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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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Extracted from 순결문제

1. 조선 성리학

조선 성리학의 이상적 인간관은
남성들의 이상적 인간형으로 선비가 있고 여성들의 이상으로 열녀가 있다. 선비의 조건으로는 충과 효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스리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어야 비로소 선비의 자격이 갖추어 진 것이다. 그 외 공맹의 도리를 다해 하늘과 하나가 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열녀의 조건으로는 혼인 전까지는 순결을 지키고 일부종사 하며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남성들도 사회적 요구가 있었으며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의 이상적 인간관을 구체적으로 그 사회에 실현하고자 남녀 모두에게 요구한 것이다. 즉 금수와는 다른 순결하고 아름다운 풍속의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여성주의자는 어찌 여성만 핍박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관점으로도 이 말과 똑같은 투로 말을 지어낼 수 있습니다. 어느쪽이 옳은 주장인지를 떠나서, 공산우행님의 글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건 "성리학"이 하는 말이지 공산우행님이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거든요. 왜 그렇게 들리지 않은지, 말씀하신 쪽에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사십리 모래사장에서 비키니 입은 서양사람들 보고 한 대원군의 말이 생각난다. "이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 ..." -- 산우행
ShowMeTheSource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대원군은 1898년 죽었고, 비키니 수영복은 1946년에 나왔습니다. 어떤 예술 작품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지요? 또 한가지. 조선시대 한국문화에서 보편적인 이상적 인간관은 선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열녀와 선비가 짝을 이루는 개념은 결코 아닙니다. 열녀와 짝을 이루는 말은 효자이며, 그것도 남녀의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개념이라기 보다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버팀목이 되는 두 가지 요소로서 제시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페이지이름바꾸기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페이지는 조선성리학에 대해 오해를 불러오기 아주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는 조선성리학이라기 보다는, 전통적순결관 내지는 전통적성윤리을 논하는 것이겠군요. -- gerecter
이 페이지에서는 순결이나 성윤리 이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전통적 가치관 = 성리학적 가치관' 으로 놓고 이야기가 진행된 것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다만 그것이 성리학이 제시한 규범이나 가치관이 현대에도 통용될만한 것이라는 말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ChatMate

그나마 저는 우리의 전통적성윤리가 성리학이라든가, 조선 사회의 특수성과 그다지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봅니다. 성적 폐쇄성이라든가, 여성에 대한 성 역할의 고정은 세계사적으로, 중세 시대의 보편적인 경향이라고 봅니다. 1700년대 말에 영국에서는 증기기관이 돌아가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정 민주주의 체제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자는 19세기말에, 후자는 불과 50여년 전에 실현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시간차이 때문에 발전 양상이 다를 뿐이라고 봅니다. 즉 이는 성리학과는 별 관계 없는 중세적 전통 성윤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논의라고 봅니다. 중세라는 말의 어감이 좀 안좋기는 합니다만, 그에 대한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성윤리에 대해서 전통 윤리관을 끌어들일 때, 성리학이라든가, 우리 전통문화의 특수성을 논할 필요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 gerecter
그것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시대의 흐름이었다는 것의 사실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성리학이 그런 경향을 합리화 하기 위해 쓰였다거나 혹은 합리화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면 '성리학과는 별 관계 없는'이라는 말은 더이상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은 '평등'이라는 개념이 자리잡혀있지 않던 시대에서 그 시대를 살던 지배계층을 기준으로 형성된 학문입니다. 성리학적 가치규범에 그러한 성격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사회, 혹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기득권세력이 필요로 했던 '열녀'나 '효자'같은 단방향적 가치가 현대 사회에도 적합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평등을 위해서는 '가족애, 화목'처럼 양방향적인 가치가 제시되어야겠지요. '열녀'와 '효자'가 버팀목이 되어 유지하는 것은 '당시 여건에서 기득권세력이 계속 힘을 갖는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ChatMate

산우행 님 스스로가 이미 위에서 세상이 넓으니 여러 문화와 전통이 있겠지요라고 말씀하신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대원군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무지했던 발언을 하셨군요. --ChatMate 동의한표 - 최종욱
DeleteMe 인디언이 금수보다 못하진 않을걸요 :) .

그리고 백범선생님께서 일본 순사에 쫓겨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옆에 아버님(어머님인가?)이 아파 누워 계셨는데 자기의 살을 도려 드리지 못해 갈등하고 번민하는 것도 생각난다. 백범일지에 있음. --산우행
논점을 벗어나는 내용입니다. 순결이 효에 직결된다고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
저의 논점은 그 만큼 남성들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자신을 길들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백범선생님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같이 생각하고 행동했겠지요. 또한 행동은 못해도 마음에 갈등을 느끼겠지요. -- 산우행
삼강오륜에서는 충효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말 대신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라고 하지요.

산우행씨, ChatMate씨, 어째 싸움이 격해지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쉬엄쉬엄 합시다. 산우행씨의 말씀에서 실마리가 보이는 듯 한데요, 남녀평등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이미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현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있는 현재'와 '남녀평등'의 자리를 구분지어 이야기해도 좋으련지요. --최종욱

현대 사회는 수명이 연장되어 연세 60을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유교의 이념이 우리보다 철저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사는 하늘이 무너져도 지내야 하는 줄 알고 충효사상은 그분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어있습니다. 순결문제도 마찬가지고요... 산우행은 조선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우행

ChatMate조선 성리학의 이상적 인간관 말고 현대사회의 이상적 인간 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제사는 안 지내도 되는 걸로 알고, 혹은 간소화 하는 것이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이미 '이상적 인간은 어떠어떠하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어떠한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겠지요.
조선 성리학의 이상적 인간관은 그 시대에 걸맞은 인물상입니다.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양반들이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상이고, 시대가 바뀐 지금에까지 그대로 적용시키려 드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학문 하시는 양반들이, 동시대의 다른 일반백성들의 의향을 물어보고 민주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거란 점은 그다지 의심의 여지가 없을겁니다. 아마도 어린 백성들에겐 이러한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조선 성리학적 가치관 같은 구시대의 가치기준을 현대사회에까지 그대로 적용시키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부적응자'가 되겠지요. 혹시 청학동 이야기는 없었으면 합니다. 갱정유도는 일종의 종교집단이지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형식보다야 마음이 중요한 법이고, 형식이 자식들에게 부담된다면 돌아가신 조상 마음들도 편치 않으시겠지요. 그런 현대사회의 이상적 인간관이 중요하기도 하구요. 그렇다고 어르신들의 성리학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겠지요.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좀 더 나은 편을 찾아가야지요 :) . --최종욱

조선 성리학적 가치관: 순결 의리 신의 경천 애인 충효 도덕(도와 덕성) 겸양 등등이라고 생각안하십니까? 이런 것을 버릴까요?

하기사 현대는 순결을 버리고 어릴때 부터 연애하여 순결도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미혼모도 생기고 의리를 버려 친구지간에 돈떼어벅고 배반하기 일쑤요 경천을 버려 하늘 무서운줄 모르고 온갖 사기꾼과 사회범죄가 판을 치고 애인을 버려 사람 사랑하는 것이 없어 길바닥에 누워있는 노숙자와 상대방 헐뜻기가 난무하고 충과 효가 없어 부모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원정출산이 유행이고
내면에 도와 덕은 없고 겉치레만 번듯하고 겸양이 없어 상품포장하듯 자기 피알이 난무하는 세상아닙니까? --산우행
논리학에서는 이를 '거짓 원인의 오류', 또는 '잘못된 인과관계의 오류'라고 합니다. 제가 만약 여기서 '조선시대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까?'라고 말한다면 '피장파장의 오류'가 될까요? 그건 아니겠지요. 이 경우는 산우행 님이 제시한 원인을 부정하는 것으로, '피장파장의 오류'에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ChatMate

논리학적으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성리학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에도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겠지요. 불완전한 사람이 사는 사회인 이상. 하지만 그 사회의 이념이 살아있고 그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회는 당연히 순결과 의리와 충효 애인 도덕겸양으로 나아가서 개인도 선비와 열녀가 사는 이상사회가 되는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회에서 순결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 원정출산을 희망하는 사회가 안될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공산우행의 생각에는 아마 거의 모든 임산부들이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 할 것입니다.--산우행

의리나 신의, 애인, 도덕 등의 가치관들이야 중요하지요.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워낙 성리학이 전통이 깊다보니 세계에서 유래없이 급격히 변한 한국의 현대사회와는 잘 안 맞는 세부사항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차차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시지요? --최종욱

인습이 나쁘고 사회 구성원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고치자고 떠들지 않아도 저절로 안따라 주겠지요. 자연적으로 고쳐질 것입니다. 이 개명한 세상에... -- 산우행

성리학이건 어떤 학문이건간에 사회 구성원이 인습이라 여겨 나쁘다고 생각하면 고쳐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최종욱

버릴 것은 버려야지요. 그 조선시대 가치관에 근면 성실은 왜 안 넣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순결, 충(효)는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라에 충성? 필요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역군은 이샷다 라는 식의 군주에 대한 충성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으실 겁니다. '경천, 애인' 등은 성리학에만 있는 가치관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기독교에서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카톨릭을 부르는 '천주교'라는 이름은 그들의 신을 '하늘의 주인'으로 부르며 공경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아무개 님도 몇 번을 이야기하셨지만, 산우행 님은 성격이 다른 것들까지 공통적으로 한데 묶어놓고는 이분법적인 판단을 강요하는 비논리적인 화법을 애용하시는군요. --ChatMate

'좋은 점도 있다. 싸그리 무시하지는 말자.' 정도로 이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ChatMate씨가 성리학의 기본 가치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 고쳐나가야 할 - 하나의 학문이라는 데에는 동의를 하신 것으로 봐도 되련지요? --최종욱

잘못되었습니다. 공감할 만한 내용이 있다 해도, 현대사회에서 통용될만한 합리성과 설득력이 있거나, 문화권을 뛰어넘는 - 타문화권에도 이미 존재하는 - 보편적인 내용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성리학적 가치관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ChatMate

성리학의 모든 내용을 통틀어 어느 하나도 쓸데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은 구시대의 가치기준을 현대사회에까지 그대로 적용시키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란 말에서 그대로에 포인트를 둠으로써 어느정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ChatMate는, 현대에 통용될 수 있을만한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을 굳이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만 이해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도 성리학이기 때문에 인정하자거나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만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질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다시 질문 드리겠습니다. 성리학도 나름대로의 근거와 논리가 있는 학문 - 어찌보면 하나의 관점 - 이고, 여타 종교나 과학, 윤리가 사회에 발 맞추어 나가듯이 성리학도 발 맞추어 나가면 멋지지 않을까요? --최종욱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ChatMate는 별로 그쪽은 기대되지 않는군요. 위로의 섬김에서 출발하는 충효민주주의와는 그 근본 출발점 부터 상치되기 때문에 발전해 봐야 그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평등한 수평적인 관계에 놓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나라를 이루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소중히 하며,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근본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을 이야기하는 비민주적(非民主的)인 고리적 학문과 서로 어울릴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 되겠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산우행씨가 설명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주주의공화국 헌법'에 명기된 평등개념과 성리학의 수직개념은 완전히 달라서 존립할 수 없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종욱

저의 생각에는 성리학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등을 기반으로 주자 이후 인간 심성과 사회조직에 대한 100여년의 성찰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것을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리학의 껍데기만 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우행

산우행씨의 말이 맞습니다. 성리학도 오랫동안 쌓아온 학문의 업적이지요.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우행의 논리처럼 역사를 따지자면, 조선 성리학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반발(동학 등)과 세계적인 반발로 성리학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성리학이 학문적인 내용과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는 조선 시대의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기본 철학으로 쓰였다고들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종욱
ChatMate산우행 씨의 이 말도 틀렸다고 장문의 글을 썼던 기억이 있는데 어디서 날아가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리학은 위로부터의 학문입니다.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직접 나온 학문이 아니고 지배계층의 머릿속에서만 발전된 학문으로, 평등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며 피지배층의 입장이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정도면 아랫것들이 만족하겠지'라는 식으로 말이죠. 조금 심하게 말하면 성리학은 그 보이는 껍데기 뿐인 학문이고, 속에 든 우주변화의원리 같은 것은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위에도 말한 것 처럼 성리학은 분명 민주주의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입니다.
윗쪽에 찾아보니 ChatMate가 했던 말 가운데 성리학이 구시대의 가치기준이라는 것을 설명하며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양반들이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상이고, 시대가 바뀐 지금에까지 그대로 적용시키려 드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학문 하시는 양반들이, 동시대의 다른 일반백성들의 의향을 물어보고 민주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거란 점은 그다지 의심의 여지가 없을겁니다. 아마도 어린 백성들에겐 이러한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라는 말을 했었군요. '100여년의 성찰'이나 '오랫동안 쌓아온 학문의 업적'이란 말에 대한 대답은 충분했던것 같은데, 또다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군요.

그렇군요.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성리학적 이념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겠지요?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구요. 그런데 ChatMate씨를 비롯한 몇몇 분들께서 성리학은 인습이라고 말씀하시는 듯 한데, 인습이라면 고쳐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어떤 부분이 인습인지는 판단을 한다고 가정하구요) --최종욱

제사 이야기가 어쩌다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의 어머니쪽 조상, 어머니의 아버지쪽 조상, 어머니의 어머니쪽 조상을 배제한 채, 단지 1/2^n 의 조상만을 배려하는 제사는 사실 '조상을 기린다'는 명분에는 제대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역할보다는 핵가족 시대에 친족/가족간의 화합을 도모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이 주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제사처럼 틀에박힌 격식이나 감당할 수 없는 음식 보다는, 비용 면에서, 그리고 복잡성 면에서 차리는 사람, 나누는 사람들 모두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정도로 이미 간소화 되고 있지요. 이미 시대는 변했습니다. 가례 간소화를 그 골자로 하는 '가정의례법'과 '가정의례준칙'이 처음으로 제정, 시행된 것 조차 벌써 만 34년 전의 일이며, 지금은 건전 가정의례 준칙으로 더욱 간소화 되어 있습니다. 악습에 속하는 구습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잘못입니다. --ChatMate

네, 부담이 되는 형식은 벗어내고, 새로운 뜻을 찾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약간 주제를 벗어난 말 같군요. 나중에 봐서ExtractPage 바랍니다. --최종욱
제사 이야기는 ChatMate가 먼저 꺼낸 것이 아닙니다. 유교적 전통이 뿌리깊게 박혀있다는 것에 대한 논거로 산우행 님은 제사는 죽어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을 들었고, ChatMate는 그에 대한 반론으로 현 시대 흐름의 변화와 함께 그렇지 않은 어른들도 많을 정도로 이미 시대가 변했다. 내용을 담은 윗글을 적은 것입니다. 반포된지 30년이 넘은 법령도 있고, 그조차 더욱 간소화되어 재반포 된 것이 그에 대한 반증이 되겠습니다.
법률은 그렇습니다만, 산우행씨께서 드신 '성리학적인 생각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여전히 맞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동네 할아버지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 . 그리고 2차적인 것에 대한 토론은 되도록 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토론으로도 넘치거든요. --최종욱
황혼이혼(정년이혼)은 나이든 세대의 의식변화를 말해주지요. 아마 이것 역시 산우행 님은 개탄해 마지 않으시겠습니다만...
그것도 좋은 사례가 되겠네요 :) .

[http]한국 성담론의 지속과 변동: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을 중심으로
[http]유교와페미니즘기사들

2. 조선 성리학이란? : 최종욱

  • 성리학이란, 유교적 이념으로 형이상학적인 우주 세계를 서술하고, 그를 사회법칙에 적용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실생활과 괴리가 무척이나 많은 학문이며, 수직적인 복종 관계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봅니다. 여기에 '조선'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어, 이 페이지에서는 조선 시대에 지배구조를 옹호하기 위하여 악용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발전한 이기론과 이원론을 비롯한 성리학의 학문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데, '학자'들의 학문으로 시작한 성리학이, 조선 '지배세력'의 옹호 이론으로 악용되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엄청난 왜곡이 생겼다는 역사적 서술과 함께 각 내용을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 반면,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에 근본적으로 내재한 몇가지 도리에 따라 사회법칙을 구성한 학문입니다. 조선 성리학을 포함한 아주 많은 분파가 있습니다. 조선성리학 페이지에 있는 유교적 주요 규범에 대한 논쟁은 유교 페이지에서 오가야 마땅합니다.
--최종욱

잠시 딴지를 걸자면... 형이상학적인 우주세계를 설명하고, 그것을 사회법칙을 적용하는 방법은 불교에서 가져온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정말로 실생활과 괴리가 있느냐.. 하면, 물론 지금의 불교는 산 속에 틀어박혀 있지만, 선종이전의 불교, 보다 정확히 말해서 초기 불교는 도시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거죠. 성리학 역시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학의 기본 정신은 실용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도래와 함께 그 전까지는 필요없었던 형이상학적인 이론의 기초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기론이 등장한 것이죠. 만약에 실생활과 괴리가 무척이나 많다면, 예송논쟁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논쟁자체는 뜬 구름잡는 소리의 대명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예는 삶을 규정하는 지금으로 따지면 실정법과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송논쟁은 지금의 헌법 조문을 가지고 토론을 벌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딴지는 여기서 끝내고요. 저도 반론을 펼치기 전에 제 글을 유교 페이지 혹은 충이나 예라는 페이지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이 곳에서 성리학의 주요 개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ChatMate님의 글에 반론을 하는 형식이 더욱 이해하기도 쉽고, 저도 글을 쓰기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의도는 주로 후자에 가깝습니다. ^^;;;; 왜냐하면 충이나 예라는 페이지를 따로 만들어 글을 쓸 실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서 유교 페이지에 옮기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 성리학의 개념이 오해된 것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언젠가 토론이 끝나면 유교 안에 충, 예, 효의 범주를 만들어 글을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성리학의 페이지에서 유교 개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성리학의 페이지를 장식하는 글은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이나, 성리학의 계보, 향약과 두레와 같은 성리학의 현실화,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사고틀을 규정하는 힘으로서의 성리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3. 세부 토론

3.1. 기존 인식은 오해가 많다 (나이, 왕에 대한 태도) : 잡종


유교적 전통이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대부분의 현대한국인들은 장유유서와 효로 대표되는 나이에 대한 존중, 여성에 대한 억압,상복을 몇년입을 것인가 하는 무의미한 논쟁,그리고 당쟁에 대한 이미지가 스쳐 가실 겁니다. 그러나 다른 사상들처럼 사상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진 것이 조선 성리학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사례를 통하여 이야기를 전개 해볼까 합니다.

1.나이에 대한 문제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장유유서의 질서가 엄격한 사회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장유유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혜와 장치가 있었다. 한 예로 지금은 1년만 차이가 나도 선후배를 깎듯이 따지지만, 전통사회에서는 노론(老論)은 8년, 소론(少論)은 9년 하는 식으로 거의 10년 터울이면 친구로 지내는 평교(平交)를 맺었다. 이는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맞먹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근 10년 사이에 평교가 허락되다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홍명희(洪命熹) 선생은 장가를 일찍 들어 큰아들 홍기문(洪起文)과는 열여덟살 차이였다. 그래서 홍명희와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가 홍기문과도 말을 놓고 지내 여럿이 모인 자리에 가면 부자지간에 다 친구들이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적어도 1950년대까지 이어져 당시 회고록을 보면 6∼7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을 친구로 부르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10년 터울도 말을 텄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질서가 잡힌 사회였지만 젊은 층의 진출과 활동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사나이 20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뒷날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는 시를 남겨 스무살 안팎 수험생들의 기를 팍팍 죽게 만드는 남이(南怡) 장군은 28살에 병조판서가 되었고, 조광조(趙光祖)도 30대에 지금의 감사원장격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물론 이들의 지나친 출세와 급격한 세대교체 요구는 기성세대의 반발을 사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조선시대에 젊은이들에게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겨 성과를 본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한 예로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은 조선시대에 영의정보다 더 권위있는 벼슬로 학문적 성취의 상징인 대제학(大提學)을 30대 초반에 지냈다. <노병은죽지도사라지지도않는다.>-- 한홍구 |}}

2.왕에 대한 태도

성리학 또는 유학이 절대적인 왕에대한 절대적인 충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경우 역성혁명을 말하였고 남명 조식선생 같은 분은 상소문에 당시의 왕의 모후인 문정왕후를 궁중에갇힌일개과부라는 표현을 써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학생들처럼 성균관 유생들은 왕이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할때에는 수업을 거부하거나 단식을 하여 항의 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선성리학이 문제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의 문제가 있었죠. 그리고 현재의 민주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위 유교적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유교 또는 조선성리학의 문제라기 보다는 식민잔재와 군사문화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더 생각나는 부분이 있으면 나중에 더 적을까 합니다.

3.2. 반론 - 근본 의식부터 문제가 있었다 : ChatMate

1. 나이의 문제.

예. 1번에서 인용하신 문서는 ChatMate도 자주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문제는 '평등'이란 개념이 자리잡기 전의 이야기라 드러나는 형태와는 달리 그 근본에 깔린 정신이 현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양반문화, 그것도 같은 계층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동성(同性)에만 허락되는 관계였다는 점은 그 출발점에 '평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단지 '결과적으로 평등하게 존중하는 것저럼 보이는' 것이었을 뿐이라는 한계를 잘 나타내 줍니다.
그리스시대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라는 법이 있었다지만, 여기에서 시민이라는 것은 장성한 그리스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죠. 따라서 신분이 낮은 노예나 여성들은 시민이 아니고, 따라서 평등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ChatMate님이 말하는 평등한 척하는 것은 이걸 말하는 듯한데, 다른 분들이 오해하시는듯 하네요.adell

2. 왕에 대한 태도.

2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충성이 절대적이건 상대적이건, 혹은 조건부 충성이건 간에 상호존중이 아닌 수직적이고 단방향적 가치임에는 변함없습니다. 비단 '충(忠)'만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에 대해, 현대 사회는 수평적이고 대등한, 평등과 상호 존중에 기반한 가치를 필요로 하며, 구시대의 시스템을 위한 가치규범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어느정도 비슷하게 맞춘다 해도, 결국 그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3.3. 조선성리학에 대한 생각 : 잡종

ChatMate 님이 예상대로 답을 쓰셨군요. 그리고 앞쪽글을 다시 읽어보니 성리학에 부정적이시군요. 그래서 제가 조선성리학에 대하여 가진 생각을 적을까 합니다.
1.잡종은 조선성리학의 형이상학적측면은 인류의 지적자원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1.그 가치는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여서가 아니라 理氣論이라는 형이상학이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유교에는 분명히 현대 한국의 악습을 이념적으로 지지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1.소위 유교의 문제로 불리는 것들에 대하여 그것이 유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한국 천민 자본주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ChatMate님께서는 상대적으로 불교나 기독교에는 관용을 베푸시는 것 같네요. 불교의 전생이나 기독교의 내세 개념이 피지배층에게 억압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나 성리학이 지배층에게 유리하게 작동되는 면이나 제눈에는 별차이가 없거든요. 만약에 현대 민주주의 사상이외에 다른 사상은 모두 그르다고 생각하신다면 제 주장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잡종

3.4. ChatMate의 반론

1. ChatMate는 성리학은 그 형이상학적 측면 역시 그 사상적 지지기반이 되는 부분의 첫단추가 어긋나 있기 때문에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상누각이요, 실체 없는 바람&&과 같다고 한 것이지요.
1. 이 부분에서 문외한의 무지가 드러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기론이라는 형이상학은 대체로 연역적인 학문으로 현상을 이론에 끼워맞출 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두루뭉실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원리는 이기론의 전유물이 아니요, 흔히 '원시적'이라고 말하는 토속종교들에서조차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주변화의원리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종교를 찾는 것이 오히려 힘들겠지요. 별다른 독특함도 없고, 세상에 널리고 널린 수많은 세계관에 하나를 더한다는 것 외에 가치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합니다.
1. 예, 그렇습니다.
1. 물론 그 모든 문제가 오로지 유교만의 책임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교의 문제 대한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ChatMate조선성리학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 다른 사상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불교나 기독교가 문제점을 가진다는 것이 조선성리학의 문제를 덮어주지는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성리학의 문제점은 '충', 혹은 '효'와 같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서로 주고 받는 수평적인 교환, 다시 말해 쌍방간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향하는 일방통행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수직적인 '단방향적인 가치'가 아닌, '양방향적인 가치'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ChatMate는 반복하고 있고요.

논란의 소지가 있는 기독교는 논외로 하고, 불교 역시 일부 경전에서 남녀평등 등의 가치에 대해 소홀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법화경에 '사갈라용왕의 딸이 여덟살 때 불법을 듣고, 남자로 변한 다음 부처가 되었다'는 부분이 그런 것인데, 이는 '부처는 남성'이라는 편견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법화사상이 화엄사상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근간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법화경에 이러한 내용이 실려있는 것은 쉽게 넘길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를 위한 학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예(禮)를 말하던 유교-성리학과는 달리, 불교의 출발점은 남녀노소, 인종과 빈부, 똑똑하고 어리석음을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생로병사', 다시 말해 인간의 번뇌와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있었으며, 여기에 인간에 대한 차별이 있지는 아니합니다. 법화사상과 더불어 대승의 근간이 되는 화엄사상은 '분별심을 버릴' 것을 가르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힌두교에서 차용해온 환생론은 불교의 교세를 힌두교에 첨투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업(카르마)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요컨데 지배계층이라고 잘난척 착취를 하고 악업을 쌓으면 인과응보로 현세에 사고를 당하거나, 현세에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내세에는 나쁘게 태어난다는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 힌두교에서 환생 개념을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용도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잡종 씨의 문제제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성리학과는 분명 사상적인 출발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무위자연'을 말하는 도가 사상 역시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근본적으로 불교와 같은 '벗어남'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범주에 들어가며 유교-성리학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5. ChatMate는 성리학을 오해하고 있다 : PsyBaster


PsyBaster가 이야기 드립니다. "정말로 성리학을 오해하고 계시는 군요"

가 일방통행적이라니요. 오히려 유학(성리학)의 이상은 철저하게 관계지향적이고 쌍방간의 소통을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충이란 모든 일에 있어서 스스로를 다하는 자세를 가리키고, 효란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에 그때 더 잘해드릴 것이라는 후회를 보다 적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념입니다. 그리고 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 연장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심지어 성당이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모두 예입니다. 그러나 '통치를 위한 학문'이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의 성격이 없다는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사회철학이기 때문에 그러한 성격이 농후하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된 목적은 절대로 아닙니다.


3.6. 오해라기엔 너무 명백하다 : ChatMate


오해라는 말씀에 대해 좀더 자세한 부가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자식에게서 부모에게로'라는 한쪽을 향하는 가치의 어디가 철저하게 '쌍방간'의 소통과 관계있다는 것인지요? 일방통행적이 아니라니요. '충', 그리고 '효'가 '임금이', '부모가' 어떻게 하라는 말로도 쓰이나요? 혹시 ChatMate오해와는 달리, 부모가 자식에게 '효'를 다하는 일도 사실은 빈번하게 있어 왔던 것인가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PsyBaster 씨의 '충'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만, ChatMate는 선현들께서께서 '임금이 신하에게 스스로를 다한다' 하여 그것을 일러 '충'이라 하셨던 일 역시 없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충효'가 쌍방향적 가치라는 것은 철저하게 억지입니다.

또한, 라는 것은 거창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무위자연' 혹은 '집착과 얽매임을 버릴 것'을 설하는 도가와 불가 사상과는 대조적인 면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종심소욕(從心所欲) 해도 불유구(不兪矩)하는 공자쯤 되는 성인이라면 모를까, 결국 많은 '틀'과 규칙으로 인간을 옭아매고 억압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앞서 하지만 ChatMate는, 현대에 통용될 수 있을만한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을 굳이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만 이해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한 바 있는데 읽지 못하셨군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굳이 조선성리학이 가진, 혹은 유교의 예(禮)만이 가진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단지 동서양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일 뿐입니다. 조금 시니컬한 과장을 곁들여 보자면, 조선성리학에서 비롯된 예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되는 무엇이 아닐까 싶습니다. 악수 하고 나면 민증부터 까보는 것 말입니다. 인간을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나누어,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 다음에야 시작하게 되는 나이의계급사회. 이렇게 된 책임의 상당부분은 분명 조선성리학이 짊어지고 가야 할것입니다.

유학은 사람을 바르게 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수신제가는 결국 '치국'과 '평천하'를 위한 포석입니다. 백성에게 예를 일러 수신 시키고, 효로써 제가시키고, 충까지 강요하여 수직적 가치에 익숙한 말 잘 듣는 백성을 만들어 놓으면 쉬운 통치(치국)와 더불어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평천하)할 수 있겠지요. 만약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군주만의 덕목이라 해석하더라도 군주를 위해 '통치에 대해 다루었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을겁니다. 게다가 우선 공자부터가 다른 성인들 처럼 백성 하나하나를 놓고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통치'해줄 '어진 군주'를 찾아다니지 않았던가요. 이런 '통치를 위한 학문'이란 말은, 유교는 결국 지배신분층이 피지배신분층을 다루는 방법론의 범주에 든다는 뜻입니다. '충효'가 피지배층을 위한 가치가 아니라 지배층을 위한 가치라는 것을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요? --ChatMate


3.7. PsyBaster의 답변 : 충과 효 그리고 예



盡己之謂忠이라는 구절(어느 텍스트에 있는지는 깜빡했지만, 논어, 맹자, 대학, 중용 가운데 한 군데에는 반드시 있습니다.)은 忠의 정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충이란 스스로를 다하는 자세가 바로 그 해석입니다. 맹자에는 저 유명한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오직 백성에게만 해당됩니다. 반면에 그것과 대비되는 다른 하나의 구절이 있습니다.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다. 이것은 바로 士에 해당됩니다.

예컨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것은 색이 바랜 별빛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게 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구멍에 거미줄 쳐질 정도로 가난해도 스스로가 생각하는 꿈이나 이상을 그리고 올바름을 버리지 않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하려는 사람들도 극소수이지만 존재합니다. 요컨대 현실적 이상주의자라고 하겠지요.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말은 경제에 휘둘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허황도 꿈 속에서 허우적 거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이상이 현실에서 실행되기를 뼈가 저리도록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士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마 맹자에 나올겁니다.) 스스로의 이상이 현실에서 실행될수 없다면, 그것을 자신에게라도 철저히 구현시키라고 말입니다.

요컨대 저의 해석은 인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충의 개념이 어느정도 왜곡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충성이라는 말은 원래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誠의 개념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만, 지금 여기서 맛뵈기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사계절의 순환이 조금만 어그러지면 사람들은 난리칩니다. 옛 사람들이 일식이 일어났다, 혹은 혜성이 출현했다라고 해서 난리부르스를 친것처럼 지금 우리들도 엘니뇨가 발생했다고 해서 난리칩니다. 그래서 自然은 조금도 자신의 일에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이상을 담은 것이 바로 입니다. (물론 이것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시간관계상 나중에 찾아보겠습니다. --;;;)


'충', 그리고 '효'가 '임금이', '부모가' 어떻게 하라는 말로도 쓰이나요? 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저 유명한 삼강오륜의 삼강은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임금과 부모는 신하와 자식의 근본이 되어야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저는 신하와 자식은 임금과 부모를 섬겨야한다는 해석은 오류라 생각합니다.) 만약에 임금과 부모의 행위가 신하와 자식의 근본 혹은 모범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공자의 저 유명한 정명론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신하와 자식은 스스로의 도리를 했는데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답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공자같으면 세번 잘못됨을 고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머금고 따라야한다고 합니다만.. 맹자는 인과 의를 갖추지 못한 군주는 보통 사람에 불과하니 처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맹자라는 텍스트가 자주 금서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인 혁명론입니다. (공자와 맹자의 사상사적인 변화는 제가 감히 이야기할 정도의 주제가 아니라 넘어가겠습니다. --;;;;)


그런데 충과 효는 미묘하게 다릅니다. 효에 관해서는 아직 공부가 일천하기 전에 말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일단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시스템으로 만든 것이 유가철학이고 그것의 표상이 바로 효입니다. 혁명을 주장한 맹자도 어버이에 대한 효 앞에서는 무너지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 유가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시키신 것이라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따라야 한다라는 효의 왜곡된 모습을 들이대면 저는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효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분명 라는 이름 아래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단 하나 아무리 훌륭한 이상을 지닌 정교한 이론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 된다는 일반론 뿐입니다. 좋은 토론거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만은..

어쨌든 지금까지 유가철학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주류가 되고, 성리학이 조선 600년을 지탱한 사회이론이 될 수 있었던 힘이 효, 바로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혈연이란 사람이 두 발을 대지에 딛을 때부터 생겨난 최초의 사람들의 네트워크이자 지금도 가장 기본적인 네트워크, 그리고 혼란의 시대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인위적으로 누군가가 조작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마음대로 그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는 덕목이 바로 효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가장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본성을 개념화 한 것 그것이 효라는 것이죠.

3.7.1. 부분추가 : PsyBaster


예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생각있으시면 허버트 핑가레트의 공자의 철학이라는 책을 읽어보십시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의 대부분은 그 책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여하튼 너무 이야기할 것이 많기 때문에 ChatMate의 반론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이 페이지를 꼼꼼히 다 읽어보지 않았기 떄문에 때마다 내용을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는 인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법이 없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의 억압적인 측면은 바로 이 세상에서 법이 지닌 억압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유도 책임이라는 제약이 없다면 방종이 될 뿐입니다.

ChatMate가 이야기하기를 현대에 통용될 수 있을만한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을 굳이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만 이해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한 바 있는데 읽지 못하셨군요. 죄송합니다. 읽지 못했습니다. ^^;;;;;; 맞습니다. 예라는 것은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예로 인해 발출되는 정서 역시 보편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예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최고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 아랍 철학, 기독교, 현상학, 심리학, 사회학 등등.. 수많은 학문 분야에서 예라는 것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의 깊이와 전통은 성리학이 선두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ChatMate가 이야기하기를 조선성리학에서 비롯된 예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되는 무엇이 아닐까 싶습니다. 악수 하고 나면 민증부터 까보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성리학이 왜곡된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페이지 어디엔가 결발동유의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당시는 지금처럼 1살차이 가지고 치사하게 나이가 많으니 적으니를 중요하게 논하지 안았습니다.. 오히려 민증부터 까보는 것은 왜곡된 성리학, 즉 윗사람이 스스로의 도리를 다하지도 않은채 오로지 명령만 내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유 체계와 1년 단위로 끊는 서구에서 유입된 근대 교육 체계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인 사단칠정논쟁의 주인공인 이황과 기대승의 나이와 학문적 성취도의 차이는 지금으로 따지면 은퇴를 얼마 안남은 노교수와 이제 갓 대학원에 들어간 학생간의 차이와 맞먹습니다. 지금의 시대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이 지도교수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반박할 수 있고, 그 사실을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하십니까.


유학은 사람을 바르게 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고 수신제가는 결국 '치국'과 '평천하'를 위한 포석입니다 그리고 이런 '통치를 위한 학문'이란 말은, 유교는 결국 지배신분층이 피지배신분층을 다루는 방법론의 범주에 든다는 뜻입니다. 라는 ChatMate의 이야기에 동의합니다.그렇다면 지배층 혹은 지도자가 존재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 만큼 다양하겠죠. 하지만 적어도 성리학에서는 지도자(지배층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것은 사회학에서 쓰는 개념이지 성리학에서 쓰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의 존재의의는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충효'가 피지배층을 위한 가치가 아니라 지배층을 위한 가치라는 것을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요? 라는 ChatMate의 이야기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동의는 두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는 현실적으로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쓰였다라는 기존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충효'라는 덕목은 오로지 지도자의 위치에 서고자 하려고 하는 이들에게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충효는 지도자가 될 만한 이드레게만 적용될 수 있는 가치란 말이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세워진 국가 시스템을 운용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감내할 수 없는 이들에게 충효를 백번 외쳐도 소용없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사회의 근간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투표일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생각을 커녕 어디로 놀러갈지 궁리만 하는 이들에게 충효라는 가치가 과연 적용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이상은 모든 이들을 교화시켜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하는데 있습니다. (물론 성리학이 민주주의를 외친 적은 없습니다만,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성리학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8. 핵심을 피해가는 반박이다 : ChatMate


철저하게 질문의 핵심을 피해가셨군요. 자식에게서 부모에게로'라는 한쪽을 향하는 가치의 어디가 철저하게 '쌍방간'의 소통과 관계있다는 것인지요? 일방통행적이 아니라니요.라는 질문에는 이렇다할만한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제발 혼자 하고싶은 말만 토해내지 마시고, 상대의 주장을 잘 읽고 지적한 바에 대한 적절한 반론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 유명한 삼강오륜마저도 구체적으로 충효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 충이 단 한번 언급되는 가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근거 제시 없이, 그 중 단 한 군데에만 나와있는 딱 한 구절만을 근거로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충의 개념은 왜곡되어 있다며 충의 정의를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그 마저도 '백성'과 士, 그리고 군왕을 차별적으로 구분하여 수직적 위상을 확립하는 유교의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 어디에 쌍방향적인 소통이 철저하게 보이고 있는지요? 이제까지 제 글을 읽어오셨다면 이것이 제 주장의 핵심이며 몇 번을 거듭 지적해온 것을 알 수 있으실텐데, 회피하지 마시고 이런 근본적인 문제부터 답변을 부탁합니다.

'충', 그리고 '효'가 '임금이', '부모가' 어떻게 하라는 말로도 쓰이나요? 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저 유명한 삼강오륜의 삼강은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동문서답이로군요. 삼강을 임금은 어떻게, 부모는 어떻게 하라는 말로 해석하더라도, 그것이 임금도 신하에게 '충'을 지켜라, 부모도 자식에게 '효'를 다하라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ChatMate의 글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만한 이야기가 아닌데 어째서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다울 것을 주장하는 유교의 한계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신분제 시스템에 있습니다. 답다는 말이 현재 직분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쓰이려면, 그 위치가 언제나 다른 것으로 전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학생일 때는 학생 답고, 직장인일때는 직장인 답다'고 한다면, 학생은 언제까지나 학생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직장인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한 직분은 선택이 가능하고 일시적인 것이지요. 반면 '좀 여자다워 봐라'라는 말은 상대를 억압하는 말이 될 수 있으며, '성희롱'으로 간주되어 법적 처벌을 받게 될 수도 있는 발언이 됩니다. 여성이라는 위치는 스스로 선택이 가능한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여성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전환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군왕이 되고, 신하가 임금이 될 수 있습니까? 아비와 자식이 그 위치를 서로 맞바꿀 수 있습니까? 그 위치가 언제나 역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체제를 유지하기 이해 현재 시스템을 강요하기 위한 사상이라는 제 지적에 대한 반론으로 PsyBaster 씨의 답변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유가철학이 조선과 아시아 일부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혈연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듯 다른 사상들과는 달리 그 출발점부터 '지배층을 위한 철학'이요 통치를 위한 윤리였기 때문입니다. 어버이가 시키신 것이라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따라야 한다라는 것은 효의 왜곡된 모습이 아니라 바로 효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이것 어디에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모습이 보이는지요?

분명 아무리 훌륭한 이상을 지닌 정교한 이론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 된다는 말 자체는 일반론이 될 수는 있겠지만, ChatMate조선성리학은 그 훌륭한 이상을 지닌 정교한 이론 축에도 못 들어가는 쓰레기라는 이야기를 이제까지 거듭 반복해오고 있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한 반론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많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읽고 싶은 부분만 읽고 답하고 싶은 부분만 답하는 것은 좋은 토론의 방법이 아닙니다. --ChatMate

3.8.1. 부분추가에 대한 반론

이미 반론이 끝난 다음, 지난 이야기를 수정하는 것은 별로 좋은 토론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동의하시는지요?

ChatMate의 주장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ChatMate의 이야기는 성리학이 말하는 '예'의 억압과 현대 법은 서로 다른 범주에 들어간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을 억압한다는 자체로서는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나, '지배신분층이 피지배신분층을 다루기 위한 도구'라는 것에서 크나큰 차이를 보입니다. PsyBaster 씨의 표현을 빌자면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예라는 것으로 피지배신분층을 조종하는 최고의 도구이고, 그리스 철학, 아랍 철학, 기독교, 현상학, 심리학, 사회학 등등 수많은 학문 분야에 비해 지배신분층이 어떻게 피지배신분층을 효과적으로 세뇌하고 억압하느냐'라는 점에 있어 그 선두에 서 있다ChatMate는 생각합니다.

결발동유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PsyBaster 씨가 '당시'의 범주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가 분명치 않습니다. 또 잡종 씨의 의견에 반박하며 말했지만 그럴듯하게 보여도 그 근본 출발점에서부터 어긋나있기 때문에 보이는 부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닌 법이지요 지금이 지도교수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반박할 수 있고, 그 사실을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말은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수직적인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수직적 권위구도가 무너진 근대화 이후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장유유서를 따지는 구시대적 모습입니까?

유학은 사람을 바르게 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고 수신제가는 결국 '치국'과 '평천하'를 위한 포석입니다 그리고 이런 '통치를 위한 학문'이란 말은, 유교는 결국 지배신분층이 피지배신분층을 다루는 방법론의 범주에 든다는 뜻입니다. 라는 ChatMate의 이야기에 동의한다고 하셨는데, 신분층이라는 말을 그냥 넘어가셨군요. 성리학의 배경은 수직적이고 고정된 신분제 사회입니다. 지배신분층은, 결코 지도자와 동의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될 만한 이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가치란 말이죠라는 말은 여기서 빛을 잃게 됩니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집권층에 충효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집권층이 다수국민을 위해 일처리를 대신하는 하인의 역할이라는 것이 이상적인 개념입니다. 투표일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생각을 커녕 어디로 놀러갈지 궁리만 하는 이들에게 충효라는 가치가 과연 적용될 수 있을까요라고 하셨는데, 당연히 충효라는 고리타분하고 썩어빠진 가치는 적용될 필요가 없지만, 그들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봉사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투표거부도 권리라는 말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강요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게다가 이들을 교화시킨다라는 말 자체가 함정을 안고 있습니다. 성리학은 바로 이렇게 어린 백성, 피지배신분층이 '지배신분층보다 어리석고 못났다'라는 사고 기반아래 생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어리석으니 내가 잘 가르쳐서 말 잘듣게 만들어야겠다는 철저한 우월의식이 수신제가(세뇌, 혹은 듣기 좋은 말로 교화)라는 치국과 평천하(집권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라는 발상을 탄생시킨 것이지요. '나와 그들이 같음'을 인정하지 않는, PsyBaster 씨 표현을 빌자면 '지도자 될만한 사람이 따로 있음'을 말하는 성리학, 민주라는 말과 정면으로 상치되는 성리학으로 민주를 가르친다는 것은, '이렇게 잘못된 사상이 있었다'는 반면교사라면 모를까 어불성설입니다.


ChatMate도 의견 한 가지만 더 추가하도록 하지요.

게다가 이것은 인위적으로 누군가가 조작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마음대로 그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는 덕목이 바로 효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가장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본성을 개념화 한 것 그것이 효라는 것이죠.

이는 마치 효심에 관련된 유전인자가 있다는 말 처럼 들리는군요. 가족복지나 부모교육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대부분의 자녀는 부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특별히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문화인류학적으로 가 중시되지 않는 문화권이 있다면 쉽게 반박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우기 선천적으로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르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성욕이 내재해 있지만, 그것을 무분별하게 발현한다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지요. 게다가 같은 논리를 적용하게 된다면 정말로 가장 깊숙히 존재하고 있는 본성인 식욕, 성욕, 수면욕이야말로 효에 앞서는 월등한 가치라는 말도 할 수 있겠지요.

3.8.2. 반론에 대한 재반론 : PsyBaster


지난 이야기를 수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라는 것 인정합니다.

ChatMate께서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신가라고 감히 여쭈어봅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리학을 싫어하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배층이 예를 통해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세뇌시킨다는 주장은 이미 도가에서 제기한 것이니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거니와, 저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그러나 예 역시 법과 마찬가지로 필요악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예는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법보다 필요악이 될 가능성이 적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權이라는 임기응변이 있어서 사람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예에 어긋나도 됩니다. 물론 중요한 일이라는 범주는 자의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세뇌나 억압은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아름다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가 하면 파시즘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가는 탁월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 통치의 첫걸음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질서의 불명확성은 법가가 법에 의한 통치를 내세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결발동유 이야기가 적용되는 시대는 성리학이 이상이 제대로 구현되었던 조광조의 등장부터 세도정치이전까지 입니다. 장유유서가 구시대적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마저 구시대적인 발상입니까? 노인이기전에 나와 같은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둘째치더라도 저는 분명히 지금의 꼰대주의는 왜곡된 성리학과 성급한 근대화의 결합물(윗 글에서는 근대 교육 체계라고 했던 부분을 정정하겠습니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가 쓴 글인 설 연휴가 지난 이후에 "公의 왜곡, 파시즘과의 혼약"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윗 글에서 저는 지배층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회학에서나 쓰이는 개념이지 성리학에서는 쓰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성리학의 이론을 지배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신분층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분이 교체될 수 없다고요? 제가 이야기했던 혁명론을 도대체 왜 무시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성리학은 맹자의 생각을 이어받은 학문 체계일텐데 말입니다. 왜 충효가 고리타분하고 썩어빠진 가치입니까? 제가 설명한 충의 개념을 모조리 무시하셨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스스로를 다하는 것이 바로 忠입니다. 스스로를과 다하는 사이에는 ChatMate께서 최선이라 생각하는 그 어떤 가치를 집어넣어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고리타분하고 썩어빠졌습니까? 효의 개념을 무시하신 것은 저의 설명이 미흡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로 넘어가서 제가 해석한 성리학의 관점에서는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여기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지도자는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한번도 한국 사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주제에 정치하는 놈들 모두다 썩었기 때문에 난 투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물론 고민끝에 내린 결론이라면 다릅니다만은...)에서 출발하는 투표 거부도 보통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 지도자가 아닌 백성의 위치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 체제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대다수가 최대한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선택될 수 있는 정치 체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은 민주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혁명(맹자의 혁명을 사회주의자들이 쓰는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시거나, 혹은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라는 개념이 옳고 성리학의 그것이 무조건 그르다고 하지 않기를 빕니다.)과 민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자녀는 부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특별히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라고 ChatMate께서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덕목으로 만들어 교육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심지어 오항녕선생님은(고려대학교, 민족문화 연구소 연구교수)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셔야 그제서야 후회를 한다. 더 잘해드릴걸이라고... 그 후회를 최소로 하기 위해서 효가 존재하는 것이다."

3.8.3. 현대사회에서 성리학이 갖는 한계 : ChatMate


최소무정부주의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부분적으로 그런 성향이 있음은 인정합니다. ChatMate개인주의자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는 설명과는 관계 없습니다)

'예가 필요악'이라는 발상은 흔히 말하는 '에티켓' 수준의 예의와 성리학적 예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에티켓이 성리학적 예의 부분집합이 될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자발적인 배려인 '매너'와, 타의에 의해 정립되었으며 지킬것이 '강요'되어지는 '에티켓'만 비교해 보더라도 '예는 필요악'이라는 말은 빛이 바라게 됩니다.

사실 장유유서는 '순서'만을 이야기할 뿐, 그 순서의 선후나 상하구분은 없지요. 삼강오륜에 '오륜은 사실 수평적이다'라는 말은 ChatMate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리학은 이를 왜곡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의계급사회라는 상명하복 위주의 권위질서는 구시대적입니다. 성급한 근대화의 결합물이라고 하셨는데, 근대화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면 그 부분에서는 근대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는 성리학적 질서로 인해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겠지요.

성리학에서 지배층이라는 그러한 용어를 쓴다는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성리학이 명백히 지배신분층을 위한 학문이라는 것을 설명했을 때름입니다. 그 '혁명론'에도 불구하고 신분이 교체될 수 없음을 사례를 들어 설명한 것을 왜 무시하고 지나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충효가 고리타분하고 썩어빠진 가치임인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충효의 대상 - 위계질서의 윗쪽에게만 바치는 단방향적이고 일방통행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차 설명하였고, 그 부분은 위에서 인정하셨는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논어 이하 문헌들에서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스스로를 다하는 것이 바로 忠임을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 이상, 전후문맥 없이 잘라 어느 한 구절에 대해석만을 기본으로 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忠, 임금이 천민에게 忠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몇 번을 거듭 물었는데요. ChatMate가 최선이라 생각하는 어떤 가치를 넣어도 무방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반대로 ChatMate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가치를 집어넣더라도 성립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효에 대한 개념도 무시한 적이 없고 하나하나 반박하였는데요.

말씀하셨듯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합니다. 투표 거부도 보통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 지도자가 아닌 백성의 위치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는 말씀처럼 이를 전락으로 보는 것이 성리학적 시각의 한계입니다. 투표권은 국민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대통령도, 후보자도 1인 1표씩 투표하게 되어 있는 '누구나 평등'한 부분이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번도 한국 사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사람의 투표 거부도 ChatMate는 소중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용기는 기를 수 있고, 고민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 민주 사회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이 '혁명'을 말한다 해도, 누구에게나 왕이 될 기회가 열려있는 것은 아니며, 국민 누구나 '피선거권'을 갖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대통령은 왕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을 대표하여 행정을 담당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지배하는자가 아닙니다. 정치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은 바로 평등과 주체성을 인정하는 '민주'가 아닌, '민본'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자녀는 부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특별히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라고 ChatMate께서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덕목으로 만들어 교육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사람의 가장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본성을 개념화 한 것 그것이 효라는 앞선 말씀과 정면으로 상치됩니다. 게다가 때문에라는 말로 설명해야할 수 있는 이유로서 충분치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살하려들지 않기 때문에, 자살을 덕목으로 만들어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효를 교육시킨 것은 '일견 그럴듯해서 먹혀들어가기 쉬운 지배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오고 있지요.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써 말입니다.


읽다 보니, 의견차이가 나는 이유를 발견한듯 싶습니다. 개인주의에서 출발하는 '민주' 개념을 기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근대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높은 위치에 두는 ChatMate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려우셨을법도 하군요.




3.9. 성리학은 쓰레기가 아니라 소중한 우리의 문화 유산입니다. : PsyBaster



성리학의 모습 어디에 쌍방향적인 소통이 철저하게 보이고 있는지요?라는 ChatMate의 반박에 그것은 저의 오류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특히 저 강조하신 부분을 보면서 언어 선택을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는 PsyBaster입니다.)그러나 저는 성리학과 민주주의 혹은 소통을 중시하는 다른 이론체계들과의 비교 속에서만 오류를 인정할 뿐입니다. 시대적인 맥락속에서 성리학의 모습이 철처하게 (이것은 오류가 아닙니다.)구현된 조선시대를 바라본다면 동시대의 어느 나라들보다도 쌍방향적인 소통이 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정치보다 조선시대의 정치가 더욱 소통이 원활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도정치이전 성리학이 동맥경화증에 걸리기 이전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붕당정치는 지금의 정당제와 거의 같은 것이고,왕의 권력은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 지닌 권력보다 근본적으로 미약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윗 글에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과 같은 일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세계의 다른 나라로 범위를 확대하기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한국사회는 조선시대보다도 의사 소통이 막혀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사소통은 인터넷과 같은 문명의 이기가 아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태도입니다.

단 한 구절에만 나온 글이라해도 그것이 성리학자들에게 충의 정의라고 인정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의 해석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있는 부분이 논어와 맹자에 여러 군데에서 등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성리학자들이 공부한 끝에 주석을 달아서 이것이 바로 충이다라고 정의 내린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정의는 지금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충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잘못알고 있는 걸까요? 설마 성리학자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자신의 직분과 도리를 다하라는 삼강과 정명론이 스스로를 다하라는 충의 개념의 하위 범주라는 것을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만. 군주는 군주의 도리를 행하지 않으면 군주가 아닙니다. 저의 설명이 미흡했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은.....

물론 부모가 자식에게 효를 다하라는 덕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가지 사실을 전제하고 효라는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죠. 재아가 왜 번잡한 삼년상을 치루는지 공자에게 묻습니다. 이에 공자는 재아가 仁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적어도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갓난아기때 삼년의 사랑을 받았으면 그 보답을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냐고 공자는 이야기합니다. 요컨대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은 누가 시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혹은 동물이라면 행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성애는 그렇다쳐도 설마 모성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그러므로 효라는 덕목은 부모가 자식에게 강요하는 일방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식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버이로부터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요

물론 유교의 원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지배계급을 위한 이론이라는 것, 십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에는 수많은 변형이 존재하죠. 그 가운데 맹자의 이론은 무조건적으로 군주, 士, 백성의 위치가 고정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맹자는 혁명을 이야기합니다. 군주의 도리를 행하지 않는 군주는 처단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을 반정이라고 일컫죠...그러나 효는 다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자연이 정해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이 내용은 분명히 위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성리학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가 지배계급을 위한 논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어이없는 생각이라고 생각됩니다. 군주를 위한 이론이었던 서양의 왕권신수설이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성리학 아니 유학이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유체계이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들어오겠죠. 그런데 중국에는 유학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도가, 법가, 불교등의 이론도 나름대로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론들도 얼마든지 지배계급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동아시아 문화권을 유학이 지배했던 이유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그 원동력이 효로 대표되는 혈연이라는 자연의 힘을 자신의 이론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ChatMate께서 성리학을 쓰레기라고 부르고 싶으시다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시골의 훈훈한 정 역시 가식에 불과하다고 혹은 연장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역시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조건반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시골의 훈한 정과 노약자에 대한 공경은 그야말로 성리학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3.10. 그건 성리학 덕분이 아닙니다 : ChatMate

ChatMate는 성리학이 분명 '단방향적임'을 이야기하였고, 그에 대비되는 다른 것들을 제시하였습니다. 다른 이론체계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하여 성리학의 잘못된 부분이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비교가 불공정하군요. '동시대'의 다른 나라와의 비교가 아닌, '다른 가치와 이념이 철저하게 구현된'나라들과 비교하는 것이 사상 자체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한 공정한 비교가 아닐까요?

지금의 한국 정치보다 조선시대의 정치가 더욱 소통이 원활했었습니다라니, 어느 소통이요? 대한민국의 국민과 지도자간의 의사소통이, 천민과 임금간의 의사소통만 못했나요? 조선시대는 갖바치가 군왕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성리학 시대에 역성혁명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단 한 구절에만 나온 글이라해도 그것이 성리학자들에게 충의 정의라고 인정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에 대해서도 ChatMate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일관된 논지가 전개된 것이 아니라면, 단 한구절의 의미를 확대해석 하는 것은 충분한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스스로를 다하는것만이 충이라면 그것은 관계를 중요시하는 가치라고 보기 어렵겠지요. 관계를 맺을 '상대방'이 고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효의 전제가 된다면, 왜 서로 주고받는 쌍방향적 가치인 사랑을 이야기 하지 않고 굳이 자식에게만 일러 를 말했을까요?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도 동물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자연스러운 일만은 아니며, 인간에게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다소 조악한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영아살해', 자기 아이를 먹는 문화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하셨는지요? 이는 미개라 치부할 수만은 없는 배경이 숨어 있어 오랜 세월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모성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모성애가 선천적인 것인가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논란이 있어왔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가족학이나 부모교육론 등을 보게 되면 모성애는 학습되는 것을 정설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효는 결코 그저 일방적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간의 '사랑'이 아닌 '효'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일방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을 반정이라고 일컫지만, 역성혁명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분계층간의 이동은 없었습니다. 맹자를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억지로 끼워맞추려 애써도 성리학이 '갖바치가 임금이 되고, 무당의 자식이 임금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상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자연이 정해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 바꿀 수 있습니다. 효만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아동학대나 가정폭력을 범죄로 보고, 폭력을 행한 사람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거나, 양육권 포기를 권고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PsyBaster 씨의 말과는 다르게, '부모 같지 않은 부모'는 버리고 새로운 양부모나 양육시설을 소개하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군왕과 신하, 백성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그리고 남녀관계 모두에 있어 성리학은 문제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서양의 왕권신수설이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이유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왕권신수설이 통용되었던 것은 비단 서양만이 아니라 '천자'를 이야기하던 동양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에 성리학은 보다 세밀하게 인간을 나누어 각자의 역할을 정의하고 강요해 왔다는 차이가 있겠지요. 이러한 부분 역시 성리학의 뿌리를 의식 깊숙히 박히게 하였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성리학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에 대한 부분을 부정당했지만, 나머지가 끈질기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또한 서양의 근대화는 '시민의식의 성장'에 의해 혁명이 이루어진 아래로 부터의 자발적 근대화였던 반면, 한국의 근대화는 갑오개혁이나 단발령등의 일면에서 알 수 있는 위로부터 이루어진 수동적 근대화였습니다. 때문에 한국은 시민의식이 성장이 이루어질 시간과 계기가 미처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저는 조선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원인을 이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가나 불교 사상이 지배계급을 위해 사용되기 불충분한 면을 앞서 말한 적이 있는데요? 물론 정치적으로 변용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출발점부터 '체제 유지'와 '통치'를 위한 학문이었던성리학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PsyBaster 씨의 발언에 대한 패러디로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예라는 것으로 피지배신분층을 조종하는 최고의 도구이고, 그리스 철학, 아랍 철학, 기독교, 현상학, 심리학, 사회학 등등 수많은 학문 분야에 비해 지배신분층이 어떻게 피지배신분층을 효과적으로 세뇌하고 억압하느냐'라는 점에 있어 그 선두에 서 있다라는 말도 한 적이 있었지요.

성숙하지 못한 시민의식에서는 그 밖에도 많은 문제가 파생하게 되는데, 해당 문제가 불거질 때 그때그때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을 반박하자면, 정과 노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성리학에만 있는 가치관이 아닙니다. 공감할 만한 내용이 있다 해도, 현대사회에서 통용될만한 합리성과 설득력이 있거나, 문화권을 뛰어넘는 - 타문화권에도 이미 존재하는 - 보편적인 내용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성리학적 가치관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라는 말과 ChatMate는, 현대에 통용될 수 있을만한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을 굳이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만 이해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앞서 이미 여러차례 거듭한바 있습니다.

그렇게 성격이 다른 것들까지 공통적으로 한데 묶어놓고는 이분법적인 판단을 강요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화법이라는 말도 꺼낸 적이 있었지요.


ChatMate의 주장의 핵심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ChatMate는 성리학의 문제점을 '상호존중이 아닌 수직적이고 단방향적인 가치'를 바탕에 두었다는 점으로 지목하였으며, 성리학적 가치에 기반한 권위와 위계질서가 갖는 폐단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비단 '충(忠)'만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에 대해, 현대 사회는 수평적이고 대등한, 평등과 상호 존중에 기반한 가치를 필요로 하며, 구시대의 시스템을 위한 가치규범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어느정도 비슷하게 맞춘다 해도, 결국 그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주장의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는 반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성리학이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에 대해, 수평적이고 대등한, 평등과 상호 존중에 기반한 가치라는 것을 누군가 입증할 수 있다면 ChatMate의 주장은 철회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성리학을 쓰레기로 부르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을 것입니다.

p.s. 반론을 작성하는 사이 내용을 조금 고치셨군요.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부연할 것은 부연하겠습니다.

3.11. 왜곡된 성리학을 성리학의 본질로 착각하지 말아주십시오 : PsyBaster


1. 예가 필요악이라는 부분은 ChatMate께서 성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예는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억압하는 도구라고 이야기하신 것에서 시작합니다. 자발적인 배려인 매너 역시 예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성리학자들이 진정한 예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바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인 仁에서 비롯된 예야말로 진정한 예라고 그들은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자유에 부과되는 책임과도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자발적으로 배려하는 매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너있는 남성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매너를 갖추지 못한 이는 연애조차 못할 수도 있을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면 모르지만, 적어도 죽도록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남성은 매너를 갖추어야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매너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매너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식을 취해야하는지는 둘째치고 자발적으로 배려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모성애마저도 학습이라고 하신 분께서 자발적으로 배려하는 마음 역시 학습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시지는 않겠죠. 그렇다면 매너없는 사람이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학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종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찌보면 강요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에서 보이는 강요적인 모습은 바로 이러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왜곡된 성리학에서는 앞 뒤 사정을 몽땅 생략한 채 강요만이 예의 전부라고 이야기합니다.

2. 나이의 계급사회는 세도정치라는 파국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때 시작된 근대화이후에야 비로서 나이의 계급사회는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나이의 계급사회가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물론 그것의 씨앗은 성리학에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씨앗에서 나이의 계급사회라는 악마의 식물을 자라게 만든 정원사는 성급한 근대화라는 말입니다. 제가 윗글에서 이야기했을텐데요. 1년씩 끊어서 선후배 사이를 엄격히 따지는 일은 근대 교육이 들어온 이후에 발생한 것이라고요.

3. 단순한 논리상으로 忠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다하는 일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겠군요. 그러나 그것은 ChatMate만의 생각입니다. 성리학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ChatMate께서는 자신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이상으로 삼습니까? 이상은 당연히 스스로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가치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ChatMate께서는 논문중심주의자이십니까? 논문이 아닌 글들을 모두 쓰레기 입니까? 논어 이하 문헌들에서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스스로를 다하는 것이 바로 忠임을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 이상, 전후문맥 없이 잘라 어느 한 구절에 대해석만을 기본으로 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는데 한번이라도 논어나 맹자를 읽어보셨다면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해야할 것입니다. 물론 논어나 맹자에서도 가끔씩은 일관되게 충, 예, 효, 인들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지만, 책의 편집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진 제자들의 필기의 단편을 모은 책이 논어, 맹자이기 때문에 일관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긴 맹자는 그런 것이 덜하기 합니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논문 속에서 그런 단편들을 모아서 일관된 체계를 세우려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설명들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ChatMate께서는 제가 인용문구를 군데군데 잘라서 멋대로 말을 엮어나가는 것처럼 보실수 있겠습니까?

4. 그리고 효에 대한 무엇을 반박했다는 것입니까? 효심에 관한 유전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효라는 덕목이 있는 것입니다. 모성애는 후천적인 것이다. 비록 후천적인 것이라 해도 모성애는 존재합니다. 영아살해도 있다. 영아살해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양부모는 부모아닙니까? 효는 일종의 Give&Take입니다. 그래도 정 성에 차지 않으시면 효를 가족간의 사랑이라고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모가 일방적으로 훈계하는 것이 효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왜곡된 성리학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강력한 듯이 보이는 반박에 대해 반론을 펼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자녀는 부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특별히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덕목으로 만들어 교육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는 제 말이 , 이는 사람의 가장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본성을 개념화 한 것 그것이 효라는 앞선 말씀과 정면으로 상치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효에 관련된 사람의 가장 깊숙히 존재하는 본성이 자식이 부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만 해당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전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모성애나,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선천적인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가지고 그러한 본성이 없다고 하실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한가지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사람하고 원숭이하고 사는 모습이 같습니까? 개미와 참새의 사는 모습이 같습니까? 매화와 대나무의 사는 모습이 같습니까? 전혀 다릅니다. 그것이 바로 본성입니다. 지금 ChatMate께서는 과학주의의 세례를 너무 듬뿍 받으신 것 같습니다. 필시 ChatMate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뭉떵그려 말하지 말고 본성 가운데 무엇인지 정확히 하라."라고 말입니다. 이미 정확히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가장 깊숙히 존재하고 있는 본성은 바로 혈연을 중심으로 뭉치는 현상입니다. 성리학자들에게 본성은 지금으로 따지면 현상을 탐구하여 얻은 가설이나, 이론, 선험적 추론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맹자가 이야기하는 차마 어쩔 수 없어하는 마음은 어린 아이가 뽈뽈뽈 우물에 빠질때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만들어낸 사회이론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얌전하게 사람의 가장 깊숙히 존재하고 있는 본성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무리를 지을 줄 아는 동물들이 존재한다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본성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5. 혁명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 양반의 숫자가 총 인구의 반 이상이 된다는 사실을 아마도 배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돈으로 양반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 까지 들으셨을 줄 압니다. 이것도 일종의 역사 왜곡인데, 양반은 교육을 받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삼년상을 치루면 아무리 평민이라도 양반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금전적인 제약조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많이 벌은 부농의 경우는 어떨까요. 자신들의 재력으로 자식들을 과거에 합격시키면 양반이 됩니다. 문벌? 따집니다. 그러나 장원급제하면 문벌 이상의 힘이 평민출신 부농의 아들인 장원 급제자에게 돌아갑니다. 지금 한국의 교육열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꼭 피만 흘려야 혁명입니까. 교육을 통해, 일정한 형식의 예를 지키는 것에서 평민들은 충분히 관료라는 특권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맹자의 혁명론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혁명을 사회주의자의 혁명으로 개념을 혼동하지 말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혼동하셨더라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모든 이는 평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평등합니까? 가난의 대물림, 부의 대물림으로 인해 아직도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물론 이념상으로는 만인은 평등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성리학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맹자는 분명히 요와 순과 같은 고대의 문화 영웅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성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지도자와 백성들의 차이는 신분상의 불평등이라고 해도 달리 반박할 여지는 없습니다만, 그것은 단지 이념이 아닌 실제 우리에게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사회과학적 관찰의 성격이 짙다는 것을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왕이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는 권력을 비교할 때 분명히 왕보다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6. 노인과 훈훈한 정이 보편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자신들의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놀러갔다가 돌아와보니 부모가 죽어있었던 사건, 혹은 미국에서 모든 사건들, 심지어 너무나 자잘한 사건들 마저 법으로 처리함으로써 훈훈한 정이 사라진 현상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세계에서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는 이들은 오로지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담배불을 언제 어디서라도 빌릴 수 있는 풍습이 그렇게 보편적이란 말입니까? 물론 이러한 것은 반드시 성리학의 기반에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이 성리학의 이상이 철저하게 구현된 조선시대 덕분에 오직 한국에서만 남아있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7. 저는 이 반론을 쓰기전에 분명 철저하게 쌍방향적인 소통이 성리학에 보인다는 것은 저의 오류라고 시인했습니다. 지금 다시 오류를 시인합니다. 성리학이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에 대해, 수평적이고 대등한, 평등과 상호 존중에 기반한 가치의 측면에서는 분명히 이론상으로 민주주의 이론을 쫓아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민주주의가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상호존중의 가치에 있어서 저는 하나도 민주주의에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평등 물론 훌륭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쓰레기라고 하는 생각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리학적인 유산이 그나마 잘 보존되어있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 간의 인간관계와 자유와 평등을 자신들의 신조로 삼는 서구사람들의 인간관계 가운데 어느쪽이 더욱 행복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습니까?


저는 이념은 현실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심연 속에 던지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최고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성리학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ChatMate께서 왜곡된 성리학을 성리학의 본질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ChatMate님의 이야기는 중우정치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4. 김동춘의 유교와 한국의 시민의식


ChatMate가 고수하려고 하는 이념지향적인(이상적인)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어졌던 사회가 실재했는지를 고려해보면 우리 조상들의 사상적 궤적과 학문적 지향이 담겨진 성리학을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무모해보이는군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역사적인 관점에서 길게 보면 성리학이란 학문(통치철학)도 나름대로 현존했던 사회(신분제 사회)에 적합한 사상(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의 평가를 거쳤을 것이며 그 시대 사람들이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합리성(마치 자유와 평등을 현대사회에서 요구되어지는 것들로 보듯이)을 포함하고 있었을거라는 말이지요. 즉 현대사회에 조선시대에 맞추어져 있던 성리학적 이념들을 끼워맞추려 하면 안되겠지만 성리학적 이념이 자연스런 조정기간을 거칠 수 있었던 기간이 우리 역사에서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사라진 점이 이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잡종님이 이야기 하였듯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자율적으로 우리의 사상을 현실에 맞게 변용할 수 있었던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성리학이 현대사회에서 의미있는 사상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이미 박제가 되버린, 살아 생동하지 못하고 있는 성리학에 대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잣대로 평가절하해버리기에는 성리학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을 검증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학문적 성과라고 하더라도 우리 조상들이 성리학이란 틀을 통해서 이룩해낸 사상의 궤적은 훌륭한 것이기에 오늘날 연구하는 분들이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Echo
PsyBaster가 성리학이 조선사회에서 보여준 폐단에 대하여 보다 큰 범주로서의 유교적인(보편적인) 가치관으로 ChatMate의 논점을 비켜가려하는 부분은 조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유교는 우리가 종교로 분류할만큼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박애주의를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리학이 조선시대에 고도로 발달하면서 17세기 후반 등장하게 되는 예론이라든가 보다 더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신분제의 강화는 분명 시민사회로의 이행을 더디게 한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한게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성리학의 이상론이 인간관계에 있어 상호존중의 가치를 근본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빈약해 보인다는 점또한 지적하고 싶습니다. 앞서 ChatMate가 지적하고 있듯이 실제로 성리학적 가치관에 의해 유지되어진 조선시대의 모습에서 -상호존중의 상대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가 되겠습니만- 백성과 군주의 상호존중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양민과 양반간의 상호존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개인과 개인간 마을과 마을간에 있었던 공동체의 질서와 상호존중은 성리학의 도덕론이 반영되어진 결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성리학을 실현시키는 주체(양반)의 도덕적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이마저도 성리학 체제의 결함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Echo

글쎄요. 저는 ChatMate께서 충과 효라는 일반적인 유교의 개념을 쓰레기라고 치부한 것에 대해 변호하고자 할 뿐이었습니다만... 그리고 물론 성리학의 이념은 시민 사회를 더디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감합니다. "옹정제"라는 책에서 옹정제를 극구 칭찬한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그의 청렴한 독재는 백성들에게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았다는 맥락의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모든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바로 유가의 궁극적 이상입니다. 그리고 백성과 군주의 상호 존중의 문제에 관해서는 성리학의 정치적 주체의 도덕적 불완전성 때문에 이마저도 성리학 체제의 결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는 이미 법가에 의해 제기된 문제입니다. 맹자의 학통을 이어받는 성리학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그래서 군주가 성인이라면 최선의 정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군주, 그리고 그 주위의 지배계급들의 도덕적 수양에 대해 큰 비중을 듭니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결점이 있기 마련이죠. 요컨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리학의 이상론이 상호존중의 가치를 근본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현실, 이상은 이상이기 때문이죠.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이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은 현실적으로 중우정치의 탈을 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서 아직까지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이죠)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야 맙니다.

그리고 법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겠는데요... 법가는 최선의 통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중간정도 혹은 능력이 떨어지는 군주가 나라를 통치해도 어지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을 이야기합니다. 대로만 하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죠. 그래서 대개 중국의 정치 방식은 겉으로는 유가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법가를 따른다고 합니다. 우리 몸으로 치자면 법가라는 뼈대위에 유가라는 피부가 있는 것이죠.. PsyBaster-
(글을 좀 손질했습니다. 저장한 뒤에 다시 읽어보니 무언가 빠진 느낌이 있어서 말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좁게는 의사결정구조의 하나이며 정치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하는데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PsyBaster 님께서 성리학적 이상론이 현실에 적용되는 데 있어 극복해야 할 점이 있었다는 지적에는 일단 동감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이자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의로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우리가 왜 성리학과 민주주의를 같은 범주로 놓치 않는가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위에서 PsyBaster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설정에서 인간에 대한 상호존중을 의와 예로써 설명하려는 다소 윤리적인 철학이론인 성리학이 조선시대 지배계층으로서 정치를 이끌던 사림에 의해 그들의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하게 되면서 그들의 정치철학의 근간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즉 평등과 자유의 이념이 용납될 수 없었던 신분제 사회에서 성리학이 그러한 가치관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할 지라도 이는 이미 현재 위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실적 성리학의 한계와는 동떨어진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주체가 가지는 상관관계는 PsyBaster님이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말이고 하면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정치체제입니다. ChatMate가 처음에 주장하려 한 부분처럼 성리학이 조선시대 계급과 신분의 차별을 인정하고 그 차별에서 각자의 신분에 맡은 역할과 관계를 설정하는데서 양반사림에 의해 주창되어졌다면(물론 그들에 의해 본래의 의도가 왜곡되어졌다고 할 지라도) 이는 실제로 성리학이 행위주체의 의지에 의해 나타내보여진 하나의 실질적 측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로 조선시대 성리학이 도입되어진 그 시기가 우리가 성리학이 어떤 이론인지 실질적으로 평가하고 고찰해볼수 있는 역사적 증거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Echo는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리학이 가지는 다른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었던 역사가 일제 강점기와 해방전후의 혼란으로 인해 사라진 것을 무척 안타까워 했었습니다. 대체로 Echo는 윤리적 이념의로서의 유교적 전통 ( 인의예지라든가 충효의 윤리이념)은 서구적인 인간관계가 아닌 동양적인 인간관계의 설정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에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보는 반면 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이 보여주었던 기존사회체제의 강화로서의 역할에는 ChatMate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합니다.--Echo

짝짝짝 정말 오랫만에 노스모크에서 토론다운 토론, 논쟁다운 논쟁을 봅니다. --김우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무척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퇴원하였으니 천천히 정리해 나가겠습니다. --ChatMate

이 페이지를 성리학 일반에 대한 페이지로 하고, 지금 내용을 선성리학토론으로 옮기는 걸 제안합니다. -- Cafe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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