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질문이 무엇인가 ¶
지금 생각해보니 "왜사는가"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군요. 하나는 수동적인 의미에서 "왜 나라는 생명이 존재하게 되었는가"이고 또 하나는 능동적인 의미에서 "나는 왜 죽지 않고 여지껏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이 중 어떤 의미인가에 따라서 대답이 매우 달라질 수 있겠군요. 이 페이지의 글 중,
{{| 왜사는가에 대한 답이 어떻게살아야하는가를 고민하는데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여 영향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는 전자의 질문에 대한 가능한 반응 중 하나일 것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는 후자의 질문에 대한 가능한 반응 중 하나일 것입니다.--아무개
"왜 사는가?"란 질문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를 뜻한다면 그것은 '몸부림'일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서'인 것 같아요.
특히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예술가처럼, 학자처럼...
알베르 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에 허망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새 작품을 쓰고 있 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단지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라면,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상태는 아니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죽음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그는 적어도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죽게 되는 상황일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지은
특히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예술가처럼, 학자처럼...
알베르 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에 허망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새 작품을 쓰고 있 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단지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라면,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상태는 아니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죽음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그는 적어도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죽게 되는 상황일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지은
"왜 나라는 생명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부모님에게 물어보세요. "왜 나는 죽지 않고 여지껏 살아가고 있는가?" 먹고, 숨쉬고, 뱉고.... --naya
1.2. 행복하기 위해서 ¶
왜사는가만큼의 허무한 질문도 없어보이는군요. 사람의 수명은 현재로써는 100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지만 늘어나봤자 우주에 흐르는 시간에 비하면 티끌같은 시간이겠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뭔가 대단한 목표를 세워 돌진해 나가는 것도 다 부질없는 짓 같습니다. 그 짧은 시간안에 세상의 모든 이치와 진리를 알 수 있는것도 아니구요. 우리위에 우월한 어떤 존재가 있어서 우리는 그들위의 노리개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죽이는 나방이 우리의 전체 모습을 알지도 못한채 죽어가듯이요.
저같은 경우에는 현재를 어떤 방식이로든지 즐기기위해 삽니다. 이상과도 같은 목표에 지금이 힘들어도 언젠가 그것을 이루었을때를 생각하며 현재의 고통을 대가로 생각하며 달게 받을 수 있겠죠. 또 죽기전에 모든 것을 알고 죽을 수 없다고 해도, 그런 끝없는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은 느낄 수 있습니다. 죽기전에 모든 걸 다 알아채버리면 재미없잖아요? ㅎㅎ 어떤 인생의 쓴맛을 느끼게 되더라도 언젠간 단맛도 느끼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행복하다면 행복을 느낄 수 없을테니까요. 화단의 꽃보다 수용소의 꽃같은 존재가 행복인것 같습니다. 그런 작은 행복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구요.
물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더 많겠죠. 그 과정이 안개속을 헤매는 것일 수도 있겠구요. 그럴 땐 그냥 막 바쁘게 살아버리는게 상책일 것 같습니다. 안보인다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내 머리속의 우울한 생각들이 날 잡아먹어버리거든요.
좋은 것이든 나쁜 일이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변화하는것들 사이에 행복같은 재미가 붙는 것이지요. Carpe diem! -- anydrus
동의한표 만족감이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변화속에서만 만족을 느끼지 않을까? 행복도 예외는 아닌것 같당. --엉뚱
동의한표 만족감이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변화속에서만 만족을 느끼지 않을까? 행복도 예외는 아닌것 같당. --엉뚱
왜 사는가를.. 언제인지 모르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봤었죠. 답은.. 역시 안 나옵니다. 단. 현재는 이외수씨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해지기위해 산다. --Astro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삽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2월화
왜사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과연 생산적인 일일까요? 아무개의 생각으로는 왜사는가를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어떻게살아야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구구절절히 나열하지 않아도,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개
1.3. 왜 사는지 알고자 ¶
왜 사는지 알기위해서 사는것 같습니다. 왜 사는지를 계속 알기위해서 죽지않아야 하고 그러기위해서 밥을 먹지요. --UeBerlin
어떤 문제는 사실 답이 한가지가 아닌경우가 있죠. 아마 왜 사는가란 질문도 실은 답이 아주 많을 겁니다. 워낙 4지선당형 1개 정답만 익숙해진터라.. 각자가 답을 찾기위해 산다고 봐요 저는.. 정말 왜 사는지 알고 싶다면 그 답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수간에 불현듯(?) 떠오르지 않을까? 황당한 답인가요? -.-; 어쨌든 답을 기다려 봅시다. 내가 왜 사는지... 살다보면 그 자취가 답을 말 해 줄 수도 있다니까요. 내가 왜 사는가?란 질문은 어쩌면 신(절대자)를 향한 도전인지도 모르죠. 알지 못하고 살아야 할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만약에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 거부한다면 더이상 신은 인간의 지배자가 아니죠.. 혼란의 연속일 테니까. 이 또한 황당한 상상이지만... 어째 매트릭스 버전으로 흐르네.. -,.- --엉뚱
왜?라는 질문이 이제 30해를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난 신념을 굳게 가지지 못하는 꿈의 주변부에서 머뭇거리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이 사회의 생활인일뿐인지도 모른다. 크게 자랑할 것도 없고, 세상에 내 이름을 크게 떨친 사람이 된 것조차 아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의 정점에 설 정도의 탁월한 장사꾼이 된 것도 아니고, 완벽하다싶게 고양된 정신 세계를 가진 인물도 아니다. 여전히 사회생활은 두려운 장애물투성이고, 1-2달 뒤의 인생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도 하기 힘든 상황이다. 다만,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이 모든 두려움과 고통보다 더 즐거운 것은, 어제와는 다른 무엇을 오늘 알고, 오늘 안 것을 통해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언제나 미지수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평면적이지 않다. 깊이는 단 한시간만 지나도 깊어지고, 넓이는 단 한곳으로만 시선을 돌려도 광활해진다. 하루하루 알아가고 있다는 것, 왜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아도, 뭔가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지탱해가게끔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손에 잡히게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용돈 기입장을 쓰던 아이가, 어머니의 가계부의 구조를 깨닫게 되고, 회계 장부를 펼쳐 대차대조표을 읽으면서 흥분을 느낀 뒤, 회계학과에 들어가서는, 주가지수 옵션의 이용법과 채권관리를 열심히 공부하고 그 와중에, 국제 금융의 질서와 패턴을 파악하게 되고, 사회 현상에 대한 나름의 지론을 펼치다가 인터넷의 게시판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상처를 치유하던 중에 진정한 연인을 만나고, 그녀 집안의 가난을 이해함과 동시에 사회 사업가로 돌변하고, 종교 단체에서 경리일을 하면서 타인들의 인생을 돌보다, 조폭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검은손의 시스템에서 엉겹결에 활동하고, 정권이 바뀜과 동시에 비호세력을 잃어 재산을 빼았기고, 불교에 귀의한 뒤에, 자신의 인생을 책으로 써서 이 유명세를 얻은 작가의 반열에 올라 국회에 입성하기도 하고, 자신이 쌓아온 인생의 철학과 지혜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제 2의 단체 생활을 겪고나선 환멸을 느껴, 결국에는 개인적 자유주의자로서 생을 마감한다는 식의 삶의 또다른 측면들을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아직은 확실히 잘 알 수 없는 내일이라는 것이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노스모크가 내일은 무슨 화제가 생길까라는 기대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곳을 가꾸도록 만드는 것처럼. 단, 우리는 일종의 '농부'가 되어야 할 필요를 갖고 있다. 내일을 좀 더 정당하게 기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다름아닌 어제 또는 오늘 심은 씨앗 그리고 오늘보다는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희망이리라. 그 희망을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들에게조차도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는 동일하게 있을 것이다.--Roman
1.4. 살아남고자 살아간다 ¶
왜사는가에 대해서 굳이 답이 필요할까요 ? 밥을 먹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bab2
동의한표. 우리는 그렇게 생존에 필요한만큼만 프로그래밍 된 존재가 아닐까요 -- 최종욱
그래서 자연히 유신론의 얘기가 나오는 것이겠죠. 누가 프로그래밍 했을까 ? 무신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겠죠 ? 흠... 전 그 부분도 궁금합니다. -- 남 얘기만 듣고싶어 하는 고무신
이지수는 왜 사는지를 잘 모릅니다. 살아지기 시작한 이유는... 이지수에게 살아가도록 던져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던져진 이후에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가지 정보/교육을 받았습니다만, 모두 속시원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부모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죽는 것은 그분들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드리는 것이라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살아보니 재밌는 일도 있군요. 이왕 살기로 던져진 것이라면, 이것저것 재밌고 싶습니다. 헌데, 마냥 재미만 찾다보니 금새 허무해지더군요. 그래서, 조금씩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무엇이 의미있을까? 지금 생각은 제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의미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주는 의미라면 더 좋긴 하겠지만, 항상 일치하지는 않구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면, 항상 영화 BladeRunner가 생각납니다. 그 Replicant들은 왜 그렇게 살려고 했을까요?그래서 자연히 유신론의 얘기가 나오는 것이겠죠. 누가 프로그래밍 했을까 ? 무신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겠죠 ? 흠... 전 그 부분도 궁금합니다. -- 남 얘기만 듣고싶어 하는 고무신
-- anydrus''
시간이 지나서 읽어보니, 이런 답이 나오는군요. 살아남기(survive) 위해서 산다(live).
사람은 자기 정체성의 실현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학교 종교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더군요. -- 두두리
2.1. 삶과 죽음 ¶
왜 사는가? 그렇다면 왜 죽는가?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삶이 끔찍하고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죽겠지. 그렇다면 왜 사는가? 죽음보다 삶이 나아서? 바쁜 일상속에 죽음을 생각해보지 못해서? 죽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때문에?! 말하자면 끝도 없는 질문이겠죠. --ssal
이제까지 왜 사냐는 질문을 받으면 '죽지 못해서 살지'라고 말했습니다. kiryu는 원대한 목표를 향한 삶을 살지 못하기에, 죽음에 관해서도 큰 의미를 두지 못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가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action보다는 '숨쉬기'라는 action이 좀 더 쉽고, 조금 덜 생각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 >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action들' 이라는 부등식도 언젠가는 이런 저런 action들이 축적되어서 크게 하나의 '삶'이라는 것으로 덩어리질 수 있다면 '죽음' < '삶' 이라는 부등식도 성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때까지도 찾는 중일 수 있겠지만요.) --kiryu
죽는 것이 두려워 삽니다. 현재까지는 --잡종{{|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
from 시지프의 신화
from 시지프의 신화
삶이란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음은 경험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죽음도 경험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같은것이기에...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마치 호흡과 같은것이 아닐까? 우리는 태어날때 울음을 시작으로 숨을 들이 쉰다. 그리고 숨을 내쉼으로써 죽음을 맞지 않는가? 호흡은 매순간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과정이 아닐까? 그래서 삶려면 죽어야 하고 죽어야 다시 살수 있는 삶과 죽음은 상호보완적인 숙명이 아닐까? 결국 이 모든것은 살아가는것, 즉 경험하는 것이다. 죽음조차도. {sekiso}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마치 호흡과 같은것이 아닐까? 우리는 태어날때 울음을 시작으로 숨을 들이 쉰다. 그리고 숨을 내쉼으로써 죽음을 맞지 않는가? 호흡은 매순간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과정이 아닐까? 그래서 삶려면 죽어야 하고 죽어야 다시 살수 있는 삶과 죽음은 상호보완적인 숙명이 아닐까? 결국 이 모든것은 살아가는것, 즉 경험하는 것이다. 죽음조차도. {sekiso}
예전에 한 수녀님께서 왜 사느냐 라는 질문을 받자 잘 죽기위해서 산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잘 죽는다는건 어떤걸까요? --두두리
잘 죽는다는건 잘 사는것이 아닐까?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삶을 매순간 잘 살면 결국 잘 죽는 순간이 오는것이 아닐까? 삶의 어원은 '사르다' (불사르다)에서 온 것이다. 불꽃처럼 자신의 삶을 확실하게 태운 사람은 온전한 재(죽음)로 변하지 않는가? 그래서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은 한 이나 미련이 없지만 인생을 온전히 살지 못한사람은 잘 죽지못하고 생에 한 이나 미련이 남는가 보다.{sekiso}
2.2. "왜"라니? ¶
"왜" 라는 것이 붙을 때는 항상 무엇인가 모순되는 면이 있어야 하는 것이아닐까.. 예를 들어서, 다른 남자들은 다 서서 볼일을 보는데, 왜 저녀석은 앉아서 볼일을 보는걸까. 내지는, 다른 나라에는 다 화장실에 휴지가 있는데, 왜 인도에는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까. 이런 것 말이다. 다시 말해서, 왜사는가라는 질문은 어디에 대한 왜인지 그것을 모르겠다. --naya
naya님의 질문에 맞게 왜사는가를 풀이하자면, '가만 있으면 그냥 죽는 것을, 왜 네 목숨을 연장하려고 노력하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에게 생명은 기본값이 아닙니다. 밥도 안 먹고 가만히 있으면 대번에 굶어 죽지요. 살기 위해 매일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사는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유효합니다. -- pocorall
맞아요..맞아.. 쓸데없는 것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왜 사는지를 왜 묻는건지 저도 도통 모르겠어요. 저에게는 너무 자명한데... 말장난처럼 비춰질지 모르지만.. 정말이지 죽지못해 삽니다. 저한테는 '왜 사냐?'고 묻는건 넌 '왜 태어났니?'를 묻는거랑 별 차이가 없어 보여요. by 열혈여아 동의한표 wafe하지만, "죽을래? 살래?"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저는 사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결국 왜사는가에 대한 대답일까요? --wafe
happycoat는 왜 혹은 Why라는 질문만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들에 대해 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 가장 확실한 대답은 그냥이 아닐까요? --happycoat2.3. 종교적인 입장 ¶
전생과 현생, 모두 통틀어서 아직 해결하시 못한 카르마가 있기에. 모두 해결할수 있다면 더이상 살지 않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가끔 산다는게 너무 피곤해서 무슨 벌이 아닌가, 란 생각이 들때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행복할때는 "살아있는게 좋아"란 생각을 하지만...전반적으로 저를 지배하는 생각은 "더이상 아무런 빚도 없이, 영원히 평온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물론 스스로의 의지로)"입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입니다. 도대체 성당다니는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황원정
2.4. 과학적인 입장 ¶
인간이 "살고 싶음"을 느끼는 것은, 명백히 처음 단백질을 L형으로 복제한 원시생명체 이후 끊임없이 내려져온 생명 특유의 원초적인 "생존유지욕"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RNA(학설에 따라서는 DNA)의 복제작용 - 넓은 의미에서 물질 확산 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 이 제1원인이며, 이는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분자동력학적인 물리학과 화학의 영역에서 환원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행복추구"에서 "행복"을 "불행"과 구분하는 정의는, 결국 사회적 동물/지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행동특성을 관찰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영장류에서 진화한 인류의 생태학적인 특징이라할 수 있으며, 따라서 "행복"은 원시생물과 동등한 생물로서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살고 싶음" / 생존유지욕의 직접적 연장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생존유지욕 때문이며, 생존유지욕의 이유는 RNA/DNA의 자연과학적인 작용이다. 즉 인간이 살고 싶어하는 이유란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별과 같은 질량 덩어리는 왜 만유인력으로 서로 끌어당기고, 같은 전기를 띈 입자는 왜 서로 밀어 내는가? 와 같은 질문이다. 이는 비유적으로 "같은 질문"일 뿐만아니라 - 다소 위험할 수 있겠지만 - 환원적으로 볼 때에 실제로도 동치인 문제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적설계론으로 결론을 내든, 무신론적관찰자입장에서 결론을 내든, 허무주의로 결론을 내든 이 문제에 대해 강한 확고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체로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보다, 좀 더 쉽고, 덜 무서운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 gerecter
2.5. 시 한편 ¶
生縱何處來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死向何處去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
生也一片 浮雲起 삶이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 浮雲滅 죽음이란 그 뜬 구름의 없어짐이다.
浮雲自體 本無實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며,
生死去來 易如然 삶과 죽음이란 것도 또한 그와 같다.
獨有一物 常獨露 그러나 여기 한 물건이 항시 홀로 뚜렷하여,
湛然不隨 於生死 생사를 따르지 않고 담연하구나
서산대사 글인가? 잘 모르겠네....--공산우행
2.6. 생각 한 편 ¶
언젠가 탈무드라는 책을 읽다 재미있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옛날에는 무역이든 여행이든 배가 먼 곳을 향해 출항을 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하고 환송식을 해 주며 배가 무사히 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가 용무를 다 마치고 무사히 다시 돌아오면 그보다 더 크게 그들을 환영하며 즐거워하고 축하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어지는 얘기가 사람의 일생과 배의 모습을 비교한 것이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아이를 축복해 주며 앞으로 잘 살아가기를 기원해 준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 그의 앞에는 많은 파도와 힘든 일들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일생을 마치고 죽음에 다다랐을 때, 그의 장례식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슬퍼해 준다. 이 모습은 배가 목적을 마치고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그 목적을 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정말 축하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만일 이 '목적'이 개개인에게 확실히 주어진다면 '왜 사는가'하는 물음에 정확한 답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볼 때 안타까운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건 없는거야'라던지 혹은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smilee
See also 어떻게살아야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