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럴리즘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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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에는 필명을 남기지 않다가 뒤늦게 필명을 달았습니다. --조원장

제가 전에 임의로 편집(?)한 것입니다.
전체 논의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여기시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도록 제목을 달았습니다. 서울대 교지 '관악'에 실렸던 글입니다. --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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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삶, 당신들의 천국 그리고 반란 - 구체적 진술을 추구하다 中에서 - 김상태

■ 리버럴리즘은 바닥에서부터 분쇄되어야 한다.
...중략...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오기로 하자. 연애, 사랑, 섹스, 결혼 이것들은 대학인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행복이란 개념이 강조되고 있는데 위의 네 가지는 그 중에서도 핵심을 이룬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성공이란 개념을 더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어떤 고시 준비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내 꿈은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는 것 하나, 그리고 너 - 그가 좋아하는 비싸고 예쁜 여성 -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 그 두 가지야.’
하도 통렬해서 박장대소했던 것이 기억난다. 실로 산뜻하지 않은가. 성공과 쾌적하고 안락한 사랑, 그리고 가정.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대학의 소망이자 꿈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은 이것 말고는 낙이 없다. 사람들은 그게 본래 사람이 가지는 행복의 개념이라 생각하지만 삼백 년밖에 안된 자본주의 시대 이래로 넉넉한 소비가 삶의 기준이 된 다음부터 사람들에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여하간 시절이 이러하므로 사랑, 연애, 섹스, 결혼은 이제 지상명제가 되었다. 뭐니뭐니 해도 대학인은 이것을 둘러싸고 최소한 4년간의 전쟁을 치뤄야 한다. 여기서의 관심은 이 전쟁에 맞서는 제 전략들이다. 알다시피 그건 다양하다. ...중략... 이런 제 전략은 반드시 일정 수의 성공과 일정 수의 실패를 결과하게 돼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압도적인 수가 실패한다. ...중략... 결국 주어진 확률 내부에서 동일한 사람들의 잘라내기 게임이 되는 것이다. 도대체 이 무모한 전쟁이 이다지도 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체제를 둘러보았을 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한 조각의 빵밖에 없다면 둘러선 열 사람은 싸워야만 한다. 사랑과 결혼에 실패하면 인생은 그것으로 끝장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사회가 주변부 국가에서 얼마나 벗어나는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아메리칸 드림, 구라파 드림의 현실이 이 퍼센테이지를 그렇게 높여 놓은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다. 지옥의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자와 부채 속에 헐떨대는 농민이 그렇듯, 우리 또한 그런 고통 속에 있다는 것만 분명히 하면 된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 고통과 연관하여 언제부턴가 이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리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들을 리버럴리즘과 리버럴리스트이라 부른다. 먼저 이것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교묘함까지도!
리버럴리즘의 핵심주장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다. 특히 근거없는 봉건적 의식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그러해야 한다. 성은 이 중에서도 중심적인 테마를 이룬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그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얘기다. 그 밖의 몇 가지가 더 그러하다. 여성억압적인 순결 이데올로기의 타파, 동성애에 대한 편견 타파 등등. 하지만 이들은 한 발짝, 아니 수십 발자국 더 나간다.
‘포르노그래피의 전면적인 합법화, 빨간 마후라 만세, 유흥가와 유흥문화 또한 만세, 원조교제 인정 - 최소한 나쁠 것 없다.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치장 문화에 대한 찬양’
단 하나 강압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양심을 담보하는 것인데, 말인즉 강제가 아닌 한 이것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생활 속에서 상존하는 그들의 성에 대한 태도이다.
‘원하면 파트너와 동거생활을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와 부담 없이 섹스를 나눌 수 있다. 하고 싶다면 불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다. 잘라 말해서, 강제만 아니라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성을 누리겠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엄청나게 위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십 년 동안 이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왔다. ‘애인’이란 드라마가 시청률을 휘어잡고, TV토크쇼는 짝짓기 방법에 대한 얘기를 빼고는 존재할 수 없다. 일체의 성적 가십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유의미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게 다 어찌된 일일까.
이런 논리는 앞서 말한 다양화 전략들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대학인들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건 이 논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온통 떠들썩하고 뒤숭숭하다. 최고로 좋지 않은 것은 이 논리가 ‘해방’이나 ‘투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리는 굉장히 자극적이고 도발적이며 어쨌든 정당성을 근거짓는, 그럴듯한 논증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게 맞는 얘기라면 우린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 보면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들이다. 나아가서 그 논리야말로 지독하게 억압적이다. 말했다시피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얘기이다. 우린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한 남자가 있어서 한 여성과의 동거생활을 결정했다고 하자. 나는 대번에 다음 사실이 궁금해진다. 그들은 단칸방이라도 챙겨야 할 텐데 이 비용은 어디서 나오며 매일을 살아가야 할 생활비용은 또 어디서 나오는가? 그들 중 누군가가 부자거나 아니면 궁색하기 이를 데 없이 살아야 한다. 만일 둘 중의 하나가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면 이것이 가져올 결과는 몹시 심각해서 이는 리버럴리즘이 주장하는 자유와 크게 부딪칠 수 있다. 결국 부자가 아닌 한 동거란 선택하기가 아주 어려운 대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전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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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리즘이라는 논리의 핵심은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눈치 보지 말고 누리자’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리버럴리즘이 모토로 깔았던 ‘해방’이란 개념과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이건 사기다. 근본적으로 90년대를 넘어선 한국자본의 체제합리화 전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유달리 리버럴리즘의 허구를 강조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누리자’고 했을 때 가장 유리한 고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대학인들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혹간 대학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 전형적인 표증이 바로 리버럴리즘이다. ‘나는 누구하고나 잘 수 있어’라고 뻐기는 사람들은 많이 보았다. 그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학인은 가장 팔자 좋은 백수일 수가 있다. 최고로 나쁠 때 그렇다.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 사회 최고의 노동귀족일 것이며 좀더 노력해서 운이 좋으면 휘황찬란한 지배계층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마음먹을 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조금도 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에누리 없는 유물론인 것이다.
...중략...
대학인들은 분명히 해야 한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도 일종의 재화이다. 무언가 잘되고 있다면 계속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끄럽고 죄스러운 줄은 알아야 한다. 거의 예외없이 그 ‘잘됨’은 자신이 대학생이라고 하는 유리한 조건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저 알아서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은 정말 그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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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른 글입니다. --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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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경우 개인주의적 발상(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겠다는 생각을 지칭한 용어입니다. 일반적 의미와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은 위험할 수 있다. 경제 구조는 이미 초국가적인 권력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이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미 마르크스 등은 사회주의와 계획경제를 통하여 새로운 경제 구조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공산권 국가들은 대안 없이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나, 그런 주장은 근시안적인 역사 안목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자본주의 체제가 권력층의 체제 유지에 더 적합하고,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풍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이상일 수는 없다.(지금 보니 반론의 여지도 있겠군요) 반면 자본주의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인간 소외, 개성 말살, 경제를 통한 권력의 재편, 불공정한 부의 분배, 무한 경쟁, 환경 파괴 등 개인주의의 존립 자체를 부정할 만한 폐해들도 많다. 예를 들어 자유 경쟁의 논리는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불평등한 경쟁을 유발하는 것을 간과하고 사회 진화주의 같이 그럴 듯하게 과학이론을 끌어들여 인간을 짐승만도 못한 이기주의의 화신으로 몰아 세우고는 자유 경쟁만이 가장 공정하고, 결과적으로 공동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곡해된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학력주의가 당연시되어, 학력이란 기준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학력주의와 자유 경쟁의 논리를 접합해서 어린 학생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해야 할 교육이 경제 수단으로 전락하여 아이들을 일하는 기계, 돈만 아는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 경쟁이 얼마나 환상인가 하는 예를 보자. 얼마 전 서울대 재학생의 부모 직업 조사 통계 자료를 보면, 관리직이나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일반적인 직업 분포에서의 평균을 크게 상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정치인, 법조인, 의사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힘을 가진 사람들의 자녀들이 높은 수준의 학력을 얻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결국은 경제력, 즉 돈이 학력을 결정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다시 말해 자유 경쟁은 환상이다. (어떤 학원 강사님께서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충분한 자본과 시간이 있다면 누구나 서울대에 적어도 연고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이 외에도 한국 사회의 병폐는 누구나 쉽게 말하듯이 여기저기 널려 있으며 이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한다면 한국인 그 누구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도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나, 몇몇 선진 복지 국가의 경우 교육 과정에서 경쟁을 부추기지 않고, 타인에게 봉사하는 가치를 심어주려고 노력한다고 들었다.) 이런 사회에서의 생활은 개인주의가 추구하는 소극적인 도덕 규범, 다시 말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기준 자체를 지킬 수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남에게 피해를 안 주고 나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나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좋은 직장을 얻었으며 그래서 돈 벌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한국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아무런 인식이 없는 사람이거나, 인식을 하고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거짓말을 하여 남을 현혹하려는 수작이거나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비겁하게 개인주의의 탈을 쓴 이기주의자일 뿐이다.(감정이 격할 때 쓴 글이라 표현이 과격하네요. 하지만 고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설프게 개인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살 경우나 악의적으로 개인주의의 탈을 뒤집어 쓸 경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 사회 개혁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아직 판단을 잘 못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며, 지식인이 잘못을 할 경우 훨씬 큰 비난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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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리버럴리즘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아무하고나 자는게 뭐 어때서요? 누가 그렇게 하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SoWhat?
누가 옆에서 돈지랄하는게 배아프다는 이야기 같군요. 자유로운 성생활과 돈지랄하는 것과는 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실제 성인들의 성생활 문화가 어떤지 잘 모르고 쓴 학생의 목소리입니다. --Aragorn

빈곤 페이지와 빈곤과신자유주의 페이지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놈님 많은 수고 하셨더군요. 참고로 김상태님은 중견성해방운동가로 알고 있습니다. 즉, 성인들의 성생활 문화는 물론, 대학생들의 성생활 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죠. --조원장
김상태란 사람이 누구냐는 것은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글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운 성생활이 지상명제인지 모르겠고, 김상태씨는 그런 것이 배아픈지 모르겠는데, 이 사회가 그런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절대. --Aragorn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떤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죠? --조원장
이 사회가 돌아가는 중심은 다양하고 집단마다 다릅니다. 대체적으로는 이익, 정확하게는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안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교과서적인 답이죠? 이 세상을 단순한 한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복잡한 시스템을 단순 논리에 끼워맞추지 않으면 됩니다.

빈곤 페이지에서 모든 것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다시 궁금해지는데요, '세상은 대개의 경우 필연적으로 이익을 위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 그런 경우도 많고, 다른 중심이 그 '이익'의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받은 느낌은 전자의 경우였습니다만. --조원장
What's your problem and what's your point? 리버럴리즘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해 놓고선, 왜 아무 상관없는 걸 연관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Aragorn

저의 문제는 '상대방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입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래에서도 지적하셨듯이 상대방의 주장을 '리버럴리즘'이라고 속단했기에 이런 토론을 제안하고 페이지도 만들었는데요, 그렇지 않다고 하신 것 같아서 '그러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전에 다른 분도 '신자유주의'라고 받아들였던 것을 볼 때는 어떤 방식으로던지 '자유'의 개념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을 듯 합니다. 따라서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듯 합니다. 또한, 개인의 생활 방식 혹은 신념은 그 개인이 속한 사회적 조건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개인의 계급적 배경이라던가, 사회에 대한 이해방식 등을 알면 그 개인의 생각을 좀 더 이해하기 쉽더군요. 상대방의 생각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조원장
허헛. 리버럴리즘이 뭔지 잘 모르시는군요. '신자유주의'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 가운데 뭐가 뭔지 알고서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입니다. '신자유주의'를 아무 개념없이 모호하게 확장시켜 버리고, 아무거나 리버럴리즘이라고 가져다 붙이는 용맹무쌍한 사람들을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특정한 잣대로 재단하지 마세요. 예수천국 지옥불신류의 사람들과 똑같이 보입니다. 페이지이름과는 달리 정작 리버럴리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논의된 것이 없고, 앞으로도 논의될 것 같지는 않군요.
개인의 계급적 배경 운운하는 것은, "이 후레자식 녀석. 니 애비는 뭐 하는 놈이냐?"라고 묻는 것 같군요. B) --Aragorn

Aragorn님의 '모호하지 않게 개념이 잡힌' 생각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며, '자유'에 많은 무게를 두는 생각이라고 짐작할 따름입니다. 리버럴리즘이 뭔지 제가 알고 모르고는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저 혼자만의 특정한 잣대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알고 싶다는 것이 어떻게 상대방을 '후레자식'이라고 매도하는 것인지도 궁금하네요. 계급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해서 지레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다만 Aragorn님의 리버럴리즘(혹은 자유에 관한 어떤 것)에 대한 '균형잡히고 모호하지 않은' 생각을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서울대의특권계층화페이지에서 이 페이지를 만들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조원장
서울대와 리버럴리즘이 무슨 관계입니까? 서울대생이 리버럴리스트들의 중심세력입니까? 서울대의특권계층화와 리버럴리즘이 무슨 상관 관계가 있습니까? 이 페이지가 분리된 계기와 연유도 이해가지 않고, 논지가 무엇인지도 이해가지 않습니다.
개인의 계급적 배경 운운하는 것과 "이 후레자식 녀석, 니 애비는 뭐 하는 놈이냐?"의 연관관계를 잘 이해 못하신 것 같은데, 우리의 많은 욕 가운데 이 애비에미도 없는 녀석, 니 애비는 뭐 하는 놈이냐, 후레자식, 상놈의 자식 등의 표현이 모두 논점과 전혀 상관없는 그 사람의 계급적 배경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아무개님이 바로 이렇게, 논점과 아무 상관없는 계급적 배경을 끌어들이는 의도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Aragorn

''Aragorn님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네요. 아니면 일부러 그런 척 하시는 건가요?
하나씩 답변하겠습니다. 일단 서울대와 리버럴리즘은 특별한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Aragorn님이 서울대의특권계층화에서 주장하신 논조가 리버럴리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나 해서 따로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페이지에 와서 Aragorn님의 얘기를 보니 제가 속단했던 것 같기도 해서, 다시 Aragorn님의 생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라는 Aragorn님의 답변 밑에 질문을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계급'이라는 말에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시는 것 같은데요. 그 문장이 나온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컨대 개인의 계급적 배경이라던가...'라고 씌어 있을 것입니다. 즉, 그것은 예를 들기 위한 것이며 저는 Aragorn님의 계급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유'에 대해서 어떤 신념 혹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물었을 따름입니다. 만약 계급을 밝히기 싫으시다면 밝히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설령 밝힌다 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가지고 Aragorn님을 매도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드리지요.

1) 이 페이지를 만든 이유는 서울대의특권계층화에서의 Aragorn님의 주장을 리버럴리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2) 제가 묻고 싶은 것은 Aragorn님의 계급이 아니라, 자유 혹은 리버럴리즘에 대한 Aragorn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그것에 대한 Aragorn님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렸던 것입니다. Aragorn님은 제가 Aragorn님을 무조건 리버럴리스트라고 몰아붙이고서 비난했다고 하는데, 저의 잘못이라면 Aragorn님의 주장을 리버럴리즘이라고 오해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논리적 사고력이 부족해서 Aragorn님을 오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풀어주는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 주실 수 있을 듯합니다. --조원장''
Aragorn은 스스로를 분류할 때 자유주의자, 리버럴리스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는 그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서울대의특권계층화 문제는 두리뭉실한 가치관, 사상의 문제로 접근할 주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Aragorn서울대의특권계층화 문제에 있어 자유주의적 입장과 그 밖에 다른 입장이 뚜렷한 대립구도를 형성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리버럴리즘토론 페이지에서는 첫머리에 언급된 자유로운 성생활, 돈 많은 애들의 돈지랄, 자유주의 등의 논의는 그다지 설득력도 없고, Aragorn이 보고 느끼는 대학사회의 모습과도 거리가 멉니다. 자유로운 성생활, 동거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동거는 경제적 지출을 줄이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김상태란 사람이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삐딱한 아웃사이더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아참, 그리고 빈곤 페이지에서 모든 것을 돈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빈곤 그 자체가 돈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경우에 우리는 빈곤하다고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논리적 비약이 많고, 현상적인 상관관계에서 그것의 원인을 찾는데 있어 아무런 근거가 없는 추측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자유경쟁이 왜 환상인지에 대해 반론을 펴는데 있어서도 이 사회 전체의 지극히 한 일부분인 특정 대학 신입생의 학부모 직업분포를 인용하고 있고, 그 인용된 내용조차 실제 유의미한 통계측정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 통계치에서 잘 배운 부모의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경향성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는지, 잘못된 것인지 여부도 의문입니다.

왜 이렇게 특별한 근거없이, 막연한 컴플렉스가 만연하는지 안타깝습니다. 한국사회의 병폐? 한국사회의 병폐를 제대로 살펴보고 경험해 본 사람입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말 한국사회의 병폐 맞습니까?

제 입장에서 위의 글에서 읽히는 것은 새로운 대학사회에서 접한 낯선 문화, 돈 많은 애들의 문화, 잘난체 하는 일부의 문화에 거부감을 갖고 그에 대해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명분과 함께.

아참, 덧붙여서, 김상태란 사람은 무슨 심사가 꼬여서 남의 꿈을 놓고 비웃는지 모르겠지만 제 꿈은 이렇습니다.
"내 꿈은 돈 많은 백수가 되는 것 하나, 그리고 너와 연애하는 것, 그 두 가지야." (아, 참고로 여기서 '너'는 아직 구체적으로 없습니다.)

그 사람의 꿈에 대해 물었을 때, 누구는 "나의 꿈은 첫째 조국의 통일, 둘째 조국의 통일, 셋째도 조국의 통일이요."라는 식으로 대답할지, "나의 꿈은 첫째 민중의 해방, 둘째 민중의 해방, 셋째도 민중의 해방이요."라는 식으로 대답할지, 제각기 다르겠지만,

꿈에 대해 묻는 그 개별적 상황에 따라 답하는게 달라지는게 일반적입니다. 여자친구가 "네 꿈은 뭐야?"라고 물었을 때와, 거창한 일로 언론과 인터뷰할 때 "네 꿈은 뭐야?"라고 물었을 때, 답하는게 다르다는 겁니다.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이념논쟁, 이데올로기논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유리된 채 탁상머리에 앉아 고민하는 똑똑한 친구들의 습성입니다.
--Aragorn

''드디어 제가 혜안을 얻은 것 같습니다. 제가 논리력이 떨어지고 감정만 앞서는 사람이란 건 진작부터 알았었는데, 짧은 글 하나만 보고도 필자의 숨은 심리 상태까지 파악해내는 통찰력과 분석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쓸 데 없이 좋지도 않은 머리 쥐어짜면서 다른 사람 생각까지 하자는 '이데올로기' 따위에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저도 잘 몰랐지만 저 역시 현실적으로 못 가진 것에 대한 분노와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했던 것 때문에 그런 짓을 했었던가 봅니다. 한동안 시골에 가서 농사 짓겠다고 깝쳤던 것도 저에게는 현실을 제대로 보는 눈을 길러주지 못하고 오히려 한 학기의 시간만 날렸던가 봅니다. 늘어나는 빚과 농산물 수입 개방으로 고민하는 농사꾼들을 보면서 한숨지었던 것도 잊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돈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됐고 이웃끼리 주먹다짐까지 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제는 그들이 원래 이기적으로 생겨먹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는 투덜투덜대면서도 옆에서 도와주던 그 아저씨도 뭔가 바라던 게 있었을 겁니다. 학생들은 공부 많이 해서 나라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말도 뭘 모르는 말이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없고 돈이 없어도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해서 생산성을 증대하는 것이 그 아저씨의 할 일인데, 그걸 그 아저씨는 몰랐던 것입니다. 하루종일 아무리 피곤했어도, 다섯 시간 자는 잠을 세 시간으로 줄여서 과학영농에 대해서 공부를 했어야죠.
누가 꿈을 묻는다면 저도 이제는 '돈 많이 버는 거요'라고 답해야겠습니다. 그 전의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답들은 어서 잊어야겠죠. 멍청한 월급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를 봐야 할지, 아니면 주식 투자나 복권을 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의 그 많은 사람들이 고시책과 영어책을 볼 때도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항상 주식 시세를 눈에 불을 켜고 보던 사람들의 노력을 간과했다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부자아빠 가난한아빠를 사서 처음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도 보보스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 나니 후련하네요.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조원장''
익명성을 존중하는 노스모크지만 이건 우리와남을위해 쓰여진 글이 전혀 아니군요. --기린
죄송합니다만, 제가 상대의 논리를 받아들일 경우를 솔직히 쓴 것일 따름입니다.--조원장

아무거나 리버럴리즘이라고 가져다 붙이면 어떤 사람들은 매우 짜증나지요. 배운 사람이 그러면 못 씁니다.

일단 주제 대상의 용어와 그것의 개념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공부를 하시길 권해드리고, 이 세상을 단순한 논리에 끼워맞추는 사고방식을 극복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나라 주입식 한줄 세우기 교육의 병폐로 인해 등수 잘 나오면 최고, 점수 높으면 최고, 이 세상의 가치는 오로지 하나, 이런 틀을 뼛속 깊이 새겨 놓게 되는데, 사회 현상의 다양한 이면을 들여다 보고 대부분의 문제가 나름의 이유가 있으며, 쉽게 칼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뭘 두고 "저도 이젠 보보스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매우 아햏햏하군요. 수련하여 득햏하십시오. -- Aragorn

저는 리버럴리즘토론을 클릭했을 때부터 성적 리버럴리즘토론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아무거나 리버럴리즘이라고 가져다 붙이는 것은 아니고, 보통 리버럴리즘이라고 말하면 정치적 리버럴리즘 아니면 성적 리버럴리즘, 이 둘 중 하나입니다. '나는 리버럴리스트이다'라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리버럴리즘과 계급문제의 연관은 글쎄요, 그 또한 하나의 해석이 될 수는 있겠지만 명쾌하게 설득력있게 다가오진 않는 느낌입니다. 리버럴리즘담론도 페미니즘담론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두 담론의 비슷한 점이 무엇인지 질문을 해도 될는지요?--조원장
두 가지 모두 자유로운 성생활이라는 보수적 윤리관과 대치되는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본질적 논의에서 뚝 떨어진 지엽적인 성문제로 전체가 공격받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Aragorn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의는 아니지만, 비교적 적당한 설명이라 생각해서 옮깁니다.
'개인주의적 자유 시장 경제 '신앙'을 복권시키고, 복지비와 교육비 증가를 제한하는 한편, 기업과 부유층의 세금부담을 경감시키며, 시장 원리에 의한 경제 활력의 회복을 기대하면서 공영 기업을 민영화하고, 노동조합을 약체화시키고 노동 시장을 경쟁적으로 재편하는 일련의 정책을 지지한다.'
강만길 교수의 얘기입니다.

위에 열거된 것들 중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면,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조원장
''빈곤 페이지의 이야기나 일반적인 리버럴리즘을 위와 같은 좁은 범주의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이라면, 어이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과 더이상 논의를 진행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보통 말하는 자유주의, 리버럴리즘과 위의 강만길 교수의 특정 개념과는 별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도 분명히 구분해야 하며, 우리가 요즘에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란 것은 경제적 자유주의 중에서도 특정한 가치에 치중하는 한 흐름입니다.
위의 주장은 그저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설명한 것 같군요. --Aragorn''
''저는 Aragorn님의 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빈곤 페이지 맨 밑에 신자유주의 운운은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만약) 토론이 진행된다면,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하고 싶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써놓은 것뿐입니다. Aragorn님이 제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념도 없다'라 하셨기에 제 개념을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그 사람 잘못이라고만 하기도 어렵지 않을까요? Aragorn님의 글에도 어느 정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건 아닐지 감히 생각해 봅니다 --조원장''

서울대의특권계층화은 이 페이지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조원장 (but see also 유학단상)

아직 Aragorn님의 '자유주의'와 제가 생각하는 '리버럴리즘'의 차이를 명확히 모르겠습니다. 다음의 질문에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자유의 행사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기십니까.

2)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는 더 이상 변화하지 않으리라 여기십니까.

3) 윤리와 도덕이 왜 강자의 논리죠?


1), 2)번에 대해서는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답밖에 없어서 따로 안 적겠습니다.

3) 윤리와 도덕은 강자의 논리에서 악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를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해나가고 기존의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이 윤리와 도덕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폭력을 쓰면 안 된다,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 등에서 시작해서, 연장자를 공경해야 한다, 식사예절을 지켜야 한다, 옷을 단정히 입어야 한다 등등. 기존의 틀을 존중하자는 것이 보수이고, 기존의 틀을 적절히 깨뜨리자는 것이 진보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시스템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몰아서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얼토당토 않은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가져다 붙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감히..." 식의 논리의 대부분도 윤리와 도덕의 문제이고, "우리나라는 썩어 빠졌어.. 저러니까 안돼..." 식의 논리의 대부분도 시스템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것은 뒤로 감춘 채, 윤리와 도덕으로 문제에 접근합니다. 환경문제에 접근할 때에도 막연히 "아름다운 산과 들이 망가지고 물고기 노는 강이 똥물로 오염된다!!"라고 감정에 호소하면 잘 먹혀 들어가지만, 합리적, 이성적인 접근에는 관심없습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자, 아, 쟤네들 보니까 가슴이 아퍼~" 이런 식의 접근입니다. "없는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는 윤리가 피상적으로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하철에서 동전 몇푼 던져주고, TV의 ARS 돈 뜯어내기 쇼에 천원 납부하고선 스스로의 만족감,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혼자서 주장하면 아무도 안 들어주고 단체행동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버립니다. 모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데 이기적으로 접근한다고 간단히 비난해 버리고 맙니다.

이 와중에 잘못된 오류, 부당한 이익 등은 뒤로 감추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존중받아야 할 개인의 존엄성, 자유는 아주 쉽사리 무시되고 희생되어 버립니다. 시스템의 문제는 윤리나 도덕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Aragorn

이 페이지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이 페이지는 서울대의특권계층화에서 만들어진 페이지입니다. 우선 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익숙치 않아서 이런 이름의 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도 판단키 어려웠고, 위에서 보면 아시겠지만 이 페이지를 만들 당시 상당히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라 더욱 앞뒤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 페이지를 제가 (감정적으로) 만든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명문대 입학 및 미국 유학이 가능하며, 그 '개인의 경제적 환경'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적어도 제가 이해한 바로는)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진 자들이 흔히 말하는 '자유 경쟁'의 환상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제가 좀 성급합니다. 제 결점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충고를 되새기며, 충고를 주신 분의 글들을 차근차근 읽어 나갔습니다. 저의 독해력이 떨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충고를 주신 분의 글들 속의 생각이 제가 짐작했던 것이랑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위악적인 모습으로써 그 이면에 다른 어떤 것을 주장하시는 것은 아닌가'라고까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학생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분의 한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의만 옮겨 본다면, '제가 반박할 수는 없지만 옳지 않은 거잖아요'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수는 없지만, 틀렸다고 여긴다는 거겠죠. 저는 여기서 또 하나의 생각(혹은 오해)을 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그 밑에는 충고하신 분의 답글이 있을 줄 알았으나 그런 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토론을 하다 보면, 실제 토론 주제의 옳고 그름보다는 토론 당사자의 지식(혹은 지적 능력, 말빨)에 따라서 토론이 결판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많이 배운 사람들일수록 상대가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거나 말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세부적인 문제에서는 명확한 개념과 논리가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큰 주장을 세부적인 논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 학생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쓰신 글 밑에는 좀 더 명확하게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답글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학생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매도하는 사람은 무시하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무시하는 것은 '배운 사람'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제가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척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창피한 얘기이지만 저도 자유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름대로는 많은 고민을 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결론 외에는 특별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여기에 매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조원장

그러던 중 학생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분의 한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의만 옮겨 본다면, '제가 반박할 수는 없지만 옳지 않은 거잖아요'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수는 없지만, 틀렸다고 여긴다는 거겠죠. 저는 여기서 또 하나의 생각(혹은 오해)을 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그 밑에는 충고하신 분의 답글이 있을 줄 알았으나 그런 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옳지않은일을굳이하는이유 페이지의 이야기인 것 같군요. 이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한두 마디의 끄적거림으로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경우를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라고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 정도로 수고할 이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말로는 대화를 해서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쥐뿔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한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면, 하루종일 대화만 해야 합니다. 현실에서는 네가 내 말 들을래? 아니면 내가 네 말을 들을까?의 힘싸움, 정치적 싸움이 태반일 뿐입니다. 옳고 그른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그렇게 주장할 뿐이지.
--Aragorn

답변 감사드립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라는 것이 변명처럼 들립니다. 예컨대 이공계 교수들은 수업을 할 때 영어를 섞어쓰는 경향이 많더군요. 처음에는 잘난 척 하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적절한 한국말을 찾지 못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거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안 쓰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대요. 그렇지만 굳이 알아듣기 쉬운 한국말로 바꿀 생각은 별로 안 하는 것 같더군요. 이것은 지식인들의 안좋은 속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내용도 '쥐뿔' 없으면서 그럴 듯한 전문용어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글을 쓰는 경우가 비슷합니다. 독일 철학서적은 난해하기로 유명한데, 몇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실제로 '어렵게 보여 뭐가 있는 듯이 보이고 싶어서'였다고 하는 걸 보면 그것은 지식인 일반의 허영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전문적인 분야에서의 글쓰기는 그렇다 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관심도 없을 뿐더러 거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일반 사람들이 직접 연관이 있고, 관심을 가지는 부분에서조차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 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즉, '옳고 그른 것은 아무도 모르고, 단지 그렇게 주장할 뿐인데'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상대의 주장을 뭉개버리는 것이 되기 십상이죠. 다르게 표현하자면 '지식'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식이 없는 약자를 강자의 입장에서 휘두르게 되는 것이죠. 제도권 교육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내려고 하죠.
다음으로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뜬금없이 왜 저딴 질문을 했냐고 궁금해 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명확하게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이기주의자'와는 토론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얘기를 해야겠기에 첫 번째 질문을 던졌고,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말'로 생각하는 사람과도 별로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아 두 번째 질문을 던졌으며, 윤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 즉, 근원적 물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오해'했기에 세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대체 상식적 답이란 게 뭔지 모르겠는데, 남의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 되며 자본주의 체제는 변화할 수 있다고 답하신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의 답에서는 윤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데올로기로 하여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유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잘못된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어느 누구도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구성원 중 단 한 명이라도 부당하게 권리를 억압받고 있다면 그 사회를 잘못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권리를 누릴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어느 누구도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1945년 이후 미국과 거기에 빌붙어 잇속을 챙기던 무리들에 의해 끌려왔습니다. 강도짓을 했던 일본에게 굴욕적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명분도 없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 흘린 이 땅의 젊은 피로 그 찬란한 경제 발전을 이뤘다죠. 그것도 모자라서 열 댓살 정도의 여직공들을 하루 열 네 시간 넘게 일을 시키고, 최소한 근로기준법만이라도 지켜달라고 말했던 한 사람을 절망 속에서 자기 몸에 불을 긋게 했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은 어떤 사람은 아예 같은 나라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의 조연들 중에는 아직도 버젓이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워낙 그 판이 더러워져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시 정치에 뛰어들겠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대요.)
87년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 되다가 87년 말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죠. 두 김씨 잘못도 크지만, 놀랍게도 남의 피를 보는 걸 보통으로 생각했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죠. 그 후에 결국 한 김씨는 그들에게 붙어 민자당을 만들고, 지금은 한나라당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하네요. 다른 김씨도 나중에 일본에게 나라의 자존심을 팔았던 김씨와 붙어 대통령이 됐고요.
어렸을 때는 순진하게도 '왜 해방 후에 친일파들을 심판하지 못했을까, 도대체 그 당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 이완용의 아들인가 손자인가 하는 놈이 국가를 상대로 조상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한다고 날뛰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40~50년 후에 후손들이 '왜 2000년대 초의 사람들은 그 따위 사회에서 살았을까'라고 욕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죠. (물론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87년 선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말이죠.)
이렇게 구구절절 다 아는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거의 50년동안 '잘못된 사회'였던 한국 사회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세월 동안 '자유롭게' 노력해서 현재 유리한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묻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까 미리 말씀드리는데, 70년대에도 80년대에도 그 시대를 진정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시대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것과 따라서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그런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보는 게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이니 혁명이니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 걸 조장 혹은 방관했던 무리들'이 오랜 세월 동안 그들에게 유리하게 판을 짜놓고, 이제 와서 그 불리한 판에서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그 외의 사람들을 '너네가 모자라고 멍청해서 지는 거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죠. 그 뒤에 태어나 잘못 없다고 말하고 싶더라도 최소한 창피한 줄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거죠.
정말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의 자유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리버럴리즘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제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시기상조인 '똘레랑스' 비슷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마음대로 할 테니 내버려 두라는 거죠. 그런데 누군가의 자유가 억압되는 사회에서는 언젠가는 자신의 자유도 억압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닐까 싶더군요. 또한 진정한 '똘레랑스'는 '남에게 베풂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게 아닌가 싶고요. 이런 것이 자신의 욕망을 숨기기 위해서 리버럴리즘이라는 이름을 빌리는 것, '강자의 논리에서 악용되는 경우'라고 생각들더군요.
결론적으로, 한국사회에는 분명 모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현대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자유를 누리겠다는 생각은 리버럴리즘이라고 여깁니다. 최소한 '쪽팔린' 줄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조원장

그것은 그 사람이 권리를 누릴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어느 누구도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조원장씨의 주관적인 의견, 가치판단일 뿐입니다. 자유는 온전히 그 자체로 자유입니다. 노예를 부려서 자유를 얻든 기계를 부려서 자유를 얻은 자유는 자유입니다. 10명이 자유롭고 10명이 억압받는 사회는 말 그대로 10명이 자유롭고 10명이 억압받는 사회입니다.
"절대소수의 최소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절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없다"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는데, 이 이야기는 그냥 관념적으로 불행한 사람이 있으니 다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논리가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이 있으니 나는 배부르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게 아니란 것입니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절대소수의 최소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어디엔가 근본적인 모순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전체 사회 구성원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이죠.
위의 논리를 자유의 문제에 적용시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권리를 누릴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도 근본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이런 논리는 중간 단계가 빠져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기도 했고, 인간은 기계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확보했습니다. 단지 동물이나 기계에는 자유라는 것을 줄 필요가 없거나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Aragorn이 보기에 조원장씨는 사회 문제에 막연한 감상적인 접근을 한다고 판단됩니다.
누군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유의 가치를 평가하며 깎아내릴 수는 있겠지만, 자유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Aragorn은 잘못된 현대사를 고쳐잡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온전한 자유주의를 이 땅에 뿌리내리는 것이라 굳건히 믿습니다.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사상의 틀을 무너뜨리고 억압과 속박의 굴레 속에 사람들을 계속 희생시키는 지름길입니다.
'똘레랑스'라고 불어쓰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말로는 관용이라 하고, "내 인생 내가 사는데 내버려 둬요"라고 말하는게 관용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Let it be 라고 해도 되겠군요. 그런데 이러한 자유주의와 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무엇이 대치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남에게 베푸는 행위, 이타적 행위가 똘레랑스라는 것이라는 것도 잘 와닿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와 관용은 오히려 상대를 온전한 인격체로 보고, 그 사람의 자유로운 생각과 의지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의 자유로운 생각과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가치의 실현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타적 행위를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하기 싫으면 그렇게 하지 말고. 누군가 나서서 통제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그 사람의 온전한 사고와 판단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또다르게 보자면,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고 내가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네가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려 들지 말라. 네가 생각하는 것이 내 생각보다 나을 건 하나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억압과 핍박, 착취는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위이고, 조원장씨가 이야기한 현대사의 굴곡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자유주의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위의 글에는 한국 현대사의 문제와 자유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면, 가진 자만의 자유, 가진 자가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을 억압하는 것과 자유주의를 혼동한 것이라 생각될 뿐입니다.
친일파 문제도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아야 친일파를 비난하고 처단할 수 있는 것이고, 일제의 침략적인 제국주의에 편승해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핍박한 행위로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처단하는 것일 뿐입니다.
특히나 자유와 방종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놓고 논리적 비약을 하며 어린 학생들을 호도하는 고등학교 교사들이 곧잘 비슷한 논리를 펼칩니다. "너희는 아직 그런 나이가 아니다. 너희는 아직 통제받고 지도받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보기에 옳든 그르든, 더 좋든 나쁘든, 충분한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한 것이라면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전체를 위해 강제로 요구할 수 있는 영역과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을 잘 구분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개인의 영역을 타인이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이유로 짓밟아버립니다.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이유로 강제로 공부시키고, 개인 사물을 뒤지고, 통신을 도청하고, 사생활을 비난하고, 간섭하고 통제합니다.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Aragorn




굳이 불어를 쓴 이유는 우리말의 '관용'과는 좀 다른 뉘앙스가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관용'이란 말
로 '똘레랑스'의 모든 의미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관용'이란 말을 쓰셔도 무방하
겠지요.
'똘레랑스'를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우선, '존중하라, 그래서 존중하게 하라'라는 설명이 나온
답니다. 다음 뜻으로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라고 나오고요. 프랑스에서는 이것이 무척 중요
하다고 하네요. (저는 안 살아봐서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대체로 외국인에게도
관대하고, 각종 파업에도 관대하고, 뭐 그렇게 잘 산다고 하대요. 그래서 거기 사는 외국인들은 프랑
스 사람들이 참 너그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나 봐요. 이제 '이타적인 행위'라고 이해하시지는 않으시
겠죠?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권력이 부패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고 합니다.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에 대한 처단을 봐도 그렇고 부패한 권력에 대해서는 '관용'을 가
지지 않는다 하더군요. 결국 '똘레랑스'는 개인이 권력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지 권력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사실 '똘레랑스'라는 것은 철저하게 이성에 바탕을 둔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옳을 수도 있고
내가 옳을 수도 있으니 같이 합리적으로 고민하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결론이 안 난다면 서로 인정하
자.' 이런 얘기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너도 그렇고 그런 놈이고, 나도 그렇고 그런 놈이
니 적당히 하자. 좋은 게 좋은 거지. 우리가 남이가.'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것 같더군요. 이런 것을
'관용'이라고 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들 하대요. Aragorn님이 무척이나 싫어하
시는 감정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죠.
그래서 비뚤어진 현대사의 주역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굳이 '똘레랑스'
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아실지..워낙 제가 글을 못써서 그런지 계속 전달이 잘 안되는 느낌이긴 하지
만요. 저는 이런 '똘레랑스'가 한국사의 모순과 대치된다고 한 적은 없거든요. 다만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죠. 앞으로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라지만, 아직은 맞지 않다고 한 것이죠. 오히려
Aragorn님께서 경계하시는 것처럼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될까 두렵거든요. '우리가 잘못하긴
하지만 관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상황에서 자유를 누린다. 방해하지 마라.' 뭐 이런 식으로요. 유
치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자유주의와의 관계를 얘기하기 전에 Aragorn님의 다음 얘기를 어쩔 수 없이 짚어
야겠네요.

''자유는 온전히 그 자체로 자유입니다. 노예를 부려서 자유를 얻든 기계를 부려서 자유를 얻은 자
유는 자유입니다. 10명이 자유롭고 10명이 억압받는 사회는 말 그대로 10명이 자유롭고 10명이 억압받
는 사회입니다.''

여기서 저와 자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위의 얘기 다음에 나오는
Aragorn님의 얘기들은 참으로 좋은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위의 얘기는 그렇지 않게 느껴지거든요. 자
신이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유시민씨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남의 자유가 억압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요. 물론 그것은 유시민씨의 '주관적인
의견, 가치판단'일 수도 있겠는데 저는 그 말이 참으로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질문을 드
렸었죠? '자유의 행사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기십니까?'라고. 위
의 글에서 저는 그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Aragorn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절대소수의 최소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어디엔가 근본적인 모순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전체 사회 구성원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위의 얘기들이 어떻게 한국의 현대사와 자유주의와 연관이 되는지 다시 얘기해보겠습니다. 저
는 자유가 온전한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자유' 혹은 '우리의 자유' 뿐만 아니라 '너의 자유' 그
리고 '당신들의 자유'마저도 똑같이 가치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
그/그녀의 자유' 그리고 '그들의 자유'도 생각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고요. 저는 이것을 리버럴
리즘과 다른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자유가 아닌 온전한 자유를 사랑하고 실현하려고 노
력하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는 그렇지가 못했죠. 언제나 정권은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 대다수의 자유를 억압
해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억압된 상황 하에서 '자유'를 누리라고 대다수를 기만했죠. (70년대 신문 사
설을 본 적이 있는데, '요즘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말이 안된다'라
는 구절이 있더군요. 씁쓸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Aragorn님께서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자유를 억압
해 왔던 것이 우리의 현대사의 모습입니다. 현대사와 자유주의의 관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80년대 말까지도 섣불리 '다수(혹은 민중)의 자유' 운운하다가는 어느 경찰서 유치장에 처박혔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90년대를 지나오면서 '굴곡의 현대사'를 '자랑스럽게' 뚫고 온 사람
들이 '리버럴리즘'을 공공연하게 얘기하더란 말입니다. 그런 '굴곡의 현대사' 속에서 얻은 기득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겠다는 말이죠. 대다수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던 모순된 시스템 속에서 기득권을 얻
은 사람들이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채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더란
말입니다. 자유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유를 누릴 테니 너는
네 자유를 누려라'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죠. 왜 공평하지 않냐고요? 그러면 이렇게 묻죠. 90년대
를 통과하면서 한국사회가 획기적으로 변했던가요? 그래서 그 전의 수십 년 동안 얽혀왔던 모순과 부
정들이 다 없어졌나요? 권력자의 총칼에 스러져갔던 원혼들은 편안히 눈을 감고 있을까요? 저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사회 시스템
자체 어디엔가 근본적인 모순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그리고 저를 감정적이라고 하신 것은 맞습니다. 저 참 흥분도 잘하고 눈물도 잘흘리고 그래요.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대한민국을 외쳐대던 붉은 악마들
에게도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질 만큼 쇼비니즘에 대해서 악감정을 갖고 있을 정도는 됩니다. 또한 민중
이란 것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는 것을 직접 가서 들여다 보면 참으로 한심하게
보일 것입니다. 물론 제 주변을 봐도 그렇습니다. 정이 넘친다는 농촌에서도 땅 문제 때문에 이웃과
멱살잡이를 하기도 하고, 얼굴 맞대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기도 하며, 얼마나 각박하고 매몰
찬지 양보나 대화 같은 것도 모르고..등등 차라리 돈 많고 배운 거 많은 사람들이 훨씬 사람답게 보이
죠. 그러니 민중들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생각하죠. 똑같겠죠. 그런데 말입니
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하는 사람들과 풍족
하게 지내면서 충분한 교육 여건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 말이죠. (일반적인 빈곤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 한정시켜서 하는 얘기입니다. 아니, 그저 제 주변에서 본 몇
안 되는 경우를 제 나름대로 일반화한 얘기라고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친일파 문제를 왜 걸고 넘어지냐고 물으시는 것 같은데...저는 친일파 문제를 감정적으로 민족
주의자의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올바른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신의 집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죠.)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30년 넘에 일
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제를 기정사실로 하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부르
지는 않습니다. 당장에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라 빼앗긴 분을 삭이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조하면서 먹
고 살았다 해서 잘못됐다고 함부로 말하기 힘들죠. 다만 일말의 죄책감이나 망설임도 없이 일제의 힘
에 기대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핍박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 한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제에 저항하지 못한 사람들을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겠
죠. 당장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테니까. 제가 욕하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괜찮았을 것을 적극
적으로 일본에게 붙어서 사욕을 채우려 했던 사람들의 작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일제시대 동안 잇권을
챙기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계속 떵떵거리면서 지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죠.
제가 워낙 글을 못써서 그런지 Aragorn님이 제 의도를 모르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간단합니다. 자유를 주장하고 싶으면, 남의 자유도 생각하라는 것이죠. 모순된 사회에서 자
유롭게 산다는 것은 결국 남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을 방관 혹은 조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그
모순을 고치라고 닦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유주의'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리버럴리즘'을 주
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만약 그렇다면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기본적으로 Aragorn님과 저의 생각이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대한다는 것은 저의 생각과 같습니다. 저 또한 남에게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간섭하거나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원장

  1. 자유주의를 영어로 말하면 리버럴리즘이고 리버럴리즘을 우리말로 하면 자유주의입니다. 영어와 우리말이 주는 어감 차이를 제외하곤, 두 단어는 같은 말입니다. 앞에 인용된 김상태는 글을 잘 못 쓰는 형편없는 엉터리 작가입니다.
  2. 여전히 자유주의와 현대 한국사회와의 충돌에 대한 설명은 모호하고 연결이 안 됩니다.
    왜 공평하지 않냐고요? 그러면 이렇게 묻죠. 90년대를 통과하면서 한국사회가 획기적으로 변했던가요? 그래서 그 전의 수십 년 동안 얽혀왔던 모순과 부정들이 다 없어졌나요? 권력자의 총칼에 스러져갔던 원혼들은 편안히 눈을 감고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사회 시스템 자체 어디엔가 근본적인 모순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한국 사회에 잘못된 점이 있는 것과 리버럴리즘이 무슨 관계이고 똘레랑스가 무슨 관계입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리버럴리즘과 똘레랑스를 엉뚱하게 내세워 남을 핍박하고 억압하는 사례가 있습니까? 어떤 자유주의자가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위의 논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으니 자유를 내세우며 문제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기 위해 통제와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정도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과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구체적인 입장과 방향이 위의 김상태가 쓴 윤리와 도덕의 굴레를 뒤집어 씌우며 사람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전 적극 반대입니다. 사실 김상태와 같은 사람의 어설프고 황당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4. 앞에서 유시민을 언급한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해 설명하자면, 자유는 그 자체로 자유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태도와 입장으로서 "자유주의",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단순히 자유를 좋아한다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자신을 정치적인 입장으로서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모든 종류의 억압과 굴레를 거부하고 깨뜨리길 원합니다.
    자유와 자유주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Aragorn

    1. 자유주의와 리버럴리즘은 의도적으로 나누어 쓴 것입니다. 설마 그것을 걸고 넘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그것 때문에 김상태씨가 엉터리가 되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자유주의와 리버럴리즘을 나눈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혼자만의 세상에 살고 계신 모양이군요. 대한민국과 The Republic of Korea도 다른 것이라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2. "절대소수의 최소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절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없다"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는데, 이 이야기는 그냥 관념적으로 불행한 사람이 있으니 다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논리가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이 있으니 나는 배부르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게 아니란 것입니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절대소수의 최소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어디엔가 근본적인 모순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전체 사회 구성원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이죠. '통제와 제재'를 가할 수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러니 사례가 안 보일 수밖에요.
    3.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페미니스트들의 구호였죠. 자유를 '취미'로 좋아하시나 보군요. 몰랐습니다. 그리고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흔히 자신을 리버럴리스트라고 말씀하신다고 했었는데요. 이후에는 자신을 리버럴리스트라고 말씀하실 때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저 같은 사람은 쉽게 오해를 하거든요.
      ???? 무슨 말이죠? 남의 글을 여전히 전혀 잘 못 읽고 계시군요. 그리고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말의 맥락을 전혀 관련없는 엉뚱한 곳에 갖다 붙이고 있군요.

  5. 이제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못하겠다는 게 더 정확하겠습니다. '의사소통의 한계'를 직접 체험해 보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오해하실까 한 마디 덧붙여야겠네요. '역사적인 맥락에서 사회를 이해하고, 그 사회 속의 내 위치를 생각해 보며, 그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라.'는 주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통제와 제재'라 이름 불일 수 있다고 하신다면 할 말 없습니다. -- 조원장

    여전히 논지의 결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앞에서 인용된 "性은 재화이다. 하지만 돈 많다고 아무하고나 빠꾸리 뜨지 마라"는 것밖에 모르겠습니다. --Aragorn


충고를 받아들여 곰곰히 글을 읽어 봤습니다. 아래는 Aragorn님의 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억압과 핍박, 착취는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위이고, 조원장씨가 이야기한 현대사의 굴곡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자유주의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위의 글에는 한국 현대사의 문제와 자유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면, 가진 자만의 자유, 가진 자가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을 억압하는 것과 자유주의를 혼동한 것이라 생각될 뿐입니다."

Aragorn님과 저의 대립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잘 살펴보시고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1. 저는 '자유주의'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리버럴리즘'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자유다'라고 하신 Aragorn님의 말씀을 받아 들인다면 자유 자체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개입할 여지가 없겠죠. 그렇지만 자유를 행하는 데 있어서는 그 성격이 부정적일 수도 혹은 긍정적일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힘이 파괴를 불러올 수도, 평화를 불러올 수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진 자만의 자유, 가진 자가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을 억압하는 것을 저는 리버럴리즘이라고 불렀고, 거기에 대척을 이루는 것을 자유주의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았던 것은 저의 잘못이며, 그로 인해 Aragorn님께서 혼동을 느끼셨다니 죄송합니다. (여담인데요, 어떤 친구는 고려대학교를 지칭할 때 긍정적인 생각으로 말할 때는 고려대라고 얘기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으로 말할 때는 코리아대라고 말하더군요. ^^; 제가 김상태씨의 글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몇번씩이나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자의적으로 자유주의와 리버럴리즘을 구분하는 것은 조원장씨 혼자입니다. 자의적 어휘 사용은 피해 주십시오. --Aragorn

그렇다면 앞으로 '기득권자들만의 자유를 옹호하는 생각' 정도로 얘기하겠습니다.

2. 그렇다면 제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리버럴리즘을 붙들고 늘어졌는지 이해하시겠지요? 저는 '자유주의'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적인 면 즉, '리버럴리즘'을 비난한 것입니다. Aragorn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가진 자만의 자유, 가진 자가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을 억압하는 것을 비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리버럴리즘이 진정 만연하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시겠죠. 특히 구체적인 사실을 예로 들기를 요구하시던데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Aragorn님의 표현대로라면 '돈지랄'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게 배 아파서 그러는 거냐고 물으실 텐데요. 그것이 최소한 우리나라가 정상적인 시장 경제를 발전시켰고, 그 과정 중에 정당한 자유 경쟁의 결과로써 (저는 이런 과격한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돈지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간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이 '돈지랄'을 한다면 별로 하고픈 얘기가 없는데요. 우리의 현대사를 볼 때 '돈지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내세우며 상관할 것 없다 말하죠. (요즘에는 대중매체들이 오히려 그런 것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더군요. '명품'이 어떻고 하는 얘기들이 주로 그런데요, 사실 메이저 일간지에서 '명품' 소개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들조차 그런 것을 좇아 가려 하고 그것이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도 말이죠.) 따라서 '돈지랄'하는 것을 전혀 창피하게 여기지 않죠.
모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다 비리를 저지른 놈들, 도둑질한 놈들, 뭐 이런 이야기 같군요. 편견과 주관적인 가치판단이라는 생각, 안 하십니까? 우리나라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대충이라도 조사해 보셨습니까?
경제기획원에서 나온 '사회통계조사' 중 '소득계층별 소득분포 추이'에 관한 표를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분배의 공정성에 대한 표입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시 실시되던 금융가명제는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보다 자본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고, 당연히 분배는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됐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자본시장은 발달했고, 주식회사 제도가 도입되어 자본가와 노동자의 분리가 어려워졌다고는 하나 1990년까지 상위 1.3%의 사람이 전체 주식의 75.1%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외국인의 투자가 늘어났다고 하는데, 외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한국에까지 와서 주식투자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반면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계속해서 저임금과 저곡가 정책을 강요하였으며,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추가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부동산의 집중이라고 합니다. 부동산의 가치는 부풀려져 있다고 하는데요. 재벌들이 '건전한 투자'보다도 '부동산 투기'로 자본을 모았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죠. 그런데 부동산의 소유자들(혹은 그 자식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따져보자 하면 해방 후부터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어떻게 우리나라의 부가 분배되었는지 알고 싶으시면 아무 근대사 책이나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요컨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는 출발부터 불공정했으며, 계속해서 불공정한 과정을 통해 부가 축적돼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부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노동판을 전전하다 억대 갑부가 된 사람들 얘기도 심심찮게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요.(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우연찮게 땅값 오르게 정해져 있는 곳에 땅을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땅값 오르게 정해져 있었다는 말은 물론 부동산 투기를 조장했던 역대 정권에 대한 제 생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역대 정권이 어떻게 부동산 투기를 조장해 왔는지는 많은 자료가 있으니 저한테 그 자료를 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억세게 운좋은' 사람들 얘기를 하고픈 게 아닙니다. 또한 사회가 그렇게 모순된 상태로 지속되고 있는데 그 사회에 대한 고민 없이 '자신의 능력'을 펼쳐 부를 축적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유'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요컨대, 부정의한 사회에서 개인이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말하는 자체가 오류이며, 그런 사람들이 자유를 말한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그리고 위의 논의는 경실련 소속의 양혁승님이 쓰신 '인간중심의 한국경제를 위한 개혁방안'이라는 글에서 대체로 빌려왔으나, 뜻을 잘못 옮긴 것이 있다면 제 책임입니다. --조원장
'인간 중심의 .. 개혁방안'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고 보는데, 내용으로 보아 상당히 한쪽으로 편향된, 균형잡히지 못한 글입니다. 농민들의 저곡가 정책 같은 경우만 해도 한국 사회의 현실상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근본적으로 농산물 가격은 지금보다 더 떨어지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위의 이슈는 자유주의냐 아니냐의 이슈가 아닙니다. 기업가 중심이냐 노동자 중심이냐, 생산성 중심이냐 분배정의 중심이냐 등의 문제이죠.
빈곤 페이지에서도 몇차례 이야기한 것이지만, 부동산으로 재산 증식하면 나쁜 놈이라는 말에 휘둘려서 편향된 시각에서 모든 것을 재단하지 마세요. 그러니 몇몇 사람들만 부동산으로 재산 계속 늘여나가는 겁니다. 자본 투자를 통해 이득을 얻는 것도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의한 사회에서 잘 되는 개인은 모두 부정의하다,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는 파시스트로 치닫는 지름길입니다. --Aragorn
어떻게 제가 보는 글들은 다 편향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쓴 글이 되는 모양입니다. 윗 글이 편향된 시각을 가졌다고 생각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거기에 상응하는 편향되지 않은 논의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그런 논의가 있는 책이라도 한 권 권해 주세요. 그리고 저곡가 정책은 압축 성장을 위해서 농민을 희생시킨 처사라는 것이 중론입니다만, Aragorn님께서는 어떤 근거로 농산물 가격이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위의 이슈가 자유주의가 아니라, 분배정의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분배가 불합리하게 이뤄져왔던 사회는 모순이 있는 사회이다. 이런 모순이 있는 사회에서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다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따라서 그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자유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따라서 저는 맨 앞의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한국 사회가 어떻게 분배 정의가 이뤄지고 있지 않은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부동산 투자와 부동산 투기는 다른 것입니다. 한국에 제대로 된 부동산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도 건전하게 투자를 해왔다면 누가 문제를 삼겠습니까. 다만 처음부터 부동산은 불공정하게 분배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부당한 방식의 투자 즉, 투기를 통해 치부한 사람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못됐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서 부동산 투기를 안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자본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자본 투자를 통해 이득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자본이 없는 사람이 먹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정의한 사회에서 잘 되는 개인은 모두 부정의하다.'라고 단순하게 얘기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불공정한 경제 구조 하에서 그 구조를 이용하거나 혹은 편승하여 돈을 번 사람들은 부정의에 대해 일정 책임이 있으며,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그 사회의 모순 때문에 그들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없다거나, 게으르다거나 하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그들이 얻은 것을 마음대로 향유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자유(저는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지만)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힘도 없고요. 단지 그런 사람들에게 자유를 함부로 아무데나 갖다 붙이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조원장

또 다른 것은 이미 유리한 위치를 점한 사람들이 '리버럴리즘'을 내세워서 자유 경쟁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부자의 아들과 빈자의 아들이 자유 경쟁을 한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최소한 부자의 아들은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 '저들보다 내가 경쟁에 앞서니 이건 나의 능력의 결과다'라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 이 말이죠. 착각을 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시겠지만, 그런 착각 속에 유리한 위치를 점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관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컨대, 외환대란이라 불리는 IMF 사태의 원인이 저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잘났다고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막거든요.
IMF 사태가 무식한 대중의 외제 선호 때문에, 잘났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IMF는 투명하지 못하고 건실하지 못한 기업문화, 좀 더 직접적으로는 관치금융에 따른 비합리적인 금융 시스템 운용에 탓을 돌리는게 더 맞습니다. 그리고 상당 부분은 국제적인 투기성 자본이 아시아 국가나 제3세계 국가들을 하나씩 망가뜨렸다는 면도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내부를 본다면, 은행은 은행 나름대로 알아서 판단하고 활동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데, 위에서 정책적으로 빌려줘라 말아라 간섭하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 없어져야 할 부실 기업을 계속 살려두고 경쟁력없는 기업을 계속 살려두니 문제가 된 것이죠.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간섭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고, 조원장씨는 이런 오류를 반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조원장씨가 공격하는 것은 자유주의 그 자체입니다. 좋은 자유주의와 나쁜 리버럴리즘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성적 자유주의 등은 바탕은 다를바 없지만 구체적인 주제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런 것들을 모호하게 뒤섞어서 한 쪽을 공격하던 논리를 그대로 옮겨와 다른 것을 공격하는 오류는 없었으면 합니다. --Aragorn

저는 Aragorn님과 생각이 좀 다른데요. 관치금융이란 것은 듣기 좋은 말일 뿐,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금융재벌들은 자유롭고 건전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싶은데 정치가 간섭을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재계는 정치자금을 대주고 정계에서는 재벌의 뒤를 봐주는 형식으로 경제활동이 이뤄졌던 것입니다. 오히려 정부에서는 자유로운 노조활동에 대한 억압 등의 노동자의 권익을 압박하는데 앞장섰지, 재벌들이 부동산 투기를 하는데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미안하지만 노동자 문제, 노조 문제와 IMF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IMF를 분배정의나 노조문제와 엮는 것은 '넌 못 생겼으니까 공부도 못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저 역시 미안합니다만, 노동자와 노조 문제를 IMF의 원인이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다만 Aragorn님께서 정권이 과도하게 금융권에 관여하는 관치금융이 IMF의 원인이라고 하시길래, 정권이 금융권을 좌지우지한 것이 아니라 정권과 금융권은 일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Aragorn님께서 말씀하신 '금융권의 자유가 억압되어 IMF가 터졌다는 것'은 틀린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금융권은 자발적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정권에 기댔으며, 그 대가로 부동산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여 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발 눈으로 직접 봤냐는 식의 얘기는 말아 주십시오. 그저 아무 현대사 책이나 한 권 읽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박세길씨가 쓰신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인가 하는 책에 상세하게 설명이 됐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몇몇 시사지를 찾아 봐도 비슷한 얘기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권과 재계가 유착되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한 근거로 노사간의 갈등에서 정권은 주로 사용자 측에 서 있었다는 예를 든 것입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조원장

따라서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간섭한 게 아니라, 정치논리와 경제논리와 상관없이 '권력자'와 '부자'들이 '쿵짝'이 맞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들이 이제 와서 '자유'를 들먹이면서 전에 자신들이 했던 것들을 정당화하는 것을 봐주기 힘들다는 것이고요, 어째서 이런 것이 오류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현재 한국에서 전보다는 그나마 많이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근래에 태어나 이전의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은 그들이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죠. 예컨대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광복 이래로 계속해서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뽑아왔다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수많은 일반 사람들의 희생이 있고난 다음에 이뤄진 일이지, 이제 와서 '자신의 기득권을 향유하는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룩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신의 부모와 자신이 그런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도 명확히 알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자들이 자신들만의 자유를 옹호하는 생각'에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덮어 씌우고 뻔뻔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로 매도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좋은 자유주의와 나쁜 리버럴리즘은 없을지도 모르죠. 허나 자유주의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는 분명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그리고 성적 자유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모호하게 뒤섞었는지 모르겠는데요, 제 글 중 어떤 부분이 그런 것인지, 왜 Aragorn님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해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원장
리버럴리즘은 바닥에서부터 분쇄되어야 한다는 선정적인 제목의 엉터리 글을 인용한 것에서의 리버럴리즘을 분배정의, 자유경쟁 등의 논리와 엮고 그것을 모두 리버럴리즘으로 뭉뚱그린 것이 그것입니다. 전형적으로 엄숙과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Aragorn
위에서 설명을 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한국사회는 시작부터 불공정했으며, 분배 역시 계속 부정의하게 이뤄졌다.
  2. 이런 사회에서 치부한 사람들은 그 부정의를 이용하거나, 혹은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3. 이런 상태가 지속되어 현재는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
  4. 치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은 부를 '자유경쟁'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나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렇지 않다.
  5. 또한 그들이 얻은 부를 '자유롭게' 누리고 싶어한다.
  6. 그러나 남의 '자유'를 억압하여 얻은 기득권을 '자유'의 이름으로 향유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7. 그들이 부를 누리는 것을 제재하고 싶지도 않고, 제재할 수도 없지만 '자유주의'의 이름을 제발 빼고 했으면 좋겠다.
    어떤 부분에서 리버럴리즘으로 뭉뚱그렸는지요? 엄숙과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틀린 것인지요? --조원장

4. 따라서 올바른 '자유주의'의 정착은 백 번 찬성하지만, 특정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리버럴리즘'에는 반대한다는 게 제 생각이 되겠습니다.

이상으로 설명이 좀 됐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아서 죄송하고요, 사과드립니다.

아..그리고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의 맥락을 곧이 곧대로 이해하신 것 같은데요. 당연히 제가 계속 말하는 맥락에서 받아들이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인 일이라 해도 그것은 사회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다.'였습니다. 개인의 영역으로 생각됐던 성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끄집어내어, 대중화했다는 것이 급진파 페미니즘의 의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구호를 빌려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문제뿐 아니라 어떤 개인의 행동일지라도 사회에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영복 교수의 글 중에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요.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은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으나, 그 파급효과는 엄청났다면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서 엄청난 사회성을 담고 있'다고 했죠. 이렇게 풀어서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역시 저의 잘못이겠네요.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Aragorn님이 자신을 자유주의자 혹은 리버럴리스트라고 할 때, 거기에 전혀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게 되네요. -- 조원장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부분은 정말 황당합니다.
제가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다음 Aragorn님의 글에서입니다. 앞에서 유시민을 언급한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해 설명하자면, 자유는 그 자체로 자유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태도와 입장으로서 "자유주의",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단순히 자유를 좋아한다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자신을 정치적인 입장으로서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모든 종류의 억압과 굴레를 거부하고 깨뜨리길 원합니다. 자유와 자유주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Aragorn님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인 입장의 자유주의자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하신 "열 명이 억압을 받고 있고, 열 명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회"에 속해 있으시다면 그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깨기 위해 당연히 노력하시겠지요? 저는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나, Aragorn님은 그런 모순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떠신가요? 제가 오해한 것이 맞나요? --조원장
넘겨 짚지 말아주세요. 온통 넘겨짚기, 곡해하기로군요. 조원장씨는 본인의 문제인식과 해결방법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저는 아니라는 것 뿐입니다. 자신의 틀과 방식으로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 넘겨짚지 말아 주세요. 자유주의자이다 아니다,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어떻다라는 것은 평소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조원장씨가 무엇이라 규정한다고 어떻게 바뀌는게 아닙니다. --Aragorn
제가 넘겨짚고, 곡해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Aragorn님이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 제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신다면, 모든 종류의 억압과 굴레를 거부하길 원하시는지 아닌지 Aragorn님의 '생각'을 묻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누군가의 자유가 억압되는 모순된 사회에서 누군가 온전한 자유를 누린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 있을 뿐입니다. Aragorn님이 평소 말씀하시는 것과 행동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저는 Aragorn님을 뭐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Aragorn님이 의식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물어볼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답변해 주시겠습니까? --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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