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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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의 개발과 환경오염으로 대변되는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 더 나아가 과학자들의 윤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주장들은 정당한가?

핵무기 개발은 명백한 과학자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세계를 둘로 나눈 이데올로기 창시자들의 몫인가? 전적으로 과학자 혹은 공학자들이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가정하자. 그것은 소위 무식한 공학도로 대변되는 한 개인의 윤리의식에서 출발하는가?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Mad Scientist의 한 모델이 개인적 야망에 눈이 멀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인가?

왜 우리는 과학자들의 윤리 의식 혹은 사회 의식은 일반인들의 그것보다도 현저하게 떨어진다 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가? 잘못된 과학자가 잘못된 정책입안자보다 위험한 존재인가?

왜 개개인은 보통 선한 사람이지만, 집단의 규율은 환경파괴나 핵무기와 같은 악을 요구하는 것일까?

정부관료는 대부분 기득권자들에 의해 선발된다. 그들은 잘못된 의식을 가진 과학자들을 기용할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는 그 정책 입안자들은 이미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문제의 뿌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사회, 과학 분야를 복수 전공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니체의 초인을 기다리거나 과학자들 모두가 르네상스맨이 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논리의 결론은 과학자들의 사회적인 인식은 형편없다로 이끌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은 어느정도 수준이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그들의 윤리의식이 정치가들보다도 바닥의 수준인가? NoamChomsky정도의 양심만이 과학자가 될 자격이 있는가?

과학자의 윤리문제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형성한다는 논리로 한 과학자의 윤리성을 문제삼는 것은 옳지 않다. 과학자집단은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독립된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경우에 부분의 합은 전체가 될 수 없다. 한 미친 과학자에 의해 세상이 망할 가능성은 이라크 전쟁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보다도 낮은 것이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소속집단 중 가장 개혁성이 강한 집단 중 하나가 과학자집단이다. 일반적으로 개혁적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좌파를 의미하고 실재로 많은 과학자들은 대부분 좌파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흔히 좌파라 하면 윤리적으로 우파보다 깨끗한 이미지로 그려지고 그런 의미에서 집단으로서의 과학자들은 윤리적으로 여타집단에 비해 깨끗하다고 볼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자집단이 정치가집단보다 더럽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거부되는 개념이며, 이런 의미에서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을 문제삼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자들에게 윤리의식을 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향이어야 하고, 실제로 문제가 되는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상하 교수의 공학윤리가 좋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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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재 혹은 예고된 재난의 경우 실제 공학자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2. 도구 자체는 악의 원천이 아니다. 기술문명에 대한 반발로 일축되어지는 반기술문명론과 공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별 의미가 없다.
  3. 극심한 위험은 전혀 예측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상식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현실적 장치는 필요하다.
  4. 자유와 평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시민사회 속에서 공학도와 기술자가 공평하게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 의사결정 과정 속에서 미래의 위험(risk)을 줄이도록 지향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과학과 공학의 윤리에 관한 토론이 가져야 할 목표가 된다. |}}

최근 우리 사회는 과학에 대한 비판, 환경보호에 대한 찬양,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선호등이 뒤섞여 그런 논조의 말들은 모조리 이 되고 그 반대의 냄새라도 풍기는 것이라면 모두 으로 보는 풍조가 만연하다. 하지만 이성은 죽지 않았합리성은 살아있다.

MattRidley는 스스로 Techno-optimist라고 말한다. 리들리에 따르면 과학기술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고, 그 올바른 개발과 응용이 문제가 될 뿐인 것이다. 만일 과학기술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이고, 그것이 기저로부터 썩어 있다면 동도서기론에서 김상환 교수가 주장한 바와 같이 현대 과학 기술은 스스로 붕괴하고 말 것이다.

작고한 프랑스 사회학의 거장 부르디외는 과학자들에게 과학공동체를 만들것을 권하고 있다. 단순한 이익단체의 성격이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과학장의 자율성이 절대적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학자집단이 집단적 모임을 형성해야 하며 정치세력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항존 정치세력임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때만, 또 필요한만큼만 정치적 발언을 하고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와야 한다고 부르디외는 주장한다.

이들의 요구가 집단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부르디외는 일단 자신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방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만일 실천의 철학자 부르디외가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단체의 형성을 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학자와 공학자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소박한 윤리의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 공학자들의 상식적인 윤리의식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학자와 과학자는 숨어 있는 개인적 야망과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해 기술을 개발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과학자체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은 쉬운 비판에 속한다. 우리는 뭔가 정말 더 중요한 비판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References :



See also


한 미친 과학자에 의해 세상이 망할 가능성은 이라크 전쟁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보다도 낮은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다시 일어났다. Mad Scientist가 나타나지 않을 보장도 없을 것 같다. 니체의 초인이나 일본만화의 슈퍼로봇이 필요한 날이 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 AnonymousCoward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곱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 이중적분이나 보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부러움과 질투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감정이라면 질투겠죠. 일반인 그러니까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과학자들이 경외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선입견을 갖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고위 공직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 윤리의식을 요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자에게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는 개선과 발전을 위한 요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요. 우스개소리로 정치가들이 인간이 될 확률은 정자가 인간이 될 확률보다 낮다고 하죠 이런 유머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이들을 질책하고 개선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개선 될 가능성은 없어보이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무가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인 집단이 점점 바퀴벌레처럼 이런 살충제에 내성이 생기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만. -_- )

미래를 망치는 미친 과학자의 모습이 공상과학소설에서 소재로 등장하는 이유는 소설에서 요구하는 개연성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상당수 공상과학소설의 작가들이 과학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임에도(일부는 과학자이기도 하죠) 이런 문제를 개연성 있다고 다루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역사상 인간의 손에 전에 다뤄보지 못한 기술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주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업혁명이후 과학이 발전하면서 생긴 인류가 영위하는 환경의 변화는 그 이전 수 세기, 수십 세기의 변화보다 빠르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과학이 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가 과학자들에게 윤리적으로 일반인보다 더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헌터D

Science. 수학은과학인가라는 질문을 보았을 때 누가 말 안해도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르니까! 오늘날 우리는 자연과학 영역의 과학자들이 그 질문에 가장 책임있는 답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호학의 정도가 너무도 미약하여 과학자들이 말하는 과학의 정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찾아보면 지천으로 널려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듣거나 본 것이 있다면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발이 작은 대로 우연히 지난 발걸음에 닿았던 정보가 하나 있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며 한 번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라 생각하여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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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오직 체계적으로 정돈된 지식이다. 지식은 사물의 진실한 속성과 관계에 대한 인식이고, 지식의 상태에 따라서 늘 단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모든 지식분야에서도 단 하나의 과학만이 존재한다.

이른바 엄밀한 과학과 관련해 이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자유주의적 물리학, 사회주의적 수학, 보수주의적 화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누구도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론이나 교의는 그 체계가 과학적 추론의 요구와 형식적으로 일치할 경우 과학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형식이 아무리 과학적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학설 체계가 그것의 전제와 목적이 특정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러한 과학적 형식이 그 학설 체계를 과학으로 만들 수는 없다. ......

사회적 교의나 정치적 교의가 그에 상응하는 영역의 과학과 구별되는 것은 교의가 폐쇄적인 반면 과학은 개방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사회.정치적 교의는 특정한 목적의 규정에 종속되어 있다. 이 목적은 '인식'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소망'에 관계된 것이며, ......

'끊임없는 변화'라는 명제는, ...... 과학이 추론 방식에서 어떤 자의성을 허용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과학은 가차없는 엄격함으로 법칙에 맞는 필연적인 것을 해명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그러나 과학은 탐구 현상과 과정의 '최종 원인' 및 규명된 발전의 '최종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과학은 그 학설 체계가 궁극적으로 종결되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반대로 개방적으로 새로운 사실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고 수정된다. 과학에서는 인식의 목적 외에 다른 중요한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코 문제가 다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논의를 모두 끝낸 후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철학의 빈곤』에서 잘근잘근 씹히게 될 『빈곤의 철학』의 출판을 '맑스'에게 알리는 편지에서 '프루동'이 말했다고 '베른슈타인'이 카더라.)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뽑아낸곳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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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프루동으로부터의 인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와닿는 이야기가 아닌가? 더불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끝내는 등을 돌려 돌아서고 마는 철저히 대립하는 논쟁의 무대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오늘에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들이 교조와 과학을, 소망과 과학을 곧 잘 혼동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과학의 목적이 인식에 있다는 주장에 의한다면, 우리는 과학자의 윤리를 말할 수 있을지언정 과학의윤리를 말할 도리는 분명하게 없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되돌려 보아 과학자의 윤리를 말하기가 그리 쉬운 일일까? 윤리문제는 사회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윤리문제와 관련하여 과학자 혹은 과학을 지목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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