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의중요성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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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의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문학에서의 원전이 갖는 의미와 경제 경영 그리고 공학에서의 원전이 갖는 의미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원전을 지은 그런 대가들의 글은 문을 여는 역할을 한 거지요.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대로 답을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그들의 글에서는 자신의 문제의식의 확실하지 않은 부분도 많고 불합리한 설명도 많습니다.이를 테면 경제학에서 케인지안의 시작은 케인즈의 일반이론이겠지만 당시의 케인즈의 책을 보면 약간 모호한 부면이라든지 설명이 부족한 부면이 많습니다. 따라서 현대 어느 대학교에서도 그 책을 교재로 쓰고 있지 않지요.

글쎄요..제가 보기에는 시간도 없는 현대 자신의 전공분야의 최신 정보를 받아드리기도 바쁜데 그런 원전의 불확실한 article까지 읽을 여유가 있나요? 더구나 비전공분야라면 더욱 할 말도 없을 겁니다. 교양수준의 지식을 갖추는데 원전까지 볼 필요는 없지요.머 자신의 전공이 그런 경제사 등등 역사와 관련되면 그 원전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자신의 전공이니 읽어야 하겠지만요...

수능이 도입되면서 갑자기 부는 고전 열풍에 대한 단상이었습니다.---Cha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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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time I attended a graduate level survey course of modern physics (topics from classical physics through quantum mechanics). Instead of the standard approach of presenting simpler concepts and proceeding to the more complex ideas as derived through abstractions and hind-sight mathematical proofs, the professor presented the material in the strict sequence that it had developed historically. The various mathematical derivations were taught in the form they were originally published, not in the highly polished versions found in a modern text book (I can recall spending a week teasing out Planck's solution to the black body radiation problem). Each topic was presented as "this is what the problem was at this time in the history of physics and here is how it was solved". I was shocked at the effectiveness of this approach. It was much easier to understand physics from the standpoint of "problems (in history) to be solved" than from the approach of "equations to be derived". Many nagging mysteries from undergraduate school were suddenly solved (simple minded things like - what motivated Schroedinger to come up with his wave equation? -well, deBroglie showed that electrons could be considered to be a wave; Shroedinger contemplated this result and decided that where there was a wave, there had to be a wave equation). There were more subtle epiphanies from this historical approach -- it was the first time I appreciated the awe inspiring "simplicity" and elegance of Einstein's early work in quantum theory. -- cc_shaw@msn.com

&From ''http://www.kurzweilai.net/meme/frame.html?main=/articles/art0395.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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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also 교양수업토론의 수리논리학 교양수업 유감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면서, 30년도 지난 논문을 읽는(단순히 역사적 가치에서가 아니라) 저로서는, 요즘 어린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근데 수능이 도입되면서 "고전 열풍"이 불긴 불었나?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원전"과 "고전"은 같은 개념은 아니랍니다. 단순히 "오래된 책을 많이 봐라"는 유치한 소리가 아니죠. --김창준

으음... Channy님 스스로 '원전의 중요성'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고 시작하셨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원전을 읽는다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는 보지 않는데, 1) 원전이 늘 이해하기 좋은 형태인 것은 아니다 2) 모든 것의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렵다. 로 지적하셨습니다만. 이 두가지, 1), 2)의 맥락은 전혀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책을 많이 봐라' 라고 해석하셔서 그렇게 적으셨을리가 없지요.... 휴... 저는 전의권위가 생각나는군요... --nayas

원전이 중요하지않다거나 원전을 많이 읽지않아도된다는 것을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어보입니다. 네. 아무도 중요하지 않다거나, 많이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은 걸요. 원전은 중요하고, 많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 그보다 간결한 다이제스트를 읽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픈 거지요. 그런 이유가, 1) 2) 이구요. 그러나 모든 것에 원전을 읽기는 불가능 하므로, 때로 잘 정리된 다이제스트를 읽는 것도 가능하다. ... 라고 썼으면 조금 달랐을까요... --nayas

제 생각에는 접근 방법의 차이같은데요? 글쎄요...만약 30년도 더된 논문이라도 자신에게 필요하면 볼 수 있습니다.그 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구요.단지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것은 바닥부터 그리고 처음부터 깊숙히 들어가야한다는 그리고 그것만이 길이라는 생각에 대한 반론이었습니다. 머 이런 거일까요? 어떤 하나의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누구나 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깨에 올라가기 위해 거인의 어깨뼈 근육 이 모든 것을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과학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가 아닌가요? 저도 원전과 고전의 차이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어린 학생은 더더욱아니구요. 같은 것이면 이왕이면 원전이 아니라 더 간결하고 일목요연한 것을 읽는다는 기준은 제가 보기에는 잘못된 것이 없는 것 같군요. --Channy

당시의 케인즈의 책을 보면 약간 모호한 부면이라든지 설명이 부족한 부면이 많습니다.라는 소리를 하려면(공부하는 학생/학자로서는) 최소한 자기 눈으로 직접 케인즈를 읽어봐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십시오. --김창준

물론 님의 말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님께서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편견인 것 같습니다. 제 처음의 논의에서도 인문 과학등을 차처하고 경제학 공학 등을 들었습니다. 이는 원전의 Context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학문도 있을 수 있고 제가 그 분야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제학 등 수학적 정치화가 심하게 부각되는 곳에서는 그러한 원전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학적 모델이 그리고 그 논리가 Context에서 나오는 해석의 오류를 방지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원전의 전개란 수학적으로 제대로 Define이 안된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문제제기 자체도 모호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원전보다는 그에 대한 해석서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리의 역학을 알기 위해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보는 경우는 없으며 수학의 르벡 적분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원전을 보는 일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에서도 수요과 공급을 이해하기 위해 애덤스의 국부론을 읽는 일은 없습니다. 머 철학과에서는 아직도 강독 과목처럼 원전을 읽는 강좌가 있는 반면에 수학과 경제학과 등에서는 그런 강좌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이겠지요.

그리고 제 글에서 잘못된 인용이 있는 것은 제 자신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글이 학문적 논의를 위해 쓰여진 글도 아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도의 수준의 글을 두고 바른 학문의 자세를 드는 것 또한 그리 좋은 자세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Channy


국부론에 대한 님의 견해는 좀 과장되었습니다. 님께서 접해본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국부론을 원전으로 읽는 그런 짓은 대부분의 경제학도들이 지양합니다. 교수님들도 그런 공부는 적극적으로 말리지요.이 면에서는 전공자인 제 견해가 옳을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원전의 중요성에 대한 학문적 차이는 그 차이가 약간이라는 님의 말씀은 성급한 속단인 것 같습니다.. 그런 현상이 예외인지 아니면 중요한 반례인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 그렇게 선언적으로 답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님의 사회과학에 대한 생각은 글쎄요...일단 논의가 빗나간다는 느낌입니다.---Channy

님께서 교양으로서 읽기를 말하신다면 의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공도 아닌 단지 교양으로서 알기위해 원전으로 읽어야한다는 말씀은 무리한 제안아닌지요? 저같으면 그런 교양을 위해서라면 원전이 아니라 요약본을 보겠습니다. 머 니체짜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를 굳이 읽지 않고 그냥 요약본만 봐도 술자리에서 이야기할 거리는 됩니다.
글구 님과 님이 아는 사람들이 글쎄요 국부론을 왜 읽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도 읽지 않는 것을요? 글쎄요 단순 교양이라면 그런 것을 읽는 것이 취미니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애초의 논의에서처럼 그 책을 반드시 읽는 일이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이해하는 일에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경제학을 교양이 아니라 전공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경제학의 방대한 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부론을 원전으로 읽을 만큼 시간을 들여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답니다.---Channy

매뉴얼은 요약본으로 읽어도 좋지만, 짜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와 같은 주장과 사상을 담고 있는 책들은 반드시 원전(당연 번역본 포함)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술자리 안주거리로라도 자기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책을 지은 저자와 최소한 한번은 대면을 해야(책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아말감

같은 이야기라서, 저 역시 이 아래로 댓글을 답니다.

때로 원전이 아닌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확률적 통계론을 미시 경제이론에 도입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혹은 얼굴 인식 프로그램을 위해 GeneticAlgorithm을 도입한다든가의 예도 좋겠지요.) 이 경우에는 원래의 방법론에 대한 원전을 읽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원저자의 텍스트가 늘 가장 그 내용에 대해 이해하기 좋은 텍스트는 아닙니다. 그 이후의 발전과 맥락의 변화도 있으며, 때로는 원래의 텍스트 자체가 불완하거나 접할 수 없기도 합니다. 어떤 텍스트건 대상에 대해 곡해 없는 적확한 이해를 가져다 주는 텍스트이면 족합니다.

자, 원전의중요성은 두가지 레벨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첫번째 레벨은 더 포괄적인 것으로 '1차적 텍스트를 많이 접하는 것이 좋다.'의 레벨입니다. 두번째 레벨은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려면 그 어떤 것을 직접 (그것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읽어보았어야 한다.' 의 원론적인 레벨입니다. 두번째에 대해서는 눈꼽만치도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1차적 텍스트가 더 중요하다라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겠지만 맥락에 따라서 다르다. 는 이야기입니다.

국부론과 같은 책은, 인용을 하든, 도입을 하건, 국부론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역시 읽어보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해 대상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의 일반 개념이라면, 어떤 텍스트를 읽었던 간에 곡해없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nayas

우리는 개념들을 외우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잘난 척 하거나 교수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을 파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탐구하기위한 힘을 얻기 위해 우리는 '원전'이라는 것을 읽습니다. 대가들은 도대체 자신의 상황 속에서 어떤 창조적 사유를 행했나를 느끼기 위해 '원전'을 읽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중요시하는 개념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 맥락(잉여들)과 함께하는 그 사유의 운동을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학문이 단답식 시험은 아니니까요. --그놈


이 논쟁의 분열점은 원전이 속한 학문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다수의 인문학은 텍스트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문장과 문장, 행간과 행간을 읽어 내려가며 저자의 가치관을 파악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사상을 수용하고 실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혹은 그의 가치관에서 기인한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저서와 대면함으로써 그와 대화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그 이후로 ( 혹은 그로부터 파생된 ) 이어지는 학문의 성격과 그누나 던지게 될 만한 why ? 에 대한 의문 혹은 그에 대한 화두를 잡을 수 있게 되는 계기는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인문학이 아닌 실용 학문 쪽으로 가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는 외부의 대상을 지칭하고, 그 현상을 논하게 됩니다. 인문학과는 반대의 방향성을 띄는 거죠. 물론 여기서도 저자의 가치관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상입니다. 자동차를 잘 굴리고, 기계를 잘 설계하는 것에 원서를 고집할 이유는 없습니다. 경제학 혹은 경영학도 비슷합니다. 실용적 관점에서 본다면 국부론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분업의 원리를 알아서 공장에서 적용하자니 ( 국부론에는 핀만드는 공장의 예시가 나오죠 ... ) 이미 그건 공장의 십장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문학적 관점에서 아담 스미스의 사상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다면 ( Why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가 ? ) 국부론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통해 무슨 경제적 이해라든지, 경영의 적용을 해 볼까 하는 인식은 위험할 뿐입니다. 이 논쟁은 미천한 제가 보기에는 응용학문과 인문학의 균열을 타고 쪼개진 것처럼 보입니다만 . --Nestor


어떤 논란거리, 이슈에 대해서 글을 쓰고 주석을 달고 인용을 하는데 있어 관련된 모든 것의 '원전'을 읽어봐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입니다. 책을 쓰거나 논문을 쓰거나 어떤 글을 쓸 때에는, 당연히 주제가 있고, 그 주제와 관련되어 먼저 생각해본 사람들의 글이 있고, 인용하거나 참고할 교과서도 있습니다. 이때 자신의 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글은, 특히 자신이 인용을 하거나 평을 할 때에는 그 대상이 되는 텍스트를 읽어봐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당대의 텍스트를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지, 가다듬어지고 확장되기 전의 '원전'을 굳이 읽어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옛날 교과서를 굳이 다 꺼내어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전'을 읽는다면,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주요한 디딤돌이 되는 '원전(교과서?)'을 읽으면 되고, 학문의 역사가 오래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에는 반드시 읽어야 할 '교과서'로 꼽히던 것이 어느 순간 잊혀지는 때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남겨진 모든 '원전'을 다 읽고 이해하는데 수십,수백년의 시간이 걸립니다(요약본 읽듯 대충 요지만 파악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공부한 것도 아니지만, 제가 아는 자연과학에서는 옛날의 교과서, 원전을 찾아 읽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수십년 전에 쓰여진 교과서가 여전히 유효하고 가장 좋다는 평을 받기에 계속 읽혀지는 경우는 있어도, 단지 '원전'을 읽기 위해 옛날 책을 찾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원전이 중요하냐 아니냐,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이냐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의 문제와 관련있는 예를 들어본다면,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 발전 초기의 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그 당시 물리학자들의 주요한 생각을 따라가는 교육에 신경을 씁니다(그래도 어디까지나 현대에 쓰여진 걸러지고 걸러진 교과서를 통해서 배웁니다). 그러나 전자공학 등을 연구하는 공대에서는 물리학과에서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하게 양자역학에 대해 배우고, 어떤 경우에는 큰 가닥의 개념이 틀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소한 이슈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쉽게 대충 비유적으로(엉터리로)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수학과에서는 엄밀하게 증명하고 넘어가는 문제를, 물리학과에서는 대강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수학의 문제도 많습니다.
학문이라는 것이 축적된 인류의 지식,지혜이고, 옛날의 당사자들은 숱한 고민을 통해 이해하려고 애썼던 문제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그러한 사고방식이 박혀 들게 됩니다. 가끔씩 양자역학을 배울 때 이야기하곤 했던 것이, 지금 우리는 양자역학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려고 애쓰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미적분문제를 손쉽게 풀듯이 양자역학 문제를 풀 거라는 것이었지요.

이야기 흐름을 바꾸어서... 이러한 토론이 생겨난 이유는 어떤 사람은 지금 꼭 읽어야 하는 '교과서'라고 생각하는 책을 어떤 사람은 제대로 읽지도 않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경우는 몇 가지 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 '교과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애매한 시점에 놓인 것이거나, 제대로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못마땅한 것이거나, 학문의 영역이 넓어져서 전통적인 '교과서'를 모두 소화하기 힘든 상태이거나 말입니다.

어쨌거나 원전이 중요하냐 아니냐는 그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나 어느 학문이듯, 과거에는 중요한 원전이었으나 지금은 무의미한 텍스트가 되는 일이 다반사라고 봅니다. -- Aragorn

저도 주절주절 한 마디 하겠습니다. 위에서도 누가 지적하신 것 같은데요. 원전을 읽는 이유는 저자의 논리 전개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공부하는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그런 것 같아요. --;) 어떤 수학적 정리의 증명이 있다고 해 보죠. 처음 그 증명을 생각해 낸 사람은 아마도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방식대로, 혹은 순서대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떤 부분에서 막히니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고 하다가 증명을 했겠죠. 그리고는 최대한 간결하게 풀어서 썼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미 그 증명에는 그 사람이 생각한 순서라던가 방식이 나타나기 힘들죠. 이런 건 수학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 느껴 봤을 건데요. 교수가 앞에서 왜 이렇게 증명을 해야 하고 이 부분에서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지 얘기하면서 증명을 보는 거랑, 혼자서 증명이 된 문서를 해석하는 거랑은 이해의 정도에서 천지 차이가 나거든요. 어떤 선생님께서는 아예 증명을 거꾸로 풀어나가시는 분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걸 증명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하는 식으로 말이죠. 너무 말이 길어졌군요. -_-; 그래도 하나의 예만 더 들죠. R.A.Fisher란 생물학자 겸 통계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통계학에 기여한 부분이 상당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기하학을 좋아해서 통계문제를 기하학적인 접근법으로 해결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이 사람의 방법에 대해서 배울 때는 '기하'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저 수식 좇아가기 바빴죠. 하지만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바꿔서 생각하니까 이해하기가 쉽더군요. Fisher information을 곡률로 이해한다던가요. 그것이 곡률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Fisher는 그런 개념을 생각했을까 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거죠. 즉, 원전을 읽으면 저자의 독창적인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어떤 큰 줄기라고 생각되는 그 개념 말입니다. 뒤에 나온 책들은 그런 큰 개념보다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한다던가 더 정확하게 다듬는다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거든요. 큰 개념이 도출되기까지를 서술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즉,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사고 방식을 배운다는 입장에서는 원전을 읽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자연과학 분야라도 말이죠. anonymous

음하하하~~ 저는 '원자력발전소의 중요성'에 대한 토론인줄 알았습니다. 10쯤년 전의 패러다임으로는 'ME저작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 huggies

원전의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교수님을 한 분쯤 갖지 못하고 대학을 다닌다면, 쓸쓸한 일이죠..
정말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함 아말감

비평글을 읽되 그 글을 무조건 비평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원전을 먼저 읽어야 가능한 일이군요.. ^^;;) --picxenk

정말 원전을 읽는것은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일 같습니다. 칸트의 저서 하나 안 읽고 칸트를 논하며, 데카르트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코미디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지 않고 플라톤에 대해 떠든다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비평은 결국 선택 혹은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수많은 Writing 을 선별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적은 원전을 이해 ( 읽어야 이해하니까요 ) 함의 연장이 되는 것이죠. --Nestor

원전을 읽는다는 것이 확실히 중요한 것이긴 합니다. 저도 대학때는 항상 원전에 대한 컴플렉스같은 것을 지녔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원전을 읽어야만 그것을 논할 수 있다,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분야에 관심이 생겨 그 분야의 책을 섭렵하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개론서류나 사람들이 많이 권하는 그런 책으로 시작하게 되겠죠. 이 때는 한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마치고 다음 책을 읽을 때는 시간이 조금 더 적게 들고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책은 더 빨리. 이렇게 책을 더 읽다 보면, 한 책에 대해 저자의 독창적인 저술부분이나 저자의 주 아이디어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책에서 특정한 부분만 선별해서 읽을 수 있게 되죠. 그래도 그 책의 내용과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거든요. 원전도 책입니다.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의 독창적인 저술과 아이디어입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원전 그 자체를 읽지 않더라도 부족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원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긴 합니다. 특히 대학 학부 때라면 충분한 여유를 갖고 원전을 읽는 것이 후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든든함과 뿌듯함이 됩니다. 다만 제 말은, 원전을 읽지 않았다면 그것을 논할 수 없다는 말에는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돌이켜 생각하면 제가 <자본>을 읽기 전에는 맑스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본>을 읽은 후에 제가 덧붙여 느낀 것은 그 저작의 풍성함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맑스의 열정과 인간애, 체취입니다. <국부론>은 어떻습니까? 아담스미스의 사회학자 혹은 역사학자에 가까운 디테일한 예시를 100%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디테일을 다 확인하고 조사하였다고 해도 그 사람이 아담스미스를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저술시 영국의 상황'이라는 논문은 쓸 수 있겠지만. -

원전만을 읽는 것은, 동시대의 원전인 경우에는 분명히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지만, 오래 전 시대의 것인 경우에는 오해와 혼돈, 그리고 재해석 상의 오류의 가능성에 대한 주의 없는 독서는 하지 않음만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 그 사상이나 글, 아이디어, 그리고 글을 통해서 발견되어진 세계의 모습이란,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제대로 그 원전을 읽고자 하는 사람은 원전이 씌어진 시대에 대한 읽기도 같이 병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19세기 철학서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번쩍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들과 얘기하다보면 가끔은 그 시대의 유령과 마주하고 있다는 기분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대라는 상대적 위치에서 원전이 속해 있었던 시대의 모습에 대한 이해하기는 원전읽기의 중요성만큼의 무게를 같이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수 없기에, 우리는 이미 그 노력을 취했던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원전 상에 나와 있는 내용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직접 읽어보시지...'라고 얘기해오면, 이때는 약간 땀이 흐르기 시작하죠. (왜냐면 난 당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대를 초월하는 원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게 되는데, 그런 책이야말로 원전 읽기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는 책이랄 수 있겠죠. 원전을 읽고 싶은데 시공의 벽이 높고, 배경지식에 대한 불안감이 앞을 가로막을 때, 간추린 책의 소개 내지는 인용은 그 사람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동기와 힘을 부여해주며, 보다 근접하는 이해의 길에 대한 중요한 예시로 작용합니다. 물론, 인문학도로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수학이나 공학, 기타 이공계의 경우에는 어쩌면, 시대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경우에는 중요한 원전을 읽지 않고 있다면, 사기치기로 때우는 일이 많아질 수도 있으리라 '상상'해봅니다. 인문학도의 경우에는 시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읽는 원전이 의도하지 않은 이 시대에 대한 사기치기로 자동 전환되는 경우가 발생하곤합니다. 가끔은...--Roman

공학 전반에 대해 말은 못하겠고, 컴퓨터 공학에서 특히 소프트웨어 공학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원전 읽기와 동시에 원전 주변 읽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모든 글 읽기는 텍스트 자체와 그 텍스트의 맥락(사람을 중심으로 한 축, 시간을 중심으로 한 축 등)을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RenaissanceClub에서 EdsgerDijkstraGo To Statement Considered Harmful이라는 논문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단어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마치 칼싸움을 하듯이 내가 목숨을 내어놓나 글이 뜻을 내어놓나 진검승부를 했습니다. 마치 도덕경 같은 고전 독해를 하듯이 한 줄 한 줄 해독하면서 말이죠. (see also Seminar:RenaissanceClub20030211 )

이 논문은 1968년도에 출판되었는데 이후 몇 십 년 동안 프로그래밍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유행어(X Considered Harmful)를 만들어낼 정도로 유명한 논문입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 원전을 직접 읽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은 교과서에서 한 두 문단으로 요약된 걸 읽거나 귀동냥으로 어떻다더라 하는 소리만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죠.

하지만 그 논문을 직접 읽어보면 보통 사람들이 저자의 아이디어에 대해 이해하는 바와 실재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본의가 왜곡되어 전달되는 것도 있고, 저자의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빠지고 찌끄러기만 남아서 전달되는 것도 많습니다. 원류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물은 흐려지게 마련입니다. 저자의 아이디어는 훨씬 더 스케일이 크고 파워풀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원전 읽기에 있어서도 WikiIsAnEternalNow을 따릅니다. 어떤 원전을 읽는다면 그 원전의 현재적 가치를 찾습니다. 그게 없으면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어떤 자료를 현재 내 몸 중심으로 엮어서 그 가치를 끄집어 내려면 텍스트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 저자가 당시에 어떤 생각을 했었고, 이전에는 어떤 글을 썼으며, 이후에는 어떻게 사고가 바뀌었는지, 또 당시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이후에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등 말이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듯 그 글 속에 숨어있는 가치가 더 많이 보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과거 원전의 가치를 찾기가 훨씬 쉽습니다. 갈고리나 링크가 많아지는 셈이라고 할까요.


Roman의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귀동냥의 중요성과, 원전을 읽은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 그리고, 원전뿐만이 아닌, 원전이 쓰여진 시대읽기의 중요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전을 읽는 사람들의 중요성이라든가, 원전 읽기 자체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죠. 현재, 이 원전의중요성 토론에서, 만약, 찬반의 성격으로 갈라진 토론이 있다면, Roman이 갖고 있는 흘러가는 입장은, 원전을 읽는 것은 가치없다가 아니라 보다 중요하다입니다. 단, 원전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사람의 인생이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심오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부터, 다시금 원전읽기의 중요성을 말하는 다른 가지가 뻗어나오게 되는거죠.--Roman

시대읽기의 중요성에 관한 하나의 간단한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크라테스의대화편을 원전으로 본 사람이 빠지기 쉬운 자의적 해석의 함정 중에 하나는, 바로,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면서 그를 둘러싼 젊은 추종자들에게 말했다고 하는 한줄의 문장입니다.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마리를 대신 갖다주게..."라는 번역이 이루어져 있는 문장인데, 대화편 원전"만"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이 순간 두가지 난제에 봉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스클레피우스'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과 '닭'을 왜 대신 갖다주어야 하는지 또한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화가 강철수씨는 자신의 만화에서 이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의식이 강했으면, 이웃에게 빌린 닭을 대신 갖다달라는 이야기를 죽기 직전까지 했겠는가로 해석한 1페이지 분의 이야기를 실은적이 있었죠.

만약, 크라테스의대화편을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읽기 저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를 관통한 '그리이스 로마 신화'정도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을 보다보면 간단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아스클레피우스가 병을 고치는 '신'이라는 사실이죠. 그다음에, 그리이스 시대에 대한 고증 자료를 얼핏이나마 읽은 사람이라면,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을 바침으로써 병이 나았음을 감사하는 의식이 그 시대에 있었다는 사실까지를 알게 됩니다. 해석은 이렇게 변화합니다. (1) 아스클레피우스가 죽은 자를 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신이었으므로, 부활을 꿈꾸는 의식을 소크라테스가 부탁한 것이다.(이건 좀 엉뚱하죠.) (2) 마침, 소크라테스가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죽음과 동시에 나은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으로 닭을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대신 달라고 한 것이다 2가지 정도로 압축이 됩니다. 결국, 강철수씨의 만화는 명백히 사실과는 다른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게 되고만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배경지식,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번역가가 쓴 책(이를테면, 범우사 문고판)을 읽게 되면, 이런 거추장스러운 시간낭비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주석을 통한 번역가와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다 사실에 근접한 내용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여러종류의 책들을 꼼꼼히 읽어온 사람이었다면, 이미 교양정도의 수준에서 정확한 해석이 이루어져 있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대 읽기가 되지 않은채로 읽은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은 오독이 난무하는 독서가 되어 본인은 물론, 타인에게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오해하게끔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철수씨는 본인이 의도치 않았을 '사기치기'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죠(물론, 그것이 귀동냥이었는지, 아니면, 제대로 되지 않은 번역판을 읽은 탓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많은 사람이 읽는 신문에 실린 만화였기에 아무래도, 나름대로의 정보확인은 한번 더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봅니다). 시대 배경을 벗어난 누군가의 어설픈 원전 읽기는 예기치 않은 오독으로 범벅이 된 독자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량으로 낳을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적어도 인문학도들에게는. 그리고 이 예시는 보다 확장된 사례들과 만나는 경우와 비교하자면, 아주 사소한 일례에 불과합니다. (크라테스의대화편은 논리학도를 위한 텍스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카더라통신) --R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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