자신이 마치 상대방과 같은 무게로 존중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들뜬 기분이 몇 달은 갈 것만 같다. 그런 타이름은 한 번을 들어도 백 번을 들은듯, 귀에 쏙 들어 올 것만 같다. 귀에 들어온 것이 있으니, 내 것과 둘을 같이 펼쳐 놓고 이른바 생각이란 걸 하게 될 것만 같다. 같은 이치로 "틀리다? 맞다?, 옳다? 그르다?, 나쁘다? 좋다?, 악하다? 선하다?, 뭐? 왜? 그래?" 모든 곳에 물음표를 던져 보자. 이 물음표가 다르다와틀리다를 알게 하고 나의 행동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 믿는다.
칭찬? 그건 난 잘 모르겠다. 나는 칭찬을 들어본 적도 있고 매를 맞아본 적도 있다. 매를 맺았을 때의 기분이라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칭찬을 들었을 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무엇이 필요할 때에 필요한 그것을 했을 뿐인데 그 상황에다 대고 칭찬을 한다는 것이 썩 이치에 맞는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았었다. 그에 비하면 존중의 느낌은 백팔십도 다르다. 칭찬은 타인에게 한 번 더 칭찬받고 싶은 욕망만 낳을 뿐이었지만 존중? 그것은 타인에 대한 집착을 떨치고 기대도 떨치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해야'할 것만 같은 생각, 어찌보면 "어른이 되라!"라는 무슨 특명과도 같은 신호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칭찬과 존중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맑은이는 그렇게 느꼈다.
칭찬과 존중?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물음표 없이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매사에 물음표를 남발하며 살아보자. 그러다보면 물음표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싶은 때도 닥쳐올 것이다. 그런 때가 오면 다양성의 시대에 걸맞는 공존의 가치를 한 층 더 쌓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말과 글은 시소를 탄다. 처음에는 말이 글이 되었지만, 말에 감정이 실리면 그 때는 글로서 말을 다듬게 된다. 물음표와 마침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음표를 던지다 보면 언젠가 마침표가 나올 것이다. 한 번 끌어낸 마침표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또 다시 물음표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에서 시소를 타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겠는가? 사실, 마침표는 꼭 내가 찍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물음표만 찍어도 내 삶을 다하기가 버겁기만 하다. (어? 마침표다)
물음표는 다른 것이고 마침표는 틀린 것이다 ?
물음표는 물은 것이므로 틀리지 않는다. 물음표는 틀림없이(???) 다양성을 넓혀가는 아주 좋은 수단이고, 마침표는 틀리게 됩니다. 물음표를 정돈하여 한 시대의 상식 즉 마침표를 만들어가고 또 다른 물음표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면 그 많은 물음표들은 또 하나의 컨센서스로 마침표를 만들어내고 이전의 마침표는 이젠 틀리게 되는 것이다. (2015년 말에 간신히 이어붙임)
--맑은 2005.11.30(수) 처음쓰고, 2009.3.24(화) 끝말을 맺으려다 끝말이 또 흐리멍텅해져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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