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적이라는 주장:
어쩌구 저쩌구 하므로 연속적이다. (주장의 핵심만 간단하게)
불연속적이라는 주장:저쩌구 어쩌구 하므로 불연속적이다.
다층적 차원에서 연속과 불연속이 공존한다는 주장:뭐뭐뭐 하므로 연속과 불연속은 다른 차원에서 공존한다.
기타...희랍철학의 한 경향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물질이나 원리(Arche)가 무엇인가를 구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논의는 자연계의 사물을 계속 쪼개어 갔을 때 무한히 쪼개어질 수 있는지, 아니면 쪼갤 수 없는 무엇이 있는지의 연속과불연속의 논의로 귀착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쪼개어질수 없는 가장 근본단위로 원자(atom)라는 개념을 상정하였고, 영혼의 작용까지도 이러한 원자의 작용으로 말미암는다는 기계론적 우주관을 세웠으며, 이것은 후에 유물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향을 뒤엎은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너 자신을 알라" 는 한마디는 다시 말해서, 자연의 연속과불연속 같은 외부세계에 대한 고민에 앞서, 자신의 내부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훨씬 더 이롭다는 말이고, 이 한마디는 소크라테스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생명체에서는, 생물과 무생물의 gap이 너무 커서, 연속된 현상이라고 규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침팬지와 인간의 DNA는 97%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똑똑하고 잘생긴 침팬지도 인간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생명의 진화는 각 종들이 자신만의 최적화된 모습으로 안정화시키는 것음을 생각할 때, 종과 종사이의 연속성을 찾기에 무리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동양학에서의 기호체계는 애초부터 연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음양, 주역의 괘, 오행 등 모든 것이 discrete하며, continuous한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예외로 칠 수 있는 것이라면, 태극도이다. 이 그림은 분명히 연속적이다. 하지만 동양학에서 태극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실용성이 없어서 그 자체로 쓰이지 않으며, 음양, 오행 등의 개념을 통해서만 실용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독립적인 개념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변화의 포착은 다양한 조합와 혼융 뿐아니라 유연한 의미 적용에 있는 것 아닐까? 개념의 분리와 독립이 반드시 그 의미 적용의 제한을 뜻하지는 않는 방식이라면 연속과 불연속 사이에도 모종의 연속을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을까? 선과 악 사이에는 더 많은 정의되지 않은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산적인 것을 무한히 계속하면 연속적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게다가 현실 세계에서 연속성은 "완전한 연속성"의 엄밀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0과 1만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연속적으로 인지되어지는 세상'을 만들어 내고, 1초에 수십장의 프레임으로도 우리는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는 불연속이지만, 그 불연속이 연출해 내는 세계는 연속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관객이 존재한다면 더더욱. 세상은 끊임없이 디지탈을 아날로그화해서 보여주려고 하고, 우리는 아날로그를 디지탈화해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상 뿐 아니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현실 역시 일종의 스펙타클이라 볼 수 있다. 앞서 지적된 것과 같은 측면에 있어서 '완전한 연속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결국 동일성과 겹쳐질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연속/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판단(개념이나 이를 형성하는 의미작용 모두)은 별개인 것 아니겠는가? 디지탈은 철저히 인공적인 것이므로 차라리 인간의 개념과 상응할 듯하다. 차라리 세계가 연속적이지만, 그것을 불연속적으로 우리가 연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세계는 엄연히 불연속적이다. 다만 세상이 이것을 연속화해서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이 간접적 연속성을 이차적 불연속성으로 번역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그 중간 단계의 연속성이 우리의 입장에서 이미 불연속화되어 보일 경우는 이를 다시 연속화한 다음, 다시 좀 더 상위 차원에서 불연속화하는 방편적 과정이 개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는 불연속적"이라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를 불연속적이라 정의하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분절화시켜 파악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하는 의문에 대해 세계를 사물의 총체로 파악하는 방식과 사건의 총체로 파악하는 방식의 충돌이 더 적절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문제는 사물의 총체로서의 세상과 사건의 총체로서의 세상 모두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문제 없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unfalsifiable한 명제인 것이다. 굳이 딴지를 건다면 "어느게 더 경제적인 설명 방식이냐" 정도.
소립자물리학에 의하면 세계는 불연속적이다. 원자를 구성하는 오비탈에서 전자의 에너지준위가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라는것. 그로인해, 파동이라는것 역시 불연속적인 현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세상은 미시적차원에서 볼때 불연속적이라는것. 현실차원에서 연속적으로 보이는 현상, 예로, 공을 한쪽에서 한쪽으로 던졌을 때 날라가는 그 공같은 경우, 누가봐도 연속적일것이나, 실은 매우작은 불연속적인 단위들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립자물리학에서의 세계와 현실세계는 엄연히 구분된다. 우리가 인지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연속적인 과정이다. 달리는 자동차나, 던져진 공, 그리고 수학으로 표현되는 0과 1사이의 모든 숫자들. 이 현실의 연속적임은 뉴튼의 미적분학, 고전역학등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인지가능한 현실세계에서는 거의 딱 맞아떨어지고, 따라서, 공을 던졌을 때의 그것의 착지위치는 거의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점점 더 미시세계로 들어갈수록 양자역학적 불연속성으로 인해 조금씩 틀어지게 되고, 결국 원자단위에 도달하면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아는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되며, 따라서 미시세계에서는 불연속성이 좌지우지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론, 위의 논의들이 거칠게 말해서 이른바, "환원"적 사고를 제대로 이해하느냐의 여부에 그 바탕을 두는지도 모른다고 볼 수 있다. 사물의 총체로서의 세상과 사건의 총체로서의 세상은 엄연히 충돌하고 있다. 세상의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건과 사실들의 총체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미시적 단위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만으로 세상을 불연속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충분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이다. 안이하게 단순히 관점의 차이라고 넘겨버리는 대신 두 대립간 소통을 궁리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언제부턴가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은 모두 이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0과 0이 아닌 것은 불연속적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러한 현상이 자연계에는 실재한다. 초전도체는 특정한 온도에 달하면 저항이 0이 된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는 information 이 손실 없이 무한대까지 전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0은 무한대로 통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에서 자아는 0이 된다. 아트만(자아)이 사라짐으로써 그 존재는 브라흐만(범아)이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연속과 불연속은 물고 물린다.
수학적으로는 연속과 불연속한 공간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연속이 계속 잘라서 머가 나온다는 뜻도 아니구요.
힐버트 스페이스등에서 나오는 Compact set라는 개념이 아마 여기서의 연속 불연속의 개념에 더 적당할 것 같군요
어떤 공간이 Compact set이란 말은 그 공간 안의 임의의 수열을 잡았을때 그 수열의 극한이 그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말이지요.당근 그런 극한이 그 공간 혹은 집합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Compact set이 아닙니다.
어떤 공간이 Compact set이란 말은 그 공간 안의 임의의 수열을 잡았을때 그 수열의 극한이 그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말이지요.당근 그런 극한이 그 공간 혹은 집합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Compact set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Compact set을 가정하고 다루는 이유는 이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Compact set으로는 실수공간을 들 수 있는데 우리가 실수를 가지고 다루는 이유는 이게 편하기 때문이지요...모형화하기에도 편하구 생각하기에도 편하구...
제 생각에는 이 세계가 연속인가 불연속인가를 철학적 신비주의가 묻어나는 내용으로 말하는 게 잘못되었다구 생각하네요...일단 연속 불연속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수학적으로 비슷한 Compact set도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일단 소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Channy
- 우선, 위의 compact(옹골)은 complete(완비)의 오기(誤記)입니다.
- 다음으로, 어떤 수학도 물리적 실재 자체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단, 물리적 실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틀을 정합적으로 만들어 줄 수는 있겠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넓이'의 개념이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측도(measure)'의 개념이 그것인데, 이에 따르면 넓이란 대상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라, 'A와 B가 합동이면 A와 B의 넓이는 같다', 'A가 B를 포함하면 A의 넓이가 B의 넓이보다 크거나 같다', '공집합(empty set)의 넓이는 0이다' 등의 몇 가지 규칙에 따라 주어지는 사회적 약속에 불과합니다. 잠깐 퀴즈: 이 약속에 따르면, 평면 위의 한 점의 '넓이'는 무엇일까요? 단, 집합 {(x,y): 0<=x<=1, 0<=y<=1}의 넓이를 1이라고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약속합시다.
- 마지막으로, '공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틀을 개념 정리해 줄 수 있는 수학으로 기하학이 있습니다. 인류가 등방적으로 균질한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일반적인 곡률이 있는 공간을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리만의 기념비적 업적에 의한 것입니다. 리만에 의해 앞서 언급된 '연속적 공간' - 수학적으로는 미적분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 - 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접근이 가능해졌죠. 아인슈타인 이후 현대 이론 물리학의 모든 발전은 리만에 의한 공간 이해에 기초합니다.(..라고 들었습니다-_-;;)
- 다시 말하지만 수학은 물리적 실재 자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공간에 대해서라면, '만일 공간이 이러저한 성질을 만족한다면 이러해야 한다'는 말까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때로 수학이 물리적-철학적 영감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수학이 어떤 대상에 대한 인간의 혼동된 인식틀을 정리해 주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수학은 철학적 모호함(실재의 영역)을 회피하여 자신만의 정합적 세계를 구축하는데서 출발한다고 생각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다죠? 수학의 입장이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Khakii
연속과불연속이 수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 예는 한 함수가 연속이지 않은 구간에서 미분하는 경우이다. 실제로 이것은 수학자들이 일으키는 오류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한때 유행한 썰렁한 유머한마디 :
간 : 간단히 말해,
미 : 미분가능이면
연 : 연속이다.
미 : 미분가능이면
연 :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