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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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를 신봉하고 그 교리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양심상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한 행위는 응당 병역법의 규정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하며... 소위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 제17조에서 보장한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를 신봉하고 그 교리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양심상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한 행위는 응당 병역법의 규정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하며... 소위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 제17조에서 보장한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병역법은 집총에 대하여 시민이 견지하는 양심이나 종교의 교리가 어떠한 것이든 상관하지 않으므로, 병역법 앞에서는 자신의 신조와 양심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다. 법률의 평등한 집행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양심의 자유'는 다른 어떤 자유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자유이며, 국가의 존재보다 근원적인 자유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응당'이라는 표현을 쉽게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 말기에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천주교도들과 일제시대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기독교도인들의 희생을 잘 알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선조들을 향해 당시 국교가 유교이므로 응당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고, 신사 참배는 당시 국가의 방침으므로 응당 따랐어야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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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표현의 자유, 무제한의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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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를 수 있는 자유의 실체는 기존 질서의 심장을 건드리는 사안에 대하여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검증되는 것이다." --스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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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를 수 있는 자유의 실체는 기존 질서의 심장을 건드리는 사안에 대하여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검증되는 것이다." --스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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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원칙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의 원칙을 뜻한다." --홈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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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원칙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의 원칙을 뜻한다." --홈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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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은 양심과사상의자유를위하여에 인용된 것을 다시 인용한 것이다. 아래의 인용은 이 책속에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진정한 사상의 자유'를 논함에 있어 맥이 통한다는 점에서 위의 스톤과 홈스의 명언과 나란히 로자의 명언도 이곳에 옮겨 적어 본다. 노스모크의 명언에도 올라와 있고 일전에 유시민이란 사람이, 이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상대방(야당?)에게 로자의 이 말을 인용하며 충고를 하기도 했던...(진짜 코메디), 바로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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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는 나의 정치적 반대자들의 자유를 의미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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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는 나의 정치적 반대자들의 자유를 의미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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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와서. 비록 경제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로자는 사회주의적 원리를 홈스는 자본주의적 원리를 그 틀로 삼고 있지만,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뿌리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짜릿한 말을 통해 그들이 공통적 견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모든 따로 있는 것들이 정확히 딱 들어맞아 떨어질 수 없듯이 로자와 홈스의 경우도 약간의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그 정도는 미미해 보인다.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한계점을 논함에 있어 홈스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의 자유"로서 제한을 두기는 했으나 거의 "무제한의 자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로자의 경우는 실오라기 하나 걸침이 없는 "무제한의 자유"라는 표현을 써서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강조했다. 무제한의 자유, 그것이 아니면 자유가 아니라는 말일 게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한다는 것, 토론을 한다는 것, 표현을 한다는 것, ..."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류의 공동체적 삶 자체가 불가능할테니까.
무제한의 자유란 것이 그러하다면 '제한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아 보는 게 좋겠다. 맑은이 자신을 보면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 때문에 내 일상에 제한이 없다면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도무지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할까? 당장은 동쪽으로 가야할지 서쪽으로가야할지부터가 헷갈릴 것이다. 그러나 제한은 제한을 낳고, 새로 난 제한도 제한을 낳고, 그러다 보면 제한적 자유란 결국 완전히 희석되어 버리고 언젠가는 자유는 완전히 없어지고 구속만 남게 될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자유가 없으니 자율도 없을테고 나쁜 의식 하나 싹 트고 크게 자라 나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잠재 의식 하나.
"법이 있으면 법을 지키고 법이 없으면 멋대로 해도 된다." 는 식의.
무슨 얘길까, 예를 들어보자. 식품의 수은허용치가 정해져 있으면 허용치보다 낮은 양의 수은이 인류에게 가하는 해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이 싹 트는 것이다. 이것이 점점 깊어지면 치사량의 수은으로 버무린 김치! 납으로 버무린 김치!를 만들어 팔고서도 할 말은 있다. 뭐라고? 법으로 정해진 허용치가 없었으니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할 것이고, 고발을 처리해야 하는 공무원 쪽도 마찬가지로 관련 법규가 없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 때는 누가 처벌해야 하나요? 피해자가 있는데, 가해자는 없고 심판자도 없다니, 이런 얼토당토 않는 상황이 있나?! 그런데, 그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가 되어 있다.
'자율이 없어진 고삐 풀린 자유' 그것은 무제한의 자유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무제한의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이유로 인해 치르게 된 커다란 댓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고삐 풀린 자유를 방종이라고도 한다. 방종이라는 그 잠재 의식이 이 땅을 망치고 있다.
어쩐다. 어떻게 하면, 그런 최악의 구렁텅이 속을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져야 하고, 우리는 그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주어져야 하고, 무제한의 자유는 무기가 될 수도 있으므로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일찍이 연습해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자유로부터 자율을 이끌어 내는 사람, 법 없이도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관련 법 없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훈련되지 않은 우리는 그것을 다루는 법을 잘 익혀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발전의 도구가 되어주기 보다는 고삐풀린 망아지 마냥 천방지축으로 날 뛰며 남을 헤치는 무기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 시점에 노스모키안들은 뭘 하면 좋을까? 다른 무엇보다 먼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 보자.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줄 아는가? 무제한의 자유를 다룰 줄 아는가? 무제한의 자유는 참으로 배고프다는 것도 아는가?"
얼렁뚱땅 답이 나왔으면 이제 노스모크에서 자유를 다루고 누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들이 "다루고 있는지, 누리고 있는지, 날뛰고 있는지"를 잘 판단해 보는 거다.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 가끔씩 남들이 끼어서 도와 주기도 한다. 대부분은 질책과 고무로써. 노스모키안이라면 그러한 끼어듦을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음, 끝맺음을 해야 하는데... 앞서 쓴 것이 말이 되는지도 모르겠고만...) (여전히 끝맺음이 안된듯한 이상하고 찜찜함. 할 수 없이 다음 기회에 또 수정해야지)
--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