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는 대립적인가? 2001년 12월 3일 연세춘추
1. 전문읽기 ¶
{{|11월 8일 신과대학과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소장 김균진 교수)의 초청으로 세계 신학계의 거두인 독일 뮌헨 대학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교수가 우리대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창조와 진화는 대립적인가”라는 제목으로 루스채플에서 강연했는데, 그 핵심적 요소는 ‘새로움의 출현’이라는 개념이다. ‘창발적(emergent)’이라고 이름지어지는 이 개념은 이전 단계의 체계 안에서는 전혀 예측되지 않으며, 전적인 우연성 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새로움을 가리킨다.
“새로움의 출현”에 대한 몰이해
판넨베르크 교수는 우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찰스다윈의 진화론 혹은 성서적 창조론의 오해를 지적한다. 찰스다윈 이래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생존경쟁의 방식으로 설명해 온 종의 진화문제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돼왔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자들은 하등 생명체가 고등 생명체로 진화하는 과정이 정말 있었는지 하는 문제의 핵심에는 한번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고 한다.ShowMeTheSource 자연선택의 원리가 보다 더 복잡한 생명체의 출현과정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것인지를 묻는 데에만 한정됐다. 이같은 논점의 상실은 다윈주의의 기계적인 해석이 일반적, 대중적 견해를 주도하게끔 만들었고, 그 결과 초기 다윈주의는 진화과정 안에서의 새로움의 출현이나 우연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새로움의 출현을 부정하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기계적 진화론의 개념은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 안에서 더욱 확고하게 일반적 상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전통적인 진화론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판넨베르크 교수는 소위 성서적(문자적) 창조론도 ‘새로움의 출현’에 관해 오해하고 있다고 본다. 수세기 동안 교회는 창세기 1장을 단순하게 해석해 모든 동식물의 종들이 창조 5일과 6일째에 하나님에 의해 피조됐으며, 영원히 변치 않고 보존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창조에 대한 그런 이해는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가 각각의 단계에서 새로운 존재와 생명체를 출현시키는 ‘창발적 과정’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을 소홀히 한 것이다. 하나님은 동식물을 직접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땅으로 하여금 그것을 만들도록 유도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더구나 위의 단순한 창조 이해는 이스라엘의 역사과정 안에서 인간이 전혀 예측할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을 일으키시는 창조자의 사역을 발견하지 못했다(예를 들어 이사야 48: 6절 이하). 성서는 바로 이 ‘새로움의 출현’이라는 개념을 지시하고 있는 반면 전통적 창조론은 모든 종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경직된 결정론적 사고방식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판넨베르크와 함께 전통적 진화론이나 성서적(문자적) 창조론 모두가 ‘새로움의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창조의 중심적 주제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판넨베르크 교수의 ‘창발적 진화’의 개념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우주적 진화과정의 모든 새로운 전환점(new turn)에 현실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그것은 진화과정의 주요한 도약들(major steps)에 대해,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생물학적 구조의 변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새로운 유기체가 불현듯 출현(fulgurate)한다는 설명이 더욱 현실적이며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 과학적 분위기에 상응한다. 복잡성의 과학(Science of Complexity)에 의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현상의 발견은 이러한 전일적(holistic) 작용에 의한 새로움의 출현이 생물학적 진화의 단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우주의 창조과정 전체에 내재한 일반적인 현상임을 확인했다. 이런 자기조직화의 현상에 창조자의 신적 지능이 직접 개입하는지의 여부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간극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 교수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창발적 진화의 핵심개념인 ‘전적으로 우연적(contingent)이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출현’이 단지 과거의 생물학적 진화의 단계를 넘어서서 문화적 진화의 단계로 진입하며, 인류 문화의 역동적인 운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통찰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영’이 출현한 것이다. 인간적 자의식 운동의 근원은 언어인데, 언어를 통해 인간의 영은 문화적인 역동성을 일으키게 되고, 이것은 자기 조직화 현상을 스스로 유도하는 포괄적 종교의식으로 발전해 나간다. 인간의 출현 이전의 물리학적·생물학적 단계 안에서 일으켜지는 자생적 조직화 현상이 창조자의 직접적인 사역과 결부되는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진화과정 안에서 일으켜지는 종교적 차원의 자기조직화 현상, 즉 성령에 의한 교회 공동체와 문화적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창조자의 의지가 직접 개입하신다는 데에는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현실적으로 경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 교회가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판넨베르크 교수는 새로움을 출현시키는 창발적 진화의 과정이 문화적 진화 과정을 통과해 결국 ‘부활’ 사건의 출현을 향해 진행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안에서 모든 소멸성이 극복되는 것이 이런 문화적, 종교적 창발―진화과정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성령의 힘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했다고 말한다(고전 15: 44 이하). 또한 우리의 몸도 불멸의 생명,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성령에 온전히 참여해 썩지 않는 존재로 새롭게 등장하게 될 미래를 예측한다.
이 창발적 진화론은 전통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현재까지 관찰된 우주적 역사에 현실적으로 부합하며 많은 과학적인 증거들을 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체 이전의 물리적, 생화학적 차원에서의 진화와 생명체 내지는 문화적 차원에서의 진화가 어떻게 상호 관련되는가 하는 공진화(co―evolution)의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런 창발적 진화의 추진력이 공생을 위한 이타주의, 즉 아가페로서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강조하지 않고 있다.
창발적 진화론의 현재적 의의
취업대란이라는 역경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창조와 진화’라는 주제를 내미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오늘날 이런 개념들은 현대인의 의식 안에서 까맣게 잊혀지고 있다. 현대인은 ‘창조’도 그다지 믿지 않으며, 또한 ‘진화’에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무관심’하다. 이 무관심은 오늘 우리가 인간적 존재의 근원을 망각하고 있고, 삶과 생명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파괴적 자본주의 문화의 한 측면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러한 파괴적 동력의 근원에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판넨베르크와 함께 인간과 생명의 궁극적인 기원을 새롭게 질문함으로써, 비인간적 물질문화가 확산되는 경향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는가? 아니면 인간 존재란 우주의 맹목적인 진행과정 안에서 우연히 일시적으로 출현한 해프닝에 불과한가? 자본주의적 문화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억압하면 할수록 그것에 저항하며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은 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맹목적 우연성의 산물이 아니며, 전능자의 거대한 지능에 직접 관여되면서 생성된 창조적 존재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창발적 진화과정 안에서 전능자의 현실적인 개입을 확인하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전능자 하나님이 또한 취업대란으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혼란한 현실 안에서도 바로 그 창발적 방식으로써 개입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각의 개인적인 삶의 과정 안에 결코 예측될 수 없는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시며, 또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참된 희망을 말할 수 있고, 이 시대도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Q & A ¶
Q1: 복잡성의 과학(Science of Complexity)에 의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현상의 발견은 이러한 전일적(holistic) 작용에 의한 새로움의 출현이 생물학적 진화의 단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우주의 창조과정 전체에 내재한 일반적인 현상임을 확인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A1: 판넨베르크란 분에 대해서 저는 전혀 모릅니다. 다만,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샤르댕의 사상과 관련성이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샤르댕페이지에 있는 링크 혹시 보셨나요? 샤르댕의 사상이 바로 동일한 고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이라는 현상이, 이 우주의 창조가 단순한 기계론적인 진화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찰스다윈의 진화론이죠. 물론 지금은 이런 기계론적 진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절망은 엄청났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좌절감에 한가닥 희망의 빛을 비춘 것이 바로 샤르댕의 진화론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실 위의 내용과 거의 같은 맥락으로 생각됩니다. --지상은
A1: 판넨베르크라는 분에게 Evolutionary conserved된 유전자의 sequence와 단백질의 core region의 보존성을 보여주고 싶군요. 창발성의 문제는 현대진화론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주제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다윈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진화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Stephen Jay Gould의 글을 한번 읽어보시죠. 괴물이론으로 유명한 과학자입니다. 창발적 진화가 가치 있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곳에 신이 개입할 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The Pattern of Life's History --김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