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과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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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이란? 희생이란? 희생이란것도 (거룩한 의미의)자기 만족을 위한 행위는 아닐까? 진정한 희생이란것이 존재할까?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자신의 욕구가 그로하여금 희생하게 하는것은 아닌가? 그것이 희생일까 아닐까?


누군가를 동정해야 하는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위해 나를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는가? 이러한 감정의 반응 정도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이 크게 바뀐다.

지하철에서 '전 어렸을 적' 으로 시작하는 종이를 돌리는 사람, 찬송가를 틀어 놓고 막대기에 의지해서 걸어가는 앞 못보는 사람, 지하철 입구 계단 한모퉁이에 깡통 하나 혹은 두손을 벌리고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 길바닥을 기어다니며 구걸을 하고 있는 몸이 썩어들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술집에 들어와 껌이나 초콜렛을 파는 할머니, 주로 횡단 보도에세 마주치는 모금함을 내미는 사람.... 도대체 돈을 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준다면 얼마나 줘야 하는가?

달동네에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 도시락도 싸가지 못해서 물로 배를 채우는 아이들, 아무 소리 못하고 회사에서 잘려 나가야 하는 사람들, 손가락이 잘리고 월급을 받지 못해도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불법체류자...도대체 어디까지 반응해야 하고 어디까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지금 이 시간에도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폭력, 강간을 당하는 사람들, 전쟁에 동원되고 죽어가는 사람들...도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관여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은 자신에게 최대한의 선의와 노력을 베풀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느낍니다. 묵자처럼 겸애의 극한에 다다르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이 아닌 이상은 그래야겠지요. 자신에게 지워진 의무를 게을리하면서 남을 돕겠다고 함은 어리석음이라고 봅니다. 모든 것에 관여해야겠다는 슈퍼맨의 마음가짐보다는 자신한명이라고 남에게 바람직한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이른바 '못하다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끈을 놓으면 안되겠지요.. 자하도 원래 굉장히 차갑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 느낌이 타인에 비교해서 많다적다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겠지요. 저의 경우에는 강증산선생의 행적에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면서 어떤 길로 가야할지 길을 잡았습니다. 남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상으로 저는 선생을 섬기는 것이지요. 인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불교학에서도 인연론은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인간은 악해서 악한게 아니라 선한 인연이 떨어지면 악한 것입니다. 천제(闡提)는 선연이 끊어져서 지옥으로 밖에 갈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문이나 성문 등도 인연론에 의해서 생겨난 개념이지요. 보살행도 다생의 업의 영향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선(좋음)을 베풀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자하

지하철 출구 계단에 어떤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난 마침 그곳을 지나갔고 할머니는 두손을 벌리고 계셨다. 내 주머니에는 마침 몇개의 동전이 있었고 난 손에 잡히는 만큼 할머니의 두손에 담아 드렸다.
내 주머니에 동전이 없었다면 지갑을 열어서 지폐를 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이 할머니가 아니라 아저씨였다면 난 동전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손을 벌리고 계시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동전을 드리고 나서 이 행위는 나의 만족을 위한 가식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마음속에 어느 정도 만족감이 생긴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가식이 아닌지 헷갈림에 빠지면서 걱정하기도 한다.

남을 돕는 마음이 진실된 마음인지 가식인지는 개인마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헷갈림의 상태에 있다.
남을 돕는 데에 시간을 분배하는 정도도 개개인마다 다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남을 돕는 것의 선악과 효용성 등에 대한 가치관의 형성은 그 사람의 성장 배경과 큰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정도도 관련이 있다. 그 이득이 눈앞의 이득인지 잠재적인 이득인지 파악하는 지적 능력과도 관련이 있다. 물론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의 가치관과도 큰 연관이 있다.

한편 동정과 희생은 이기적이타주의에서 진화해온 감정인 것 같고 그 진화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다. 대부분의 감정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정된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헷갈림의 상태에서 어설픈 결정을 내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주 조그만 관심의 부족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내가 배불러하며 배가 나오지 않았나 걱정하고 있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가는 사람이 있고 내가 이불 속에서 조금 더 자려고 뒹굴거리고 있을 때 하루 종일 쓰레기 더미를 뒤져야 겨우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100여명이 폭탄에 사망한 것이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도 하고 뉴스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된 사람 역시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귀찮아하며 일부러 못본척하려고 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일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일까?

왜 사람들은 툭하면 부정적인 어떤 것을 인간의 본성과 연결지으려고만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학적 이성이기 때문에? 인간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갖는 의미는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상은 아니란 말인가? 인간의 본성을 운운하는 어법은 매끄러운 외양 아래 음험한 무언가를 감추고 있지는 않은가? 그 결론이 반성이 아니라 본성이 되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반성의 문제가 아닐까?

동정안의 희생이 있다. 동정없는 희생도 없다.

희생은 헌신을 바치는 대상으로 하여금 자기의 목적에 복종시키려는 뛰어난 간계는 아닐까?

아홉살짜리 꼬마가 다섯살짜리 동생을 구하기 기찻길로 뛰어들어, 놀이에 정신이 팔린 동생을 기찻길밖으로 밀쳐내고, 자신은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한 경우, 그는 '희생'이란 개념조차 몰랐을거다. 이는 인류를 위해 이 한목숨 바치는 거룩한 그무엇도 아닌, 순수한 의미의 희생으로 비쳐진다. 희생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순간 이는 고도의 거룩한 간계가 되는건 아닌지.


이 두 개념을 따로 떼어놨을 때에도 각각의 개념들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지요.

아말감이 '동정'에 대해 생각나는 두 사람은 니체와 보들레르다. 보들레르는 <빠리의 우울>에서 동정을 구하는 거지를 두들겨패며 싸움을 걸고, 그렇게 그 사람과 동등해지고, 그렇기에 자기의 주머니를 털러 반을 갈라 나누어주고 헤어지는 <나>를 등장시킨다. see also 가난뱅이를때리자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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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언어들은 모두가 <동정>이란 단어를 'com-'(역주:함께라는 뜻)이라는 전철과, 원래는 <참고 견딤>이라는 의미였던 'passio'라는 단어로 만들었다. 다른 언어들, 예컨데 체코어, 폴란드어, 스웨덴어 등은 이 개념을 하나의 명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함께>라는 의미의 전철과 <감정>이라는 단어로 구성되는 명사이다(체코어: sou-cit; 폴란드어:wsdol-ucucie, 스웨덴어: med-kansla).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언어들에서 이 'compassio'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냉정하게 어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볼 수 없다. 혹은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한다. 대개 이와 동일한 뜻을 지닌 다른 말 (프랑스어: pitie', 영어;pity, 이태리어: pieta` 등)에는 뿐만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관대한 마음씨 같은 여운이 모름지기 깔려있다. Avoir de la pitie' pour une femme는 <우리는 이 여인보다 입장이 낫다, 우리는 이 여인을 굽어본다, 우리는 자신을 낮춘다> 를 뜻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동정>이란 말은 불신을 야기시킨다. 그것은 사랑과는 그다지 많은 관련이 없는, 부차적으로 느껴지는 좋지않은 감정을 표현한다. 누구를 동정하여 사랑한다고 함은 그를 진정하게 사랑하지 아니함을 일컫는다.

이 말을 <참고 견딤>이라는 뿌리로부터가 아니고 <감정>이라는 명사에서 만들고 있는 언어들에서도 이 말은 대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부차적인 좋지 않은 감정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말의 어원이 지닌 신비한 힘이 이 말을 다른 빛을 띠도록 하며, 그것에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함께 하는 감정> 이란 어원의 '동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함께 체험한다는 것, 꼭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쁨, 두려움, 행복, 고통 등. 이러한 동정(soucit,wspoluczucie,medkansla 등)은 따라서 감정적 표상력의 극치를, 감정 텔레파시의 기법을 표현한다. 감정 체계에서 그것은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테레사가 자기 손톱밑을 바늘로 찌르는 꿈을 꾸었을 때 이는 그녀가 몰래 토마스의 서랍을 샅샅이 뒤졌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다른 여자가 그렇게 했던들 그는 그녀와 더이상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테레사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말했다. <나를 쫓아 버려요!> 하고. 그러나 그는 그녀를 쫓아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두 손을 잡고 그녀 손가락 끝에 키스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 순간 스스로가 그녀 손톱끝의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녀의 손가락 신경이 직접 그의 뇌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느낌을 함께 하는 이 <동정>의 저주스런 능력을 갖지 못한 자는 테레사의 태도를 오로지 냉담하게만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은 신성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왕래했던 편지들을 넣어둔 서랍은 남이 열지 않는다. 그러나 <동정>은 토마스의 숙명이(혹은 저주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자기 책상의 열려진 서랍에 무릎을 꿇고 사비나가 쓴 글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듯 여겨졌다. 그는 테레사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오히려 더욱더 사랑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송동준역, 민음사, pp3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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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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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공동번역 신약성서: 고린토 전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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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나 가톨릭 계통에 몸담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희생'이라는 단어가 낯설지않아 익숙할 것이다. 더욱이 크리스찬 종교단체에서 모종의 봉사활동이나 공동체활동을 경험하다 보면, 자주 이 '희생'이라는 개념과 이와 관련된 행동양식, 사고방식과 맞닥뜨리게 된다...Felix는 오래전에 가톨릭 청년단체에서 몇해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느끼고 체험한 것들로 인해 희생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러니 일지 모르지만 어떤 일을 베푸는 사람이 그것을 '희생'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멍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었다. 활동을 하는 와중에 보통은,외부나 내부의 압력에 의해서, 자신이 기쁘지 않아도 또는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참고 견딜수록 그것이 더욱더 신이 보시기에 기쁜 것이다...라는 생각이 암암리에 사람들을 압박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종 '하늘에 쌓는 보화'라는 식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식의 희생정신은 개개인의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마음에서 우러나고 기뻐서, 손해니 뭐니 하는 생각, 앞으로 돌아올 결과 등이 끼어들 틈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진정한 행위라는 생각. ('희생'이라는 단어자체가 주는 피해자적 느낌이 맘에 들지 않아서 행위라고 써보았다.) 아마 예수도 그런 기쁨을 일러 <산상수훈>을 설교하셨을 것이다. 나 자신도 살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인데,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소위 '희생자의식'을 가질 때 그 모든 선행들은 오염되어가는 것 같다.

흐름에게 있어서 봉사활동은 희생의 개념과는 멀다. 그것은 지극히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며, 그 근본엔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동기가 있을 뿐이다. 흐름이 생각하는 봉사란, 그것이 (동기, 행동의 측면에서)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이 쾌락을 느끼기 위한 수단들 중 하나이다. '쾌락', '인간의 이기성'등이 그 동기의 핵심적 요소를 이룬다고 해서 봉사라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자칫하면 그릇된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는) 본래적 특성과 공동선의 추구라는 사회의 목적이 합일점을 찾는다면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개인의 봉사가 사회적 공동선의 추구에 이바지 하는 가는 남을도와야하는가에서 보다 논의되어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동정과 희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안중근이나, 백범 같은분들을 생각해보면 될 것같습니다. 수많은 옥고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버텨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오직 하나 "사랑"밖엔 없습니다. 그 사랑을 체험해본 사람만이 그와 같은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조국이 자신에게 준 깊은 사랑을 깨달을때 (그것은 삶속에서 온전히 느끼는 것이지요) 그는 그 사랑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조국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선현들을 생각할때 우리는 그것을 희생하였다고 생각하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받았던 깊은 사랑을 아직도 도저히 갚을길이 없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말의 핵심은 예수의 최후의 순간에서 멋있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여 정녕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한 자로써 그와 같은 느낌을 갖을순 없을 겁니다. 이 진술은 "신이시여 정녕 당신의 뜻을 제가 모두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까? 당신의 뜻을 펼 아들로써 제가 부족한 것입니까? 전 아직도 저 사람들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지 않나요?"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후에 "다 이루었도다" 라고 말하게 되지요. 이것은 바로 예수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온전한 목적을 즉 신이 예수를 통해 준비한 인류에 대한 더큰 사랑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전 아직도 모릅니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이룬것일까요? ---mun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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